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1995년 07-08월 1995-07-01   1006

“사건을 떼고, 변호사는 사고, 조서는 꾸미고”

“사건을 떼고, 변호사는 사고, 조서는 꾸미고”

턱없이 모자라는 수의 판·검사들이 수많은 “사건을 떼고”, 법적 판단 이전에 진실이 왜곡된 채 “조서는 꾸며지고”, 저의를 자기 편으로 만들기 위해서 값 나가는 “변호사를 사야”하는 우리 사법 현실으 살펴본다.

내가 아는 어느 법대 교수의 지적대로 우리나라의 사법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주는 데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표현 만큼 적합한 것도 없다. “사건을 뗀다”, “조서를 꾸민다”, “변호사를 산다”가 그것이다.

“사건을 뗀다”라는 표현 속에는 배당되는 사건수는 많고, 판사·검사 수는 턱없이 모자라는 사실을 잘 반영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개개 사건들이 당사자들의 애틋한 바람과는 달리, 법 종사자들에 의해 신중을 기하는 마음에서 정성으로 다루어진다기보다는 매정하고 지겨운 심정으로 다루어지고 있다는 암시가 들어 있다.

그런가 하면 “조서를 꾸민다’라는 표현은 법이라고 불리는 그 무엇과 악연이 맺어지는 순간부터 진실이 어떻게 왜곡될 수 있는가를 잘 묘사해준다. 법적 판단 이전에 법적 판단의 전제가 되는 사실을 판단하는 과정에서 참이 거짓으로 바뀌고, 거짓이 참으로 바뀌고 마는 요지경 속을 전해주는 것이다. 아울러 이 말은 사법이라는 거대한 제도적 권위 앞에서 일개 피의자의 진실 따위란 그야말로 바람 앞의 촛불에 다름 아님을 알려준다.

“변호사를 산다”라는 표현은 다 짐작하다시피 높은 법원의 문턱을 실감나게 해준다. 명망있는, 따라서 값 나가는 변호사를 대동할 수 없다면 정의는 내편이 되지 못하더라는 처절한 체험과 더불어 이 말이 인구에 회자된다. 공공성을 띠는 고도의 전문직 중에서도 유독 변호사에게만 이러한 인신매매적 표현이 따라붙다니 생각해보면 기가 찰 노릇이다.

이런 세 표현들 중에서도 “조서를 꾸민다”라는 말은 정말이지 우리의 사법이 불신 그 자체에서부터 뿌리내려 지금에 이른 것이 아닐까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게 만든다.

뒤바뀌고, 빠지고, 보태지는 조서들

과중한 업무구조 속에서 많은 사건서류들은 법종사들에게 의해 숙지되기는커녕 대충 훑어지지도 못한 채 서명되거나 날인되기 십상이다. 얼마나 많은 서민들의 구구절절 이야기들이 관공서의 종이에 옮겨지는 과정에서 뒤바뀌고, 빠지고, 보태지고, 감춰졌기에 “조서를 꾸민다”는 말이 스스럼없이 쓰이고 있는 걸까.

공안사범이나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부당한 처분이라면 몰라도 일반 서민들 같은 절박한 민생사범의 경우 크고 작은 부당한 처분들은 어디다 호소할 곳도 없으려니와 호소해봤자 별로 문제삼아 주지도 않는다. 그러니 힘 없고 백 없는 사람들이 소송관계서류에 이런저런 오기(誤記)가 있다 한들 누가 제때에 주목하여 생사여탈권을 쥔 그 막강한 서류의 위력을 바로잡을 수 있겠는가.

오기를 바로잡으려는 사람은 그야 말로 오기(傲氣)를 부려야만 한다. 우리 형사소송법에는 조서는 진술자에게 읽어주거나 열람하게 하여 기재내용의 정확 여부를 물어야 한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진술자가 어떤 내용을 보태거나 빼달라고 변경청구를 한때에는 그 진술을 조서에 기재해야 한다고 쓰여 있다. 또한 피의자나 피고인 등이 조서 기재의 정확성에 대하여 이의를 진술한 때에는 그 진술의 요지를 역시 조서에 기재해야 한다고 되어 있다. 예컨대 피의자 신문조서는 피의자에게 열람하게 하거나 읽어주어야 하며, 잘못 쓰여진 바가 없는가를 물어 피의자가 없다고 진술한 때에 피의자로 하여금 그 조서에 간인(間印)한 후 서명 혹은 기명날인하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만나본 많은 사법 피해자들은 한결같이 자기가 진술한 내용을 담은 신문조서의 오기유무를 확인하는 일이 기실 엄두를 낼 만한 일이 못되더라고 고백했다. 구속 당시 말단 경찰공무원이었던 어느 피의자는 우선 수갑을 찬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서 날인을 하라고 내밀어주는 종이를 그나마 읽어보려고 그 자리에서 꾸물거리는 일이 물리적, 시간적, 공간적으로 용이하지 않더라고 토로했다. 또 조서 내용에 대해 이렇고 저렇고 이의를 제기했다가는 가족들이 면회정지를 당하기 일쑤여서 결국 대충 읽어보는 둥 마는 둥 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 당시 그는 만약 조서내용이 자기가 말한 내용과 다르게 쓰여 있더라도 나중에 법정에 나가 판사 앞에서 소상히 전말을 밝힐 기회가 있으리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이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음은 물론이었다. 공판절차가 거듭될수록 그는, 그때 수사관 앞에서 어떤 수모를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날인을 하기 전에 진술조서 내용을 꼼꼼히 확인하여 바로잡아 놓지못한 자신이 후회스럽다고 했다. 첫단추가 잘못 끼워지면서 그의 사법행로가 고달프게 꼬여갔음은 여기서 새삼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검사의 구형량이 잘못 기록되기도

법적으로 피의자신문이란 피의자의 임의진술을 듣는 임의수사에 불과하다. 따라서 피의자에게는 수사기관의 신문을 위한 출석요구에는 반드시 응할 의무도 없으며, 심지어 피의자는 출석을 거부할 수도 있고, 출석한 때에는 언제나 퇴거할 수 있다. 그러나 단순한 참고인으로 소환된 사람들조차도 가기를 겁내는 장소에서 수사관이 캐묻는 말에 답할 생각은 하지 않고 “나 가겠소” 하고 벌떡 일어나서 나올 기개(?)를 가진 시민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리고 그들은 과연 “그럼 잘 가시오”라는 소리를 듣고 무사히 걸어나올 수 있게 될까?

피의자신문조서만이 아니라 공판기일의 소송절차를 기재한 서류인 공판조서도 나중에 떼어보면 법정에서 재판장과, 소송당사자 내지 소송관계인 사이에서 주고받은 진술내용들이 제대로 기록되어 있지 않기가 십상이다. 어찌된 셈인지 법정에서는 언급하지도 않은 이야기가 버젓이 기록되어 있는가 하면, 막상 법적 판단을 위해 핵심적인 진술의 상당 부분이 빠져 있는 경우도 허다하다. 심지어는 검사의 구형량이 잘못 적히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판사나 검사들의 인사이동이 잦고 ‘듣는 재판’이 아닌 ‘읽는 재판’이 되어 있는 우리 현실에서 이렇게 꾸며진 서류들에 민생사범들의 생사여탈권이 달려 있다고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해진다.

박은정(이화여대 법학과 교수이며,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소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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