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2010년 02월
  • 2010.02.01
  • 1411
  • 첨부 1



강가의 얼음이 풀리듯이



이태호 『참여사회』편집위원장,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

보름 전 미국에 사는 누님으로부터 이메일이 왔습니다.

저나 우리 누이나 살갑고 간질간질한 일을 멋쩍어하는 타입이라 우리 집안의 우애표현 방식은 뻣뻣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전하고 추신으로 안부인사 한두 마디 보태는 식이죠.

그런데 새해 들어 받은 이메일에서 누이는 난데없이 제게 책 한 권을 보냈으니 읽어보라고 권하는 것이었습니다. 의외였습니다. 누나와 저는 독서취향이 달라, 사춘기 이후 책을 서로에게 권한 적이 거의 없던 터였습니다. 놀라운 것은 누나가 보내준 그 소설이었습니다.

그건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제가 아주 간절하게 다시 보고 싶었던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의 원작소설 『A River Runs Through It(Norman Maclean 저,1976)』이었습니다.  


영화<흐르는 강물처럼>이미지 (사진 flickr.com)


'흐르는 강물처럼'은 미국 몬태나 주 산골짜기에 사는 한 목사 부부와 그 아들들의 얘기입니다.
제가 이 영화에 빠져든 것은 저 유명한 브레드 피트의 플라이낚시 장면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아마도 주인공 가족들의 이야기와 우리 가족의 내력이 적지 않게 닮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영화는 "우리 가족에게는 종교와 낚시 사이에 명확한 구분이 없었다"는 주인공의 독백으로 시작됩니다. 이 대목은 생전에 낚시를 즐기셨던 목사 아버지를 둔 저에게 아주 친근하게 느껴졌습니다. 더욱이 이 영화와 우리 가족사의 또 다른, 더 중요한 공통점은 두 목사님들이 저마다 고집스럽고 말 안 통하는 말썽꾸러기 아들을 두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영화 속에서 부자간의 단절과 갈등을 다시 연결해주고 치유해주는 매개는 강과 낚시였습니다.
현실의 보수반공 목사와 운동권 아들도 그렇게 강가에서 평화로운 중립의 공간, 모처럼의 화합의 시간을 발견하곤 했습니다. 낚시를 드리우고 강심을 바라보는 순간만큼은 부자간의 갈등과 어색한 침묵도 강물에 녹아 흐르는 것 같았습니다.

낚시에 기대지 않고도 아버지를 편히 대하기까지는 한참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차츰, 삐딱한 아들의 눈에 비친 아버지의 평안도 사람들 특유의 단도직입적이고 청교도적인 일상도 더 이상 가부장적이고 편협하게 느껴지지 않고 도리어 소박하고 심지어 향기롭게까지 느껴지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편에서도 저의 '미약한 신앙'만 제외한다면 많은 것을 용납하고 양해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두 분이 어떻게 살아오셨고 또 어떻게 살고 계신지 잘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대학입학을 위해 집을 떠나온 후 20년이 지났으니, 철들고 나서 양친과 함께 생활한 적이 사실상 없었던 것입니다. 더구나 한동안 제 딴에는 부모로부터 이해받는 것을 단념하고 갈등을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제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정작 두 분의 삶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살아온 세월에 대해 듣고 기록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먼저 아버지의 살아온 얘기를 기회 있을 때마다 여쭙기 시작했습니다.
이 일은 부자지간을 가깝게 만드는 데 있어 낚시보다 훨씬 효과적이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는 두툼한 대학노트 한 권을 제게 내놓으셨습니다. 거기에는 당신이 살아오신 역정이 빼곡히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이 노트는 게으른 아들을 대신하여 아버지가 남기신 소중한 유산입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살아오신 얘기는 끝내 제대로 듣고 정리하지 못했습니다.

부자 갈등의 안쓰러운 중재자이셨던 어머니는  어떤 상황에서도 아들을 너그러이 용서하고 포용하셨습니다. 역설적으로 너무 친근하고 편안했고 그래서 간간히 당신의 얘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는 점이 어머니를 더 자세히 알고자 하는 노력을 늘 후순위에 두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2007년 여름, 완치된 것으로 판정되었던 암이 재발해 몸져누우신 어머니는 다시 일어나지 못하셨습니다. 저는 어머니와 떨어져 산 22년 세월을 만회하려고 휴가를 냈습니다.
하지만 뒤늦게 어머니에게 달려간 어리석은 아들이 당신의 마지막 4개월 동안 했던 일은 고작 미음 한 술 더 뜨시라고 닦달하고 채근하는 일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평소에 안부 전화 한 번 제대로 못했던 저는 가소롭게도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식의 실낱같은 희망에 매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느라고 정작 어머니의 인생을 함께 돌아보고 정리할 기회를 만들지 못했던 것입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2년 뒤 아버지도 그 뒤를 따르셨습니다.

부모님 유품들을 정리하다가 잡지 부록으로 주는 흔한 종류의 가계부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무심히 버리려다 말고 다시 살펴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것은 어머니의 일기장이었습니다.
줄과 칸을 모두 무시하고 빼곡하게 적어 들어간 그 일기장에는 우리 가족 3년간의 대소사들이 군더더기 없이 일지형식으로 적혀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저와 했던 모든 전화통화, 심지어 제가 출연했던 방송 인터뷰마저도 빠짐없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지의 행간에는 객지에 나간 아들의 무관심과 게으름이 너무도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습니다.


내가 사랑했지만 내 어린 시절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모든 이들이

이제는 거의 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들과 여전히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낍니다.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온전히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


『A River Runs Through It,』 Norman Maclean


설이 지나고 나면 강가에 얼음도 풀리겠지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참여와 행동에 동참해주세요
참여연대 회원가입·후원하기
목록
  • profile
    글을 읽으며 왈칵 눈물이 나는 건, 부모에 대한 그 무관심과 게으름이 남의 얘기같지 않아서인 거 같아요. 부모님의 인생이야기, 더 늦기전에 지금 들어봐야겠습니다.
닫기
닫기
  • 회원소식-"우리는 정부의 전쟁놀이에 동참하지 않습니다"
    • 2010년 07월
    • Jul 01, 2010
    • 789 Read
  • 튼튼재정 투명회계_2010년 3월
    • 2010년 03월
    • Mar 01, 2010
    • 734 Read
  • 칼럼_푸른 옷의 추억
    • 2010년 05월
    • May 01, 2010
    • 1036 Read
  • 칼럼_이 땅의 발자국에 입맞추며
    • 2010년 03월
    • Mar 01, 2010
    • 878 Read
  • 칼럼_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 2010년 04월
    • Apr 01, 2010
    • 1195 Read
  • 칼럼_막다른 길에서도 삶은 이어집니다
    • 2010년 01월
    • Jan 11, 2010
    • 1128 Read
  • 칼럼_강가의 얼음이 풀리듯이
    • 2010년 02월
    • Feb 01, 2010
    • 1411 Read
  • 칼럼-황금투구의 바다
    • 2010년 12월
    • Dec 01, 2010
    • 1354 Read
  • 칼럼-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 2010년 06월
    • Jun 01, 2010
    • 1216 Read
  • 칼럼-이름난 강의 상처입은 신들
    • 2010년 09월
    • Sep 01, 2010
    • 1071 Read
© k2s0o1d4e0s2i1g5n. Some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