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연대’를 위한 뼈저린 물음

‘희망의 연대’를 위한 뼈저린 물음

비영리·비정부단체들의 조직적인 자원활동이 세계적인 각광을 받고 있다. 그것도 또 다른 ‘세계화’의 한 흐름인가. 사회발전을 위한 세계 정상회담과 더불어 어깨를 겨루며 코페하겐에서 열렸던 민간사회단체(NGO : Non Govemmental Organization) 국제회의는 그 하나의 상징이 될 만하다.

더구나 미국의 존슨 홉킨스대학 정책과학연구소장인 레스터 샐러만은 사뭇 과감한 말투로 비영리·비정부단체들의 움직임을 평가하고 기대한다. “실제로 우리는 전세계적인 결합혁명(association-revolution)의 와중에 있으며, 이 현상은 20세기 말에 있어서, 19세기 말 민족국가들의 부상에 비견될 만한 중요성을 띠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과감함을 넘어 사뭇 과장된 말투인 것만 같다(「신동아」1994.12. 참조).

왜 그의 ‘세계사적 진단’이 과감함과 과장됨으로만 울려오는가. 나도 어쩔 수 없이 뼈저린 아픔으로 정직히 말하고자 한다. 한마디로 그것은 이땅의 시민·사회운동이 자리하는 현주소와 그 흐름이 대조적으로 떠오르는 탓이다. 바로 그 뼈저린 ‘대조’로 말미암아, 우리의 연대가 진정 ‘희망의 연대’로 피어나고자 한다면 마땅히 응답해야 할 뼈저린 물음들은 줄줄이 솟아난다. ‘결합혁명’ 따위를 들먹일 나위도 없이 이땅의 시민·사회운동은 오늘, 합의된 지향이 있는가. 운동이 ㅡ 어제와 오늘은 어떻게 이어져야 하며, 또한 내일은 어떻게 열려져야 하는가에 대해 그 나름의 답안이 마련되어 있는가. 그것은 어제와 오늘과 내일을 관통하는 운동의 역사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는 편이 나을 것도 같다. 가령 한쪽에선 어떤 운동가의 정당 가입을 두고, 마지막 ‘재야’의 제도권 진입이라고 표현한다. 그렇다면 이제 ‘재야’가 종말을 고했다는 것인가. 그러나 다른 한쪽에서는 고개를 내젓는다. ‘재야’가 아직도 엄존한다는 선언의 고개짓이다. 다시 그러나 또다른 한쪽에서는 ‘재야’의 역사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전제 아래, 이젠 발전의 새로운 이름이 정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시대의 변화에 걸맞는 ‘바른 이름’(正名)이 지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바른 이름’이란 ‘바른 실체’의 반영에 다름아닐 터이다. 이른바 다원주의의 증상인가.

구태여 다원주의를 도마 위에 올려 거론할 만한 겨를은 없다. 그러나 분명히 새겨두어야 할 것은, 모든 비영리·비정부단체들의 시민,사회운동은 ‘재야성’ 또는 ‘재야정신’에 기초해야 하고, 기초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재야성’ 또는 ‘재야정신’이란 흔히 예언자적 비판자의 입장이라고 말해진다. 그것은 우상 파괴의 정신이며, 막스 베버가 말하는 ‘마술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한다는 뜻에서 오늘의 과학정신과도 이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의 시민·사회운동 세력은 여전히 ‘재야’로 불려 무방할 법도 하다. 그러나 어제의 ‘재야’가 오늘의 ‘재야’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지향과 전략의 차이를 눈감아버릴 수 없는 탓이다. 거기서 새로운 ‘바른 이름’의 요구는 태어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껏’ 재야’의 새로운 ‘바른 이름’은 태어나지 않는다.

‘재야’의 ‘바른 이름’ 타령이야, 이미 전제한 그대로 하나의 비유거리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정작 안타까운 것은 ‘재야’를 극복하지도 목한 채, 허전해져 버린 ‘재야’의 광장을 숨이 찬 시민·사회운동의 현실이다. 나는 레스터 샐러만이 평가하는 시민·사회운동의 동력과, 국제 NGO의 정명한 코디네이터였던 디엘리 벨헬스트의 저서를 바탕삼아, 다시 줄줄이 솟아나는 물음을 던지고자 한다. ­여기서 이미 던진 물음들, 그리고 앞으로 던질 물음들은, 실상 나 스스로에게만 맨먼저 던지는 물음들 임을 밝혀 두는 것이 옳을 성싶다. 나는 누워서 침을 뱉는 참담함마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

샐러만은 시민·사회운동의 동력은 아래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분명히 민중의 자발적인 활력을 바탕으로 삼는다는 부연도 잊지 않는다. 묻건대 우리의 현실도 그러한가. 오히려 ‘재야’가 획득했던 민중의 바다마저 메말라 왔다고 보는 편이 적절하지는 않은가. 시대의 변화라는 핑계는 구차하다. 시대의 변화에도 불구하도 운동의 요인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운동의 요인들이 사라졌다면 새로운 시민·사회운동을 펼쳐야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시민 또는 민중의 낮잠 타령도 핑계에 불과하다. 그 낮잠을 깨울 만한 경적(警笛)을 제대로 울렸다고 자부할 수가 있는가. 아니면 잠들어 있는 잠재력을 현재화할 수 있는 ‘펌프 프라이밍’ 이나마 재대로 시도해 보았다고 자임할 수 있는가.

국제NGO 활동을 비판적으로 평가한 벨헬스트는 <뿌리없는 삶은 없다>는 저서에서 말하기를, 비정부조직의 지도자들은 흔히 잘 아는 파트너를 선택하기 일쑤라고 한다. 구태여 바꿔 말한다면 ‘단골손님’들끼리만 수작을 나누고 거래를 튼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검은 아메리카’에 들어가면, 으레 선고사건 유지이건 익히 알려진 사람들을 고르고, 또한 그들은 으레 백인이라는 것이다.

나는 그 대목을 읽으면서 가슴이 내려앉는 아픔을 겪었음을 고백한다. 다시 한번 얼굴에 침을 뱉을 수 밖에 없었음을 고백한다. 물론 ‘단골손님’만을 만날 수밖에 없는 우리의 현실이 먼저 서글프다. 그러나 새로운 ‘단골손님’의 바다를 열어나가지 못하는 역량의 모자람이 더욱 서글프다. 벨헬스트, 그는 다른 뜻에서 ‘뿌리없는 삶은 없다­뿌리없이는 꽃도 사람도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거듭 강조한다. 우리의 시민·사회운동에 있어서 뿌리란 과연 무엇인가.

그의 경고는 다시 이어진다. 문화적 우월감, 지적 오만이 연대를 실패의 늪으로 빠뜨린 사례를 수없이 열거한다. 물론 비영리·비정부조직의 운동가들은 도덕적 우월성을 확보하지 않으면 안된다. 시대의 변화와 더불어 지적 우월성도 전제되지 않으면 안되다. 그러나 나는 이제 그 ‘우월성’이라는 표현을 ‘신뢰성’이라는 말로 바꾸고 싶다. 그리고 다시 그 ‘신뢰성’이 다지고 다져진 끝에 기약되는 ‘안정성’이라는 말로 바꾸고도 싶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어떤 문화, 어떤 사회를 가꾸어내고자 운동의 깃발을 들었는가. ‘풀뿌리 문화’ ‘풀뿌리 사회’ ‘풀뿌리 경제’ ‘풀뿌리 정치’의 설계는 뿌리없는 꿈에 지나지 않는가. 그 모든 물음에 응답할 수 있어야만 비로소 우리는 참으로 ‘희망의 연대’임을 떳떳이 노래할 수 있을 터이다. 나의 뼈저린 물음들도 오로지 그날을 열기 위한 충정의 분출임을, 뱀다리로 덧붙여두고자 한다.

김중배 참여연대 공동대표

정부지원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가입


참여연대 NOW

실시간 활동 SNS

텔레그램 채널에 가장 빠르게 게시되고,

더 많은 채널로 소통합니다. 지금 팔로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