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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참여사회    since 1995

  • 2010년 12월
  • 2010.12.01
  • 1051

재능을 쓰는 다른 방법

조광희
변호사

고통받는 이들에게 자선을 베풀거나 그들이 당하는 부당함에 대해 말하는 많은 사람들이 절대로 그들과 같은 처지가 되려고는 하지 않는다. 고통받는 이들은 무엇을 베풀어야 하는 대상으로 고정된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그들에게 베푸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허영을 채움으로써 그들을 두번 모욕한다. 그렇게 대단하고 그렇게 자비심이 강한 사람들이 가장 못견뎌하는 것은 그들이 베풀어야 할 대상과 그들에게 베푸는 자신이 결국은 동일하다는 지적이다. 내가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말을 혐오하는 이유는 그것이 ‘나는 너희와는 다르다는 이분법’을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발상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물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나보다는 비록 가증스럽더라도 베풀고 있는 사람들이 고통받는 이들에게는 실제로 도움이 되기는 할거다. 그들이 다른 손으로는 고통이 만들어지는 구조에 철저히 기여하고 있지만 않다면 말이다.


“인생을 건 결단 없이 함께하는 삶은 동경일 뿐
 함께하는 삶이 동경이 아닌 현실이려면 결단이 필요하다
 동경이 아닌 현실 속의 함께하는 삶은 결단을 필요로 한다”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지만, 처음 듣고 나서 두 달이 되도록 보러 가지 않았다. 일반적인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이 굳이 왜 이런 영화를 선택하겠는가. 아프리카, 한센병, 헌신하는 의사이자 신부, 뜻밖의 투병 그리고 죽음.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 아닌가. 게다가 TV에 방영했던 것을 수정, 편집하여 만든 다큐멘타리 영화라니, 3D 영화가 대세인 요즘 세상에 너무 물정을 모르고 극장에 걸린 것 아닐까. 그러나 살다보면 저 잘난 척 톱니바퀴처럼 굴러가는 세상이 못마땅할 때가 있다. 과연 내가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불안해질 때가 있다. 게다가 어떤 때 몸은 마음보다 먼저 자신의 결핍을 알아챈다. 나는 어느 휴일, 갑자기 컴퓨터로 <울지마 톤즈>가 어느 극장에서 상영되고 있는지 찾고 있는 내 손을 발견했다. 그런데 심하다. 영화를 보려면 성북구 아니면 김포공항 안의 영화관까지 찾아가야 한다.

  국제공항에서 국내공항으로 전락할 처지에 놓이자, 잉여 공간을 웨딩홀과 상가와 극장 등으로 개조한다는 매우 자본주의적인 발상이 과감하게 현실화된 공간. 그 공간에서 상영되는 <울지마 톤즈>.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조합이었기에 나는 그 영화를 다른 관객 없이 혼자서 보게 될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았다. 아무리 많아야 5명이리라. 그 중에 2명은 분명히 영화평론가일 것이고, 1명은 개봉영화는 모두 다 보는 영화광이리라. 또 1명은 비행기를 놓치고 3년만에 영화를 보느라 제목도 정확히 모르고 들어온 어느 아저씨일 것이다. 다른 1명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 ‘식당집 개 삼년이면 라면 끓일 줄 안다’는데, 내가 영화계에서 굴러먹은 게 몇 년인가. 5명 이상이면 내가 손에 장을…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지? 언뜻 보기에 점유율이 50%는 되어 보인다. 이럴 리가… 라면도 못 끓이는 자신을 위로하는 순간, 내레이션을 맡은 이금희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객석에 울린다. 그런데 <울지마 톤즈>라는 영화의 톤으로는 조금 이상하다.

  아나운서는 내레이션을 삽입하면서 자신이 울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화면을 보면 자꾸만 울게 되기 때문에 화면을 가려 놓고 녹음을 했다고 한다.

  어렸을 적 본 사진이 하나 기억난다. 아프리카의 밀림에서 무척 고생한 서양 할아버지의 사진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슈바이쩌라고 불렀는데, 아무튼 사진상의 할아버지는 전혀 고생스럽지 않은 표정이었다. 역시 밀림이 배경인 다른 사진도 기억나는데 베레모를 쓰고 수염이 인상적인 어떤 사나이의 사진이었다. 사람들은 그 사나이를 '체'라고 불렀다. 그 사나이는 무척 멋있게 보였는데, 할아버지만큼 오래 살지는 못했다. 나는 두 사람 다 그럴듯하다고 생각했지만 추호도 내가 그렇게 살 생각은 없었다. 밀림이나 사막은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곳이 아니다. 나는 내가 왜 그렇게 살지 않는가를 남들에게 잘 설명하기 위해 매우 많은 시간을 할애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런 삶을 동경하고 인간이라면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들의 거의 대부분은 일생 동안 생각만 하고 떠나지 못하지만 아주 가끔 어떤 사람들은 정말 그곳으로 떠난다. 물론 장소는 중요하지 않다. 본질은 ‘장소’가 아니라 ‘타인의 고통에 동참하느냐’이기 때문에 밀림인지 사막인지, 아프리카인지 남미인지가 중요하지 않다. 그곳은 소록도일 수도 있고, 시청앞 광장일 수도 있다. 감옥일 수도 있고, 컵라면 용기가 굴러다니는 반지하의 컴퓨터 앞일 수도 있다. 아니 도리어 밀림이나 사막같은 오지는 그 또는 그녀의 진정한 도피처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와 무관해도 좋았던 이들, 무관심하다고 누구에게도 비난받을 일이 없는 이들을 찾아나서는 것에는 인생을 건 결단이 필요하다.

  어려서 성당 근처에서 자랐고, 남달리 타인의 고통에 공감했으며, 신앙심이 두터운 이태석. 그는 커서 의사가 되고, 다시 신부가 되어 아프리카의 ‘수단’으로 떠난다. 나는‘수단’이라고 하면 ‘목적’을 떠올리거나, 기껏해야 지도상에 직선으로 그려진 특이한 국경선에 대한 인상만을 가지고 있다. 그런 나와 달리 이태석 신부는 자신이 보았던 여러 고통받는 지역 중에서 가장 고통받는 지역이었던 수단의‘톤즈’를 신중하게 선택하여 떠난다. 의사로서, 교육자로서, 그리고 수많은 무엇으로서, 버려진 삶에 기꺼이 동참했던 그는 고통받는 자들과 친구가 되어 같이 살았다.

다양한 재능을 타인의 고통과 나눈 한 사람

이 영화는 다양한 재능이 있었지만, 그것을 자신을 위해 쓰지 않은 어느 사람의 이야기다. 별 볼일 없는 재능의 밑바닥까지 짜낸 후, 그것을 어떻게 야무지게 포장하여 세상을 현혹시킬 것인지를 고민하라고 강요하는 세상에서, 그러한 허위에 찬 삶에 조용히 반대한 사람이 여기 있다. 이 영화를 보면 ‘신’이라 불리는 예수도 아마 우리 옆에서 노래하고, 우리와 함께 차를 마시는, 친구 같은 사람이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사람은 인간이면서도 그저 무심히 인간을 넘어선다.

  평범한 청년이지만 예수이고, 어디서나 만나는 중년이지만 신이다. 영화 속의 이태석 신부는 내게 성당이나 교회에 다니라는 말을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영화관을 나오면서 어떤 감언이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켜온 무신론을 하마터면 버릴 뻔했다. 공항 화장실에서 얼룩진 얼굴을 감추려 세수를 하다 보니, 본 적도 없고, 이제 세상에 없는 그가 그립다. 나도 그에게서 상처를 치유받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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