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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5년 07월
  • 1995.07.01
  • 664
30대론 이제 그만?
어느 시대나 30대는 있었다. 하지만, 1995년 오늘 한국사회를 사는 30대의 의미는 색다르다. ’30대론’에 대한 여러 시각이 엇갈리는 가운데 그 진정한 의미를 짚어본다.

참 짖굿다. 이른바 30대 모임으로 알려진 곳의 사무국 일을 보고 있는 내게 ’30대론 이제 그만’이라는 주제의 글을 청탁하다니. 대체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할까. 일단 사무실에 있던 기사 스크랩부터 찾았다.

’21세기를 향해 던지는 30대들의 야망 프로젝트’, ’30대 차세대 대망론’, ’30대, 그들의 도전과 집념’, ’30대 역할론, 세대교체를 준비한다’, ‘세계화·지방화·정보화 시대와 30대 역할’.

언뜻 들춰본 30대 특집기사 제목들이다.(최근 어느 시사주간지는 ’30대의 성’을 특집으로 다루기까지 했다.)

이렇듯 언론이 30대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아마 지난 해부터가 아닐까 싶다. 공지영 씨의 소설 『고등어』와 최영미 씨의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가 대형서점 베스트셀러 목록 소설과 시 분야에서 각각 수위를 차지한 시기였다. 또한 ’21세기 프론티어’를 비롯 각종 ’30대 모임’들이 속속 만들어진 시기이기도 했다. 게다가 ’30대를 위한’이란 수식어를 단 문화공간이 생겨나고, 연극·음악 공연과 전시회 등이 잇따라 열리기도 했다. 한때 ‘신세대론’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를 ’30대론’이 메우기 시작한 것이다.

왜 갑자기? 언론이 의도적으로 이를 조장한 측면이 있는 듯싶다. 신세대론이 그랬듯이. ’80년대의 ‘계급·계층론’이 시들해진 ‘90년대엔 ‘세대론’이 상품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을까. 하지만 그렇더라도 이는 한 측면일 뿐이다. 그렇다면 다른 측면은? 그 실마리는 바로 위 특집기사 제목들에서도 찾아볼 수 잇다. ’21세기’, ‘차세대’, ‘세대교체’, ‘세계화·지방화·정보화’, 그리고 ’30대의 역할’. 풀어 말하자면, 21세기 세계화·지방화·정보화 시대를 앞두고 차세대의 주역으로서의 30대들의 역할에 거는 사회의 기대를 반영하고 있다는 얘기다.

1995년, 이 땅에서 사는 30대

당연한 얘기지만 어느 시대나 30대는 있었다. 공자는 서른에 ‘자립’을 선언했다. 또 30대 일반은 20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현실적이고, 40,50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혁신적이다. 하지만, 1995년 오늘 한국사회를 사는 30대의 의미는 색다르다. 그들의 정체성을 30대 일반론으로 설명하기엔 부족하다.

얼마 전 TV 드라마 <모래시계>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오늘의 30대들이 20대를 살아온 시기를 시대적 배경으로 한 작품이었다. 독재정권의 폭압정치가 극에 달했던 유신말기와 5공화국, 그리고 그에 맞섰던 반유신투쟁과 ’80년 광주항쟁과 ’87년 6월항쟁.

오늘의 30대들 중 누구도 이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당시 운동의 일선에 섰느냐, 아니냐는 그리 중요치 않다. 오늘의 30대는 누구 하나 예외없이 어떤 식으로든 그같은 질풍노도의 시대에 청춘을 바쳤던 ‘모래시계’ 세대다.

오늘 30대들의 정서적 유대는 바로 이같은 공통된 역사적 경험에서 유래한다. 공통된 역사적 경험의 결과는 ‘서른, 잔치는 끝났다’로 나타날 수도 있고, ‘지난 날의 꿈이 나를 밀어간다’로 나타날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구든 ’80년대가 젊은 그들의 가슴 깊이 새겨놓았던 역사적 각인(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확인, 역사의 진보에 대한 희망, 공동체에 대한 헌신 등등)은 지우기 어렵다. 이같은 ’80년대의 ‘시대정신’을 바탕으로 새로운 기술과 가치관을 소화해낼 때 21세기의 올바른 시대정신이 창조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 30대들의 역할에 주목할 수밖에 없는 첫째 이유다.

또한 오늘의 30대는 전통 산업사회의 막내이자 정보화사회의 맏형이다. 30대가 한국현대사에서 차지하는 지형은 권위주의와 민주주의, 뽕작과 랩송, 타자기와 컴퓨터, 검정 교복과 교복자율화, 집단에 대한 강조(’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와 개인의 재발견, ‘보릿고개’로 대변되는 궁핍의 시대와 ‘압구정동’으로 대변되는 풍요의 시대 등등의 사이에 놓여 있다. 혹자는 이와 관련 30대를 ‘샌드위치 세대’ 또는 ‘틈새 세대’라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30대는 20대 신세대와 40,50대 구세대 간의 세대 단절을 극복하고, 이들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할 수도 있다. 30대들이 주목받는 둘째 이유는 여기 있다.

셋째, 실제 현실정치에서도 30대의 영향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이번 6·27 지자체 선거 3,100만 유권자 중 30대 유권자는 856만 명(27.6%), 20대 유권자 94만 명(29.2%)에 비해 유권자수는 적지만, 실제 선거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투표자 점유율은 가장 높으리라는 게 전문가들의 예측이다. 이는 과거의 경험에 비춰보면 금방 드러난다. 30대의 투표자 점유율은 ’91년 기초의원 선거 26.8%(20대는 19.3%), ’91년 6·20 광역의원 선거 26.4%(20대는 21.2%), ’92년 14대 총선 28.1%(20대는 22.9), ’92년 14대 대선 28.7%(20대는 25.8%)였다. ’30대’라는 변수를 고려하지 않고서는 한국정치의 앞날을 예측할 수 없다는 얘기다. 30대 유권자들의 성향이 “합리적이고 민주적이며 미래지향적 비전을 갖춘 집단을 선호한다”는 여론조사 결과는 그런 점에서 희망적이다.

앞서 얘기들과 다소 중복되지만 몇마디만 덧붙이자. 30대들은 그 층이 두텁다는 것이다. 4·19세대라든지 6·3세대, 혹은 민청학련 세대는 짧은 시간대속에서 명문대들 중심으로 몇 명의 운동가들 위주의 ‘세대규정’이다. 이에 반해 30대는 인구층, 대학생 집단의 숫자, 그 시기적 범위 등에 있어서 그를 휠씬 뛰어넘는다. 바로 그 때문에 30대는 기본적으로 커뮤니케이션과 상호조정 문화를 갖고 있다. 친한 친구 사이에도 한 명은 청와대, 한 명은 동교동, 한 명은 감옥, 한 명은 외국 유학에 가 있는 경우가 많으며, 이들은 서로 대화가 가능하다.

한 마디로 이들의 유대는 경쟁과 상호협조를 동시에 할 수 있는 ‘대등한 인간관계’를 기본으로 한다는 것이다. 최근의 ’30대 모임’들이 거의 예고없이 ‘합리적 운동세대’와 ‘양심적이고 건강한 전문가 집단’의 결합이란 양상을 띠는 것도 이런 바탕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더더구나 30대들은 이미 20대에 한국사회를 움직인 경험이 있는 세대다.

그런 점에서 ’30대 역할론’은 분명 의미가 있다. 특히 사회주의권의 몰락, 문민정부의 탄생, 학생운동의 쇠락 과정에서 ‘혼돈과 방황’을 거쳐 ‘은거와 침묵’의 시기를 보냈던 30대들이 다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점은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그같은 목소리와 움직임이 현실의 결과로 나타나기 위해선 몇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30대 역할론이 30대 독주론은 아니다.

먼저 ’30대 역할론’이 암울했던 시대에서의 헌신에 대한 보상심리에서 연유한 것은 아닌지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래야 ’30대 역할론’이 ’30대 독주론’으로 내달리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물론 ’30대 독주론’을 주장하는 30대 모임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본의 아니게 오해를 살 소지는 여전히 있다. 자칫 선배세대들에겐 ‘건방지고 철없는 후배들’로 비춰질 수 있으며, 후배세대들에겐 ‘선배들의 오만과 편견’으로 비춰질 수 있다. 그런 오해를 받는다면 될 일도 안 된다. 정치권에서 제기되는 ’30대 기수론’만 해도 그렇다. 자칫 30대 기수론은 세대교체론의 희화화가 될 수 있다. 지금 제기되는 세대교체론은 현재 우리사회를 장악하고 있는 정·관·재계 마피아에 대한 당면한 세대교체를 의미한다. 이를 놓친 30대 기수론은, 급박한 현실의 세대교체 문제를 회피하는 것이고, 다른한편으로는 30대들에게 또다른 ‘준비론’의 환상을 심어줄 수도 있다.



사실 ’21세기 프론티어’의 경우 창립 초기 모임의 정체성과 관련 내부논란을 겪은 적이 있다. 논점은 ’30대 규정’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였다. 결론은 ‘신문명의 도래와 세계질서의 변화 속에서 사회발전 전략을 함께 고민한다’는 모임의 취지에만 동의한다면 굳이 30대를 고집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택한 개념이 ‘범30대’였다. 당시 논의 과정에 참가했던 한 회원의 발언을 그대로 옮겨본다.

“범30대, 정신적 30대라는 표현은 ‘70~’80년대를 함께 겪어왔던 일종의 ‘시대정신’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상적으로 정신적 공황기를 거쳤던, 그리고 지금은 생활의 일선에서 사회발전에 관한 고민을 공유하고 책임을 나누려는 ’90년대의 유일한 ‘공론집단’으로서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그런 세대라는 의미에서의 30대다.”

30대 역할론에서 자연적 연령은 의미가 없다.

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30대 역할론은 결코 그들의 연령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 아니다. 앞서의 문제의식에만 공감한다면 20대건, 40대건, 50대건 그들의 자연적 연령은 의미가 없다. 함께 가야 한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동반자가 필요한 법이다.

이는 당연히 30대들 자신의 세대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30대들이 계층을 뛰어넘어 서로 교감할 수 있는 구조와 프로그램을 마련해야 한다. 최근 30대 모임들의 성격에 대해 ‘예비 엘리트들의 인맥 만들기’, ‘성공한 사람들의 블록’, ‘먹물들의 잔치판’이란 우려섞은 시각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를 단지 ‘질시’의 차원으로 치부해선 30대 모임의 전망은 없다. 자기 세대조차 끌어안지 못하면서 어떻게 세대의 가교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기존의 사회운동, 생산직 및 사무직 노동조합, 30대 모임 등이 각자의 독특한 처지와 문제의식을 이해하고 이해시킬 수 있을 때 세대 전체의 잠재력이 백분 발휘될 수 있을 것이다.

30대는 승리와 패배, 희망과 좌절을 함께 맛본 세대다. 오늘 ’30대 역할론’에서 우리는 또다른 희망 하나를 엿볼 수 있다. 하지만 ’30대 역할론’에 도취해 자기성찰을 게을리 할 때 그 희망은 또다른 좌절을 낳을 수 있다. 원하는 미래는 제발로 오지 않는다. ‘주장’만으로는 미래를 개척할 수 없다. 실천이 필요하다. 미래는 언제나 준비하는 자들의 몫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30대 역할론의 결과는 아직 미지수다. 이것이 ’30대론 이제 그만’이란 주제에 굳이 물음표를 단 까닭이기도 하다.
천호영(‘21세기 프론티어’ 사무국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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