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0년 05월 2010-05-01   1219

칼럼_푸른 옷의 추억


푸른 옷의 추억


이태호 『참여사회』 편집위원장,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


어머니가 간호장교 출신이라는 것이 주는 특혜는 별로 없었는데, 그래도 꼽으라면 군인병원 치과를 공짜로 다닌 것이라고 해야겠습니다. 젖니가 빠질 무렵, 어머니 손에 이끌려 춘천 외곽 샘밭이라는 곳에 위치한 그 군인병원에 종종 갔었습니다. 샘밭은 소양강 댐 밑의 마을입니다. 지금은 네온사인이 번쩍거리는 유원지가 되었습니다만 당시에는 포플러가 늘어선 신작로로 이따금 군인 트럭이나 지나다니는 한적한 강변마을이었습니다. 그 포플러 길을 엄마 손잡고 걷던 기억이 아슴아슴합니다. 옆으로는 사철 얼음물처럼 차고 투명한 소양강물이 햇볕에 반짝이며 흘렀고, 강변엔 어린 제게도 곧잘 잡혀주던 어리숭한 잠자리들과 메뚜기들이 지천이었죠.


춘천엔 군인들이 참 많았습니다. 도시 곳곳에서 교복만큼 자주 푸른 옷을 입은 군인아저씨들을 봤던 것 같습니다. 소풍도 ‘충렬탑’이라는 한국전쟁 전적지로 가곤 했죠. 우리 교회에도 군인가족들이 적지 않아서, 늦가을에는 부대 김장, 크리스마스 전후엔 위문 방문을 위해 군부대를 찾는 것이 연례행사였습니다. 캠프 페이지라는 미군부대도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의 제게 가장 큰 볼거리는 미국 독립기념일 퍼레이드와 불꽃놀이였고 가장 신기한 먹거리도 그 미군부대에서 나온 ‘시레이션(C-ration, 비상식량)’ 깡통이었습니다. 중학교 때 교실에서 돌려보던 포르노 잡지도 미군부대에서 나온 것이었죠. 그 즈음 미군악대 퍼레이드를 따라 쫓아가던 그 길 뒷골목에 ‘장미촌’이니 ‘백합촌’이니 하는 기지촌이 있다는 걸 어렴풋이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그저 묘한 호기심의 대상일 뿐이었죠.  


고등학교 1학년 때, 체육선생님은 공수부대 출신이었습니다. 무지막지한 얼차려로 악명 높은 분이었지만 아주 성실한 분이기도 해서 전 그분이 그다지 싫지 않았습니다. 그분에게서 농구, 축구는 물론 핸드볼, 럭비, 미식축구, 크로스컨트리까지 아주 ‘제대로’ 배웠습니다. 학기가 끝날 무렵, 그 분에게서 3년 전 광주에서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아니 그 아주 작은 일부에 대해 들었습니다. 그게 무슨 얘긴 지 나중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2년 뒤 대학교에 들어가니 정문은 물론, 강의실 앞에도 전투경찰들이 방패를 들고 서 있었습니다. 난생처음으로 군화발자국 소리에 소름이 끼쳤습니다. 당시 모든 남자 신입생들은 입학하자마자 ‘문무대’라는 군사시설에서 한 주 동안 군사교육을 받아야 했습니다. 학생들은 당연히 비판적이었지요. 우리 학번 동료들은 이 문제에 대해 토론할 겸, 첫 MT를 한탄강변으로 떠났습니다. 샘밭과 비슷한 포플러 강변을 달리던 시외버스가 군 검문소 앞에 멈추어 서더군요. 어릴 적 그토록 익숙했던 검문소에서 저는 배낭 안에 들어 있는 ‘불온한’ 토론자료가 발각될까봐 진땀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해 4월 말 우리 대학 선배 두 명이 ‘전방입소 교육 반대’, ‘반전반핵 미군철수’를 주장하며 분신했습니다. 군사교육은 2년 뒤 철폐되었고, 미군은 6년 뒤 한반도 배치 핵무기 1,000여 기를 철수했습니다.


6년간의 학생운동을 마무리하고, 저도 군대 비슷한 걸 가게 되었습니다. 양친이 환갑이 넘은 터라, ‘신의 아들’에게만 허용된다는 방위가 된 겁니다. 비교적 고생 없는 군생활이었지만 매일 ‘출근’할 때마다 보안사령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곤 했습니다. 대학 다니는 동안 군부정권에 의한 강제 징집과 ‘녹색사업* ’으로 인해 학생운동 선배와 동료들이 자살하거나 의문사 당한 걸 숱하게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 시절이 칙칙하기만 한 건 아니었습니다. 병영 안에서 온갖 곳으로부터 총천연색으로 살다온 장삼이사張三李四들과 만나는 게 신기하고 제법 재밌기도 했습니다. 군대는 상명하복의 숨막히는 계급사회지만 아주 가끔씩은 사회의 계급장을 떼고 만나는 전복의 공간도 제공해줍니다. 나이든 서울대 졸업생이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디스코덱 웨이터 앞에서 쩔쩔매야 하는 일은 군대 밖에서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죠.








97년 여름, 연변에서 탈북자 형제와 한 주일간 함께 있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북한이 이른바 ‘고난의 행군’을 할 때였죠. 스무 살 남짓에 키가 150Cm가 될까 말까 한 형제는 굶주림 끝에 다락밭 곡식을 서리해 먹다가 산불을 냈고, 처벌이 무서워 도망 나왔다고 했습니다. 식량 구하느라 학교 결석이 잦아 입대자격을 잃었다고도 했습니다. 군대 가면 최소한 굶어죽지는 않는다면서… 여전히 “이 모든 게 원쑤 미제 때문”이라고 목청을 돋우던 그 아이들은 결국 군대보다 군대 바깥이 더 전쟁터 같은 ‘북부조국’을 등지고 남조선으로 왔습니다.


그 뒤 미국에도 갈 기회가 있어서 한 1년간 거기서 보냈습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큰 전쟁 두 개를 치르고 있는 나라가 너무나 평온한 데 놀랐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모병제에 의해 모집되는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가난한 이민자들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미군이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을 공격하는 무기는 무인 폭격기입니다.


3월 26일, 서해 북단 NLL 근방에서 천안함이 침몰했습니다. 그리고 46명이 귀중한 목숨을 잃었습니다. 북한에 급변사태가 발생할 때를 대비해 대량살상무기 제거팀과 점령 부대를 상륙시키는 시나리오를 훈련하는 한미합동군사훈련이 있던 밤이었습니다. 세 차례의 서해교전에서 당한 것에 악이 받친 북한군들의 소행일까요? 원인은 아직 드러나지 않았고, 이 산만한 글의 주제도 아닙니다. 다만, 천안함 장병 합동장례식 전야에 그 소중한 목숨들을 생각하며 떠오르는 상념들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분향소엔 “대한민국은 여러분을 기억할 것”이란 글이 걸려 있었습니다. 기억의 주체가 국가가 된다는 것이 못내 거북스럽고, 과연 그 한명 한명의 무엇을 어떻게 기억하겠다는 것인지도 요령부득입니다. 이런 기념과 기억들이 남녘과 북녘, 무장갈등이 존재하는 세계 도처에서 서로에 대해 다짐될 수 있다는 사실이 부조리하게 느껴집니다. 차라리 “군대 가라고 해서 미안하다”는 가난한 엄마의 절규가 더 와 닿는 밤, 한반도의 밤입니다. 천안함 침몰로 희생된 군인들의 명목을 빕니다. 애통하는 가족들을 위해서도 이 밤에 기도합니다.


<참여사회> 5월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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