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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참여사회    since 1995

  • 2010년 12월
  • 2010.12.01
  • 1048


박멸의 정치



문강형준
문화평론가

편혜영의 소설 『재와 빨강』 2부는 쥐에 대한 긴 묘사로 시작한다. 이를 통해 작가가 말하고 있는 것은 쥐는 박멸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쥐를 제거하면 제거할수록 실제로는 살아남은 쥐들이 버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셈이다. 살아남은 쥐들은 한층 강해진다. 본래 멸종에의 위협은 종을 강화시키는 법이다.” 박멸할 수 없는 것이 쥐뿐만은 아니다. 미디어는 매일 살인, 강도, 강간 등 끔찍한 사건사고들을 전한다. 우리는 그런 소식들을 접할 때마다 혀를 차며 폭력과 범죄 없는 세상을 꿈꾸곤 한다. 인류의 역사 속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상상 속 세상이 그렇다. 그리스인들의 ‘황금시대’, 기독교인들의 ‘천년왕국’, 중세 유럽인들의 ‘코케인’, 토마스 모어가 묘사하는 ‘유토피아’는 악이 사라진 곳이다. 하지만 ‘유토피아’라는 말이 의미하듯, 그런 완벽한 세상은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 세상이 있다면 그 곳은 더 이상 ‘세상’이라 불리지 않을 것이다. 그곳은 ‘낙원’이나 ‘천국’일 것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페미니스트 철학자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영락물’the abject이라는 개념을 통해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영락물’은 원래 ‘내버려진 것’을 의미하는데, 이유는 그것이 지극히 불쾌하거나 혐오스럽기 때문이다. 인간은 대개 이러한 영락물을 말 그대로 ‘내버림’으로써 그로부터 멀어지려고 하며, 아예 없는 것으로 여기려는 경향이 있다. 휴지 위에 놓인 손톱과 발톱, 변기 속에 담긴 그 오줌과 똥은 사실 방금 전까지도 우리 몸의 일부였는데도 말이다. 때, 코딱지, 귀지, 체액 등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우리 몸에서 나오지만, 우리는 쉼 없이 이 영락물들을 벗겨내고, 가리고, 닦아내면서 우리를 ‘청결’하게 한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때를 벗겨도 내일이면 때는 다시 생기고, 아무리 손톱을 깎아도 손톱은 다시 자란다. 오히려 몸의 영락물이 말해주는 의미는 다른 곳에 있다. 이 더러운 영락물들이야말로 우리가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기호이기도 하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미 생명이 사라진 시체에게서 손톱이 자라지는 않으며, 땀이 나지도 않는다. 가장 소중한 생명은 그렇게 영락물을 통해서 자신을 입증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몸의 영락물은 일시적으로 내버릴 수는 있어도, 살아 있는 한 결코 완전히 ‘박멸’할 수는 없다. 

  몸의 영락물을 사회적으로 확장해도 논리는 동일하다. 가령, 노숙자는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영락물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가 규정한 ‘승리’ 혹은 ‘생존’의 프로그램에서 처절하게 탈락하여 더 이상 ‘사회인’ 구실을 하지 못한 채 어두운 지하철역과 공원 한 구석을 서성여야 하는 존재. 이들은 소수의 승리자만이 모든 것을 가지는 자본주의가 필연적으로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때’다. 아직 ‘사회인’의 범주에 들어 있는 ‘평범한’ 이들은 출퇴근길에 보이는 노숙자들을 ‘보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청결을 유지한다. 그런가 하면, 국가는 G20같은 행사가 열릴 때면 행사장 주변에서 이들을 쫓아냄으로써 ‘국격’을 높이기도 한다. “세계가 대한민국을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범죄자, 실직자, 장애인, 동성애자, 빈민층 등은 차이는 있으나 비슷하게 ‘내버려지는’ 사회의 영락물이다. 국가는 이들을 자랑스러운 ‘국민’의 호명에서 제외하고, 사람들은 절대로 이들처럼 되지 않기 위해 오늘도 기를 쓰고 경쟁한다.

  노숙자가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일반적으로 존재해 온 영락물이었다면, 좀 더 특수한 상황이 만들어낸 영락물도 있다. 가령, 북한은 그 자체로는 UN의 구성원인 주권국가지만 한국에게는 반세기 이상 ‘반국가단체’로 남아 있다. 재개발 자본에 밀려 생존권을 주장하며 망루에 올라야만 했던 용산의 주민들은 자본의 뒤를 봐주는 국가에게는 ‘테러집단’이었다.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경영자에게는 2년 만에 갈아 끼울 수 있는 ‘유연한 생산요소’에 불과했다. 이들은 각각 분단체제와 자본주의가 필연적으로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쥐, 손톱, 노숙자다. 이들이 없이 사악한 체제는 굴러가지 않지만, 이들을 제거하고 박멸해야만 체제는 ‘깨끗해’ 보일 수 있다. 체제의 관리자들이 이들을 언제나 적으로, 악으로, 골칫거리로 재현하는 이유다.

  문제는 그 어떤 영락물도 ‘완전히’ 박멸될 수 없다는 데 있다. 오히려, 궁지에 몰린 영락물은 죽을 힘을 다해 저항하기도 한다. 막다른 골목의 쥐는 고양이를 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국과 미국의 외교적 배제와 군사적 압박은 북한으로 하여금 연평도를 향해 포격하게 만들고, 특공대의 진압은 망루 위 주민들로 하여금 불을 당기게 하며, 자본의 탄압은 비정규직 노동자가 분신을 선택하게 만든다. 사건은 죄 없는 이들의 생명을 앗아가면서 종결되기 일쑤다. 국가와 자본은 미디어를 통해 이를 적절히 활용하며 새로이 ‘질서’를 정비하지만, 사건이 남긴 슬픔과 통곡의 몫은 언제나 구체적인 부모, 가족, 동료들의 것이다.

  ‘박멸’은 없다. 쥐는 내일도 하수구 속 어딘가에 구멍을 뚫을 것이다. 손톱은 지금도 다시 자라고, 때는 오늘 벗긴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경쟁에서 탈락한 어느 과장은 내일 노숙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 주체사상을 포기할 수 없는 북한은 어떻게든 힘을 과시하기 위해 포탄을 장전할 것이다. 부품취급을 받는 노동자는 울분에 쌓여 라이터를 켤 것이다. 살 곳을 잃은 주민은 어떻게든 망루에 오를 것이다.

  ‘박멸’의 수사법은 언제나 픽션이다. 좋은 사회는 영락물을 박멸한다고 나서는 대신 영락물과 함께 사는 법을 가르친다. 이를 위해 평화체제를 만들고, 복지를 강화하고, 공공재를 지키고, 인권을 보장하려 애쓴다. 나쁜 사회는 어떻게든 영락물을 만들고, 적을 만들고, 악마를 만듦으로써 체제가 가진 근본적인 모순을 덮는데 열중한다. 그 속에서 이익을 보는 것은 대개 극소수의 엘리트와 부자들이다. ‘국민’, ‘영웅’, ‘애국심’, ‘디자인 서울’, ‘국격’ 등의 허황된 단어들이 창궐하는 것은 이를 가리기 위해서다. 텅 빈 수사가 우리를 위대하다 호명할수록, 우리의 실제 삶은 점점 위기와 공포로 가득 차게 된다. 여차하면 우리 자신도 ‘박멸’ 대상에 포함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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