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1995년 07-08월 1995-07-01   1672

광고와 신세대론 – 이영애의 트로픽오렌지에서 레게베이지로

광고와 신세대론 – ‘이영애’의 트로픽오렌지에서 레게베이지로

현대사회에서 소비란 일종의 신앙이다. 소비사회에서 특별하게 이름 붙여진 신세대, X세대, 미시족 등이 소비집단을 창출해내기 위해 만들어진 이름으로서 그 의미를 갖는 우리 현실을 진단한다.

기존의 도덕을 체화하지 않는 신세대들이 늘고 있다. 이들은 ‘가족’에 집착하기보다는 부모에게서 독립된 ‘오피스텔’의 공간을 동경하며, 매력이 풀풀 넘치는 이성과의 ‘자유연애’를 꿈꾸기도 한다.

기존의 권위에 저항한다는 X세대란 이름도 이제 낯설지 않다. 이들은 가족이나 단체의 복리보다는 ‘개인’의 행복을 선택하며 순결이라든가 동정이라든가 하는 낡은 윤리에 저항한다. 결혼은 더 이상 필수가 아니라 선택일 뿐이며, 선택이기에 결혼해서도 ‘풀 퍼진’ 아주머니나 ‘배 나온’ 유부남이 되지 않는다.

소위 말하는 ‘미시족’은 결혼해서도 여전히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개성있는 아주머니들이다. 아이를 들쳐 업었거나 살이 찐 모습으로 월남치마를 입고 시장에서 콩나물 값을 깎던 아주머니들을 구경하기란 이제 너무나 힘들다. 그보다 서울거리에서 익숙한 풍경은 짧은 미니스커트에 통굽구두를 신고 모델인지 배우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뽀얗게 화장을 한 소위 ‘미시족’들이다.

신세대의 ‘자유’, X세대의 ‘저항’, 그리고 미시족의 ‘개성’ 속에 담겨있는 것은 정말 자유고 저항이고 개성인가?

자유, 저항, 개성…, 유행하는 그 이름들

매스컴과 기업이 만든 신세대, 미시족 등의 신조어와 함께 노는 권위로부터의 ‘자유, 저항, 그리고 개성’의 내용과 어울리는 것은 독립된 나만의 공간, 찢어진 청바지, 맵시있는 차, 배꼽티, 통굽구두, 꼬리머리, 밖이 훤하게 내다보이는 커피전문점, 그리고 주말여행 등이다.

여기에 존재하는 것은 무엇인가? 모든 권위와 도덕으로부터 해방되어 "나는 나만의 세계를 고집한다"면서 찢어진 청바지에 배꼽티, 꼬리머리에 맵시있는 차를 타고 그에 어울리는 개성있는(?) 동반자와 함께 동반여행을 떠나 길에다 돈을 뿌리는 것은 기존의 관습이나 권위에 대한 저항 혹은 해체일 수 없는가?

근검절약을 미덕으로 살아왔던 우리 부모들의 삶과는 판이하게 다른 삶을 살아감으로써 부모들의 삶의 형식을 해체하고 개성있는(?) 문화를 주도하는 신세대, X세대, 미시족 등의 이름은 무엇 때문에 저항의 표상이 되어서는 안 되는가? 그것은 내가 보수적이기 때문인가?

나는 사고 싶다, 매력있는 인간을

후기 자본주의라 이름하는 현대사회는 소비사회다. 즉 소비가 생산의 재생산조건이 되는 그런 사회다. 현대사회에서 생산의 특성은 그것의 과잉성에 있다. 일본에 대한 미국의 무역전쟁으로 첨예하게 드러난 것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일본기업이 생산한 것만 가지고도 전세계가 충분히 소비할 수 있을 만큼 세계는 과잉으로 태어난 상품들로 홍수를 이루고 있다.

태어난 상품들은 소비를 기다린다. 만들어진 상품들은 없어지는 것이 목적이 되는 것이다. 상품들을 소비되게 만드는 중요한 매개가 바로 광고다. 광고는 결핍관념을 산출해냄으로써 불필요한 것을 필요하게 만드는 선봉장의 역할을 한다.

현대사회에서 소비란 일종의 신앙이다. 신앙의 세계에서 하나님과 관련이 없는 인간은 ‘이방인’으로 그 존재가 무화되는 것처럼 소비사회에서 소비와 관련이 없는 인간은 ‘매력없는 인간’이 된다. 소비사회의 전도사인 광고는 결핍관념을 창출해냄으로써 소비를 조장한다. 그런 광고는 갈수록 세련되어 무조건 상품을 사는 소비층을 만들어내고 있다.

내게 이 물건이 정말 필요한가를 묻지 않고 이유없이 상품을 구입하는 소비자층을 만들어내는 광고가 탁월한 광고다. 만일 자신의 실질적인 필요를 따져서 제품설명서가 약속하는 것을 기반으로 상품을 구입하는 소비자라면 다음 순간, 그 이유로 해서 그 상표를 배반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광고가 지향하는 바의 논리는 논리의 측면에서는 종교와 흡사하다. "왜 신을 믿지?"라는 질문에 "인간이니까" 하는 대답 이외에는 필요가 없는 신자가 가장 철저한 신자인 것처럼 "왜 그 상품이지?" 하는 질문에 "신세대니까 혹은 미시족이니까"라는 말 이외의 말이상이 필요가 없는 자들이 현대 소비사회의 신자들이다.

특별하게 이름 붙여진 신세대, X세대, 미시족 등이 의미있는 이름인 것은 그 이름들이 바로 의미있는 소비집단을 창출해내기 위해 만들어진 이름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들의 개성표현의 매개가 되는 ‘사고 싶다’는 욕망이다.

나는 무엇으로 너를 유혹할 수 있나?

’94년 봄빛 찬란할 때 트로픽오렌지를 바르고 우리의 시선을 끌었던 이미지가 그 가을 재즈와인의 이미지로 유혹했을 때 정말 계절감각이 있는 세련된 여인상,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아름다움을 향하여 자신을 개발해가는 에로스의 현신을 만났었나?

그런 이미지의 주인공들을 아는 척하는 것이 어색할 정도로 화장기가 전혀 없는 얼굴, 환상적인 음악과 함께 재즈와인으로 유혹하는 모습이 아니라 그저 시장바구니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만났다고 상상해보자. 특정한 이미지를 창출했던 여인들을 장터에서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럽다.

‘이영애’라는 기표는 대부분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이름을 사용하는 특정한 여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화면을 통해서만 의미를 가지는 어떤 이미지를 지칭하기 때문이다.

이영애와 함께 트로픽오렌지, 재즈와인을 찾아갔던 여인들이 이제 더 이상 그것을 찾지 않는다. 이제 그 여인들은 ‘내가 변하면 세상도 변한다’고 믿으면서 나의 변화를 또 다른색 파스텔 로우즈나 레게베이지로 시도, 누군가를 유혹하고 누군가에 의해 유혹당하고 싶어 하는지도 모른다.

트로픽오렌지, 재즈와인, 스캔들 레드는 더 이상 우리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이제 우리가 관심을 갖는 색은 또다른 템프테이션의 색으로 선포되는 레게베이지 등의 색이다. 한때 그렇게 아름답다고 여겨졌던 색이 이제 촌티를 내고 한때는 시선을 끌지 못했던 색이 지적인 색으로 등장하는 것은 과연 계절의 변화 때문인가? 혹시 계절의 변화가 아니라 계절의 변화를 내세운 유행의 변화 때문이 아닐까?

트로픽오렌지의 여인이 ‘이미지’였고 그 이미지가 트로픽오렌지가 상정한 ‘제품에 대한 결핍관념’을 만들어냈던 것처럼, 재즈와인의 여인이 이미지였고 그 이미지가 재즈와인이 상정한 제품에 대한 결핍관념을 만들어냈던 것처럼, 이제 레게 베이지의 여인의 이미지에 유혹된 인간은 그 이미지가 뒤로 감춘 상품에 대한 결핍관념이 조장되어 그 상품을 욕망한다.

개인의 개성연출(?)의 도구가 될 새로운 제품에 대한 욕망은 기종에 자기연출 도구로서 사용되었던 제품을 촌스럽게 보이게 만든다. 립스틱으로 말하면 더 이상 트로픽오렌지, 재즈와인이 개성 연출의 도구로서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때 이런 것들이 레게 베이지로 대체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제 아직 반도 채 쓰지 않은 재즈와인은 그의 선배 트로픽오렌지가 그랬던 것처럼 ‘레게 베이지의 유혹’으로 폐기, 쓰레기가 된다.

영원한 아름다움이 왜 없나?

물론 레게 베이지에 대한 결핍관념을 만들어내는 데 매개가 되는 것은 광고였다. 광고는 ‘계절감각에 맞는 미’라는 미의 상대성을 내세워 우리를 유혹한다. 이와 같은 현상 때문에 "영원한 아름다움은 없다"는 말이 나왔을까? 그 전의 추함이 오늘의 아름다움이 되고 오늘의 아름다움이 내일의 천박함이 되는 것을 미의 상대성으로 기술할 수는 있어도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영원한 아름다움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는 현대사회가 소비를 창출하기 위해 선포하는 ‘말씀’이다. 영원한 아름다움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영원한 아름다움이 없어야 유행을 따르는 것이 아름다움으로 등장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유행에 뒤진 것을 해체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해체의 목적은 아름다움의 본질 규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소비패턴을 유도하는 데 있다.

신세대가 되기 위해 삐삐를 차고, 미시족이 되기 위해 미니스커트에 통굽구두를 신고, "내 아인 달라요"하면서 제일 비싼 이유식을 먹이고, 개성있는 인간이 되기 위해 찢어진 청바지를 입으며, 주말을 즐기기 위해 스포츠카를 뽑는다. 이 모두가 누구를, 무엇을 가리키는지 불분명한 ‘나’ 혹은 ‘실존’의 이름으로 실존을 무시했을 뿐이다. 유행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유행을 창출한 기업의 이윤창출에 도움을 주었을 뿐 개성있거나 아름답거나 여유있는 실존을 만들어낸 것은 아니다.

유행은, 그것을 따르는 자에게는 아름다움을 아는 자, 아주머니가 아닌 개성있는 미시족, 신세대 등의 칭호를 훈장처럼 붙여주고 그것을 따르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촌티’로서 응징한다. 미인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만들어지는 미인이 되는 데 필요조건으로서 따라다니는 소도구들, 즉, 상품들을 소비하도록 우리를 소비시장에 내몬다. 여기에서 인간은 소비의 주체로 선포되지만 실상 그는 소비의 노예일 뿐이다.

사실 우리는 "그렇게 입는 것이 왜 아름답지?"에 대한 이류를 현실세계내에서는 찾을 수 없다. 그것은 분명히 기호의 세계에서 유도된 것이기 때문이다. "왜 사냐건 웃지요"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시인처럼 미가 규정되는 방식을, 스폰지가 물을 흡수하듯이 받아 들여가고 있는 현대 소비사회의 사도가 된 우리에게 "왜 아름다운가?"를 묻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소비의 주체인 것처럼 보이는 이드은 사실상 소비의 객체일 뿐이기 때문이다.

남편을 바꾸기 위해 가구를 바꾸는 여자

이들은 결코 역사의 주체도, 삶의 주체도 아니다. 차라리 아무 때나 우리네 안방을 침해, 우리를 유혹하는 ‘광고’가 주체라고 말하는 편이 더 보여주는 것이 많다. 인간은 단지 창조자인 광고의 품에서 노는 피조물일 뿐이다.

남편을 바꾸기 위해 ‘가구’를 바꾸는 여자, 조용하게 사는 여자가 아니라 삶이 중요한 전투임을 인식, 기동성 있게 ‘차’를 마련하는 여자, 무조건 군림하는 남편이 아니라 처제가 결혼할 땐 ‘대형냉장고’를 선물하는 자상한 남자, 가사일을 멀리하는 남자가 아니라 ‘대형세탁기’로 빨래를 할 줄 아는 남자….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소비할 줄 아는 여자’, 소비와 함께 삶을 즐길 줄 아는 ‘가정적 남자’의 이미지일 뿐 현실적인 인간은 아니다.

확실히 광고는 자신들이 만든 이미지를 현실화하기 위해 살아있는 남자/여자를, 그 이미지를 내용물로 갖는 포장지 정도로 대접할 뿐이다. 여기서도 현실적인 남자와 여자는 의미가 없다. 도대체 의미있는 것은 후기 자본주의의 소비시장이 창출한 이미지에 맞게 ‘시장’에서 ‘소비’할 줄 아는 인간들이다. 물론 이때 매개가 되는 것은 유행이다.

이것은 매력적인 인간에 대한 현대의 상식에서도 분명해진다. 사실 어떤 이간이 매력적인가에 대해 적절한 말을 찾을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소비와 관련이 없는 인간은 매력있는 인간이 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오히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이 쉽다.

박한성과 지존파를 기억하십니다?

우리가 이렇게 소비에 길들여지는 사이에 가장 강력하게 등장하는 것은 ‘화폐 물신화" 현상이다. 모든 인간관계가 소비를 매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소비를 할 수 없는 인간은 볼품없는 인간, 매력없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박한성 사건의 여파가 가시기도 전에 우리 사회를 또 한번 떠들썩하게 했던 지존파 사건이 보여주었던 것 중의 하나가 바로 가난해서 인간 대접을 받지 못했던 인간의 왜곡된 한풀이일것이다.

사실 박한성 사건과 지존파 사건은 사회의 양극단에서 일어난 것이지만 결국 소비의 매개가 되어 돈이 지배하는 사회의 필연적 귀결이라는 점에서 크게 보면 동일한 사건으로 분류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사회에서 인간은 과연 존엄하게 대우되고 있는 것일까? 후기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인간은 역사의 주체로서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과연 영혼 깊은데서부터 ‘나는 허수아비가 아니다’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자가 신세대, X세대, 미시족인가? 분명 아니다.

신세대, 그 이름에 취하지 않기 위하여

사실 ‘신세대’, ‘X세대’, ‘미시족’ 등의 이름은 가해자의 이름이라기 보다는 피해자의 이름이다. 이 이름들은 후기 자본주의가 그들이 과잉생산한 것을 소비시키기 위해 만들어낸 앞잡이의 이름이다.

이들은 자유, 저항, 해체, 개성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에 취해 스스로가 소비의 객체임을 망각한 사람들이다. 그것은 이들이 추구한다고 선포된 개성과 자유가 화폐없이 가능하지 않다는 데서 드러난다. 이들에게서 화폐를 제거해보라.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이렇게 본다면 우리가 저항해야 할 것은 그들이 아니라 그들의 운명을 쥐고 흔드는 거대한 체계가 된다. 우리가 저항해야 할 것은 우리의 절망의 근원이 되는 것, 즉, 그와 같은 앞잡이를 만드는 거대한 괴물이지 앞잡이는 아니기 때문이다.

‘저항’이 저항되어야 할 상황과 무관하게 유행으로 떠돌 때 그것은 또 얼마나 우리를 기만하게 되는 것일까? 찢어진 청바지, 맵시있는 차, 신세대의 오피스텔 등과 함께 하는 자유와 저항은 우리를 싱싱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당황하게 한다. 단지 무료하고 심심하고 불안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남발되는 자유니 저항이니 하는 말은 전체에 대한 통찰을 방해함으로써 ‘저항’이라는 말을 저항되어야 할 상황으로부터 소외시켜버리기 때문이다.

사실 자유와 저항이 의미를 가지려면 그 전제 조건은 전체에 대한 통찰이다. 후기 자본주의 전체를 반성적으로 조망함으로써 가능한 저항과 해체만이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저항해야 할 것은 살기 위해서는 인간다운 삶을 포기해야 하고, 인간답게 사는 유일한 길이 삶의 마감일 수밖에 없는 전태일의 상황처럼 우리를 근원적으로 절망하게 하는 상황에 대한 저항이다. 전체에 대한 비판적 통찰에서 시작해야 할 우리의 저항의 꿈이 전체에 대한 통찰을 방해하는 것은 아닌지 물어볼 일이다.

이주향(문화평론가/ 수원대 철학 교수/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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