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0년 12월 2010-12-01   1427

동화 읽기-작은 신화들

작은 신화들

주진우
참여사회 편집위원, 평화박물관 사무처장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동물들은 일종의 우화로, 인간을 사회를 투영한다. 천명관의 화제작 『고래』에도 고래와 함께 거대한 코끼리가 등장한다. 역시 거대한 몸집의 벙어리 춘희와 교감을 나누는 그 코끼리는 하나의 독립적 존재로서 라기보다는 인간의 어떤 원초적 욕망을 반영하는 존재로서 등장한다. 하지만 동화 『초록눈 코끼리』의 코끼리는 인간이 투영한 어떤 상징으로가 아닌 코끼리 자신의 이야기이다.

  앤서니 브라운의 『동물원』에도 인간이 창살이나 울타리 안으로 들여다보는 동물들이 등장한다. 표정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 같지만, 그것을 예민하게 듣느냐 아니냐는 인간 몫이다. 동물원에 가서 보는 동물들은 우리 호기심을 자극한다. 사람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으로, 유사한 점이 있다면 또 그것으로 신기해한다. 특히 코끼리는 독특하게 긴 코, 엄청나게 큰 덩치와 그에 대비되는 유순함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끈다. 확실히 코끼리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만한 특징을 지녔다. 인간들이 동물들에, 또한 코끼리에 가지는 관심의 원인과 심리를 분석하고 그것으로 인간을 들여다보는 일은 흥미롭다. 또한 ‘동물권’ 관점에서 자기 땅에서 유배되어 인간의 볼거리가 되거나 학대당하는 동물들을 안쓰럽게 여기는 것도 소중한 감수성이다. 그러나 코끼리를 화자로 해서 그 코끼리 마음의 결을 따라 풀어가는 이야기는 흔치 않다.

  과연 동물들 자신은 어떨까? 작가는 아무래도 이것이 궁금했던 것 같다. 작가는 이전 작품들에서 자유롭고 발랄한 상상력으로 톡톡 튀는 아이 같은 캐릭터를 만들어내곤 했다. 그의 작품을 보게 되면 자기 얘기를 한다는 느낌보다는 남의 얘기를 참 잘 한다는 느낌이 드는데, 그는 확실히 천상 이야기꾼이다. 이번에는 코끼리 안으로 들어갔다. 작품을 읽어보면 별 어려움 없이(사실은 아닐 것이다) 코끼리 마음을 그리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만큼 별 저항감 없이 유쾌하게 이야기 속에 빠져버린다. 우리 아이한테 책을 던져놓으면 아예 거들떠도 안보는 책들도 있고, 받자마자 달려들어 한달음에 읽어치우는 책도 있다. 관심이 없는 것 같더니, 어느새 들여다보고 있는 책들도 있다. 『초록눈 코끼리』는 맛난 음식이라도 되는 것처럼 후딱 다 읽어버리더니, “아빠가 갖다 주는 책은 왜 이리 재밌지?” 한다. 아직 책장을 넘기지도 않은 책들이 들으면 서운해할 것 같아서 미안할 정도였다.

  동물원의 슈퍼스타 코끼리 범벅은 재미난 쇼를 보여주며 동물원에서 인기 있는 코끼리로 산다. 범벅의 외할머니인 ‘큰 귀 할머니’는 이런 범벅이를 못마땅하게 여긴다. 백 년 만에 나타난다는 ‘천일둥이’로 고향인 아프리카에서 코끼리 무리들의 길을 안내할 운명을 타고 난 범벅이가 아무 생각 없이 사람들 앞에서 재롱떠는 재미에 희희낙락 살아가는 것이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마침내 꿈과 같은 환영을 통해 범벅이도 자신의 운명을 깨닫고, 코끼리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조련사 콧수염의 아들인 환희와 주위 사람들, 동물원의 다른 코끼리들의 도움을 받아 아프리카로 떠나는 비행기에 오른다.

  이 작품에서 재미있는 부분은 사실 아프리카행 비행기에 오르기까지의 과정 – 고난과 사명감, 난관과 지혜, 몰이해와 우정 등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지는 – 이다. 그러나 이야기의 재미보다 내게 흥미를 끄는 것은 좀 다른 데 있다.

  우선은 ‘보여주기’에 대해서이다. 자신이 초록눈을 가진 ‘천일둥이’라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 범벅은 자신의 ‘쇼’에 대해서 엄청난 자부심을 가진다. 관람객들을 들었다 놨다하는 자신의 재능과 끼에 만족하면서 사는 생은 인기 연예인을 생각나게 한다. 그러다가 꿈인지 환상인지 모를 장면들을 만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게 된다.

  범벅뿐 아니라 우리는 누구나 남에게 보이는 삶과 자기 내면의 목소리가 요구하는 삶 사이를 헤맨다. 남에게 보이는 삶이라고 해서 거짓 삶이라고 단정해버리기는 쉽지 않다. 그것 또한 자신의 욕망일 테니. 그러나 그 욕망은 ‘보는 이’들의 욕망과 만난다. 쇼와 대중엔터테인먼트에서 연예인은 보고 보이는 욕망의 한 가운데 있다. 남들에게 보이는 자신을 즐기는 일은 어찌 보면 건강한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들 가슴 한 가운데에 채워지지 않는 공허감이 싹트는 것도 어쩔 수 없다. 그것은 자기 존재의 빔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연예인은 이런 것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아 살아가는 가장 슬픈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범벅이는 자신이 아프리카 초원에서 무리를 이끌 운명을 갖고 태어난 초록눈 코끼리라는 깨달음의 순간과 함께 자신 존재의 의의를 찾는다. 존재의 의의를 찾았다고 해서 그 뒤가 마냥 순탄하기만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냥 살던 지난날이 그리워질 정도로 앞일이 힘들 수도 있다.

  천일둥이답게 사는 것은 어떤 것이냐는 질문에, 큰 귀 할머니는 “인간을 위해 살지 말거라.”라고 답한다. 얼마나 두려운 대답인가. 그 뒤에 범벅이가 겪은 고난이 이를 잘 말해준다. 그것은 사회가 만들어 오고 자신도 흔쾌하게 동의해온 자신의 사회적 역할을 파괴하는 과정과 함께 한다. 사람들의 상식에서는 코끼리는 동물원 안에 있으면서, 관람객들을 즐겁게 해주어야 한다. 코끼리가 다른 선택을 할 때, 그의 진정한 고난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읽고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다. 초록눈을 가지지 못한 코끼리라면? 무리를 이끌어야 될 운명의 천일둥이가 아니라, 그저 한 평범한 코끼리라면? 그냥 아무 것도 모른 채 동물원에서 계속 살아야 할까. 초록눈 코끼리와 행동을 함께 한 다른 코끼리들은 고향으로 가지 않고 동물원으로 다시 돌아간다. 이 동화에서 그 이후의 이야기는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들은 무리를 이끄는 지도자로서의 삶이 아니라 하더라도 모두 자신만의 내면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지 않을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태몽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나도 생전의 어머님이 뭐라고 말해준 것 같은데, 지금은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태몽을 가지고 태어났다. 이 태몽들은, 모든 존재들이 자신만의 소중한 존재의미를 갖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것을 얘기해주는 ‘작은 신화들’이 아닐까.

  아이를 데리고 돌고래니, 물개의 쇼를 본 적이 있다. 인간을 즐겁게 하기 위한 삶을 사는 그들이 물속에서 우리를 향해 부드럽게 돌진하다가, 투명 벽 앞에서 몸을 휘어 되돌아가는 모습을 보는 일은 가슴 아팠다. 인간 사회에서 그런 이들의 체념을 지켜보는 일도 가슴 아픈 일이다. 자신의 삶을 사는 것, 사실 이것 외에 다른 선택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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