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물어진 마지막 피난처

허물어진 마지막 피난처

극단적인 수사(修辭), 일상화한 승부욕

우리 대통령은 극단적인 용어를 잘 구사한다. 오랫동안 독재와 싸워서 그런지 그분이 즐겨쓰는 용어는 매우 비타협적이다. 그 대표적인 용어가 ‘절대로’다. 그분은 우선 선과 악을 구분하고, 악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그분은 ‘철저히’라는 말도 좋아한다. 악에 대하여는 저 밑바닥의 실뿌리까지 남김없이 뽑아내고자 한다. 그분이 구사하는 수사(修辭)는 그런 느낌을 준다.

그분은 한 번 마음먹은 것은 불퇴전의 기세로 밀어붙인다. 저돌적(猪突的)이라는 말을 국민 모두가 실감하게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 힘과 그분이 구사하는 극단적인 용어는 곧잘 상승작용을 한다. 그래서 그분의 말의 표적이 된 대상에게는 엄청난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그런 경우에 그분의 어법은 큰 효과를 낸다. 겁먹은 병정에게 총을 겨누면 격발하기도 전에 쓰러진다지만, 도덕적으로 정당성이 없는 대상은 그분의 일갈에 꽁무니를 사린다. 그렇게 하여 그분은 어려운 고비들을 넘겼고 종국에는 대권까지 거머쥐었다.

짓밟힌 피난처, 차단당한 화해

그러나 도덕성을 확보하고 있고 더욱이 대항할 논의가 있는 대상에게, 극단적인 수사나 막무가내의 밀어붙이기는 아무래도 부적절한 것 같다. 우리는 그런 실례를 이번의 명동성당 사건에서 읽게 된다.

대통령은 천하가 다 아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므로 교회가 피난처임을 모를 리 없다. 성서에도 예수는 버린 자의 하나님이고 눌린 자의 피난처이며 괴로운 자의 구주라고 적혀 있다. 버린 자, 눌린 자, 괴로운 자가 반드시 선의 편일 수는 없다. 때로는 부정한 자, 죄지은 자, 거짓된 자일 수도 있다. 그러나 교회는 그들을 받아들이고 보호해야 한다. 중세 이래 그것은 교회의 확고부동한 전통이 되었다.

교회는 버린 자, 눌린 자, 괴로운 자를 무턱대고 감싸지는 않는다. 그들이 선이라면 그 선이 햇빛을 보게 하고, 그들이 악이라면 그 악에 햇빛이 들게 한다. 이번의 경우처럼 선도 악도 아닌, 노사간에 절충이 필요한 경우라면 격앙된 마음에 사랑을 불어넣어 서로 대화하고 화해하게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교회법이다. 그러기 때문에 피난처로서의 교회는 보호해야 한다.

길 잃은 문민정부, 뒤집힌 모래시계

그런데 정부는 이 피난처에 공권력을 투입했다. 피난처도 어디 보통의 피난처인가? 명동성당은 누가 뭐라 해도 우리 시대의 성역이다. 이 성당은 군사독재도 범접할 수 없는 권위로 버린 자, 눌린 자, 괴로운 자들을 지켜왔다. 그런 명동성당에 경찰을 들여보낸 것이다.

정부는 법 앞에 성역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정통성이 없는 정부에게는 몰라도 선거로 뽑힌 문민정부에게 성역은 어림도 없다는 주장이다. 언론도 바로 그런 논리로 공권력의 투입을 부채질했다. 어느 언론은 같은 논리로 추기경더러 백기를 들도록 강요했다. 실정법은 알아도 더 큰 것은 모르는 무지의 소지다.

무쏠리니가 구상하는 국가는 모든 것을 총괄한다. 그는 인간의 정신과 신앙이 치유하는 영역의 존재도 국가의 이름으로 부정한다. 그에게는 국가의 관여를 제약하는 행위란 모두 국가모독이다. 우리 정부가 종교적 영역에까지 절대적 지배권을 행사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파시즘이다.

하버마스가 말한 민주체제란 입법, 사법, 행정의 국가기구가 역할을 자제하는 사회를 말한다. 민주체제는 그 대신에 ‘공중영역’ 또는 ‘시민사회’의 자율성을 중시한다. 국가기구와 공중영역 및 시민사회의 세 분절 영역은 협주(協奏)하는 양상으로 작동한다. 엄연한 ‘시민 불복종’까지도 민주이념을 구현하는 하나의 장치로 인식한다. 민주체제는 그렇게 하여 탄력을 얻는다. 우리 정부가 그런 폭 넓은 협주의 정신을 부정한다면 그것은 절대주의다.

국가는 자본과 노동의 동등한 대화를 보장하고 지원해야 한다. 국제기구로부터 노동문제와 관련한 일련의 악법적 조치를 시정하도록 요구받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 정부가 억압적 노무관리를 통해 자본의 이익만을 보호하려 한다면, 그것은 바로 ‘유혈적 테일러주의’다. 그리고 그것은 박정희 방식이요, 전두환 방식이다. 그것은 시대착오이며 ‘모래시계’가 뒤집혔음을 의미한다.

정부는 권위가 서야 한다. 정부의 권위는 ‘공중영역’이나 ‘시민사회’의 자율성을 존중할 때 자연스럽게 확보된다. 그런 점에서, 버리는 자가 얻을 것이라는 성경구절은 진리다. 정부는 이번에 문민정부다운 방법으로 권위를 얻을 호기를 스스로 내던졌다. 정부는 힘으로 교회를 밀어붙였고, 그렇게 하여 정부의 도덕적 권위는 참담하게 무너졌다.

대통령은 ‘예지자’로 돌아서야

대통령은 유세 때 두 손을 번쩍 쳐들고 “나는 예지잡니다”하고 여러 차례 외친 바 있다. 우리가 잘 알 듯이 대통령은 발음을 편하게 하는 분이다. 그분은 복모음을 싫어한다. ‘의’는 ‘이’로, ‘회’는 ‘에’로 발음한다. 그래서 ‘의회’는 ‘이에’를 거쳐 ‘예’가 된다. 비슷한 순서를 밟아 ‘주의’는 그냥 ‘지’가 된다. 그리하여 그분은 ‘의회주의자’를 ‘예지자’로 발음한다. 의회를 무대로 싸워왔으니까 그분은 의회주의자였으며,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사실을 예언했으니까 그분은 예지자였다.

의회주의자답게 대통령은 의사당 앞에서 취임했다. 그 상징성에 감복한 국민은 그분의 취임과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의회주의가 활짝 꽃 피게 될 것으로 믿었다. 의회가 살아나야 ‘공중영역’이 살고 ‘시민사회’가 산다. 그러나 지금도 의회는 강정처럼 속이 텅텅 빈 채 여의도 한구석에 쳐박혀 있다. 가끔 그쪽에서 소리가 나오지만 공허할 뿐이다.

지금 모든 권력은 청와대에서 나온다. 대통령은 그 진두에서 ‘예지자’라는 말은 접어두고 ‘절대로’와 ‘철저히’만을 강조한다. 명동성당을 밀어붙인 것이 이런 달갑잖은 징후와 함께 하고 있다는 데서 우리의 불안을 느낀다. 더 늦기 전에 대통령은 돌아서야 한다.

김민환(고려대 신문방송학과 교수이며 본지 편집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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