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0년 09월 2010-09-01   1204

칼럼-이름난 강의 상처입은 신들


이름난 강의 상처입은 신들1)

 


이태호 『참여사회』 편집위원장,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

시간의 흐름을 달력의 숫자로 헤아리지 않고 자연의 변화로 헤아리는 것은 근사한 일입니다. 그것은 인류의 오래된 본능적 감각이지만 잊혀져가는 감각이기도 합니다.

자연을 즐기는 모든 취미와 마찬가지로 낚시는 계절의 변화를 섬세하게 느끼고 그것을 즐기게 해 줍니다. 매화꽃이 필 무렵엔 황어가 바다에서 올라오고, 벚꽃이 필 무렵에는 누치와 잉어가 떼 지어 여울을 탄다는 것을 기억하고 기다리는 것은 큰 즐거움입니다. 뒤이어 쏘가리가 복사꽃을 따라 강을 오르고, 아카시아와 찔레꽃 향기가 가득한 5월의 밤에 잔자갈이 깔린 여울윗목에서 군무와도 같은 정열적인 혼례를 올리지요. 한여름 장마로 불어난 흙탕물 속에서는 메기가 제철을 만난 듯 뛰어 놀고, 9월 들어 강물이 우윳빛을 띠면서 맑아지기 시작하면 새로 돋아나는 물이끼들을 맛보려는 은어떼들이 여울 속 바위 위에 앙증맞은 빗살무늬의 입술자국을 찍고 다닙니다. 말없이 흐르는 강은 언제나 온갖 생명의 소리들로 충만합니다.

서울 한복판에서 복숭아 꽃잎 흐르는 4월의 강 언덕에서 만날 어떤 물고기를 3월부터 기다리는 것, 혹은 우윳빛을 머금고 여울목을 소리내며 흘러갈 9월의 강물을 보기 위해 8월부터 조바심치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그것은 4시에 오는 친구를 생각하면 3시부터 행복해진다던 생떽쥐베리의 소설 어린왕자에 나오는 여우의 설레임과 비슷합니다. 여우의 독백에 따르자면 ‘그건 어느 하루를 다른 날과 다르게, 어느 시간을 다른 시간과 다르게 만드는 특별한 의식’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런 설레임을 굳이 친환경적 취향이라고 미화할 생각은 없습니다. 비록 놓아줄지언정 물고기를 잡아 올리는 비정한 놀이가 낚시이고, 그대로 두어도 좋을 자연에 극성스럽게 찾아가 나쁜 영향을 미치는 행위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나마 생태적 부담을 덜 주는 것은 가까운 집 근처의 강이나 개천을 찾는 것일 터. 그 점에서 서울 도심을 한강같이 크고 아름다운 강이 가로질러 흐른다는 것은 제게는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서울 도심을 W자로 가로질러 흐르는 한강은 과거엔 지금과 달리 그 굽이마다 여울과 소, 그리고 섬, 늪, 둠벙들을 다양하게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 한강은 동서로 두 개의 보에 의해 가로막히고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쳐진 채 인정사정없이 강바닥을 훑어내는 준설 작업으로 이미 인공적인 운하와 다를 바 없이 되어버렸습니다만. 하지만 서울의 지하철 역에 무심히 붙어있는 서울시 지도를 유심히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이 ‘이름난 강’의 아름다운 과거를 조금은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최근의 한세대를 제외한 수만 년 동안, 덕소를 지난 한강의 물줄기는 암사동의 여울지대를 지나 광나루와 잠실 앞에서 멈추어 서서 습지와 둠벙을 만들고, 다시 뚝섬 부근의 모래밭과 여울지대를 지나 압구정과 한남동으로 흘러들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휴식을 취한 물줄기는 마지막 힘을 다해 반포에서 용산으로 이어지는 길고 완만한 여울을 따라 흐르다가, 지척으로 가까워진 서해의 밀물이 만들어낸 역류와 씨름한 끝에 밤섬을 만들고 넓은 범람원을 만들면서 광대한 습지를 에둘러 마포나루와 망원동으로 천천히 빠져 나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 장하던 한강의 물줄기는 단조롭게 마천루의 회색빛 그림자와 네온사인들을 반사해내고 있을 뿐입니다.  

다만, 아직도 한강에는 과거 흔적이 조금 남아있긴 합니다. 잠실 수중보 아래 여울, 그리고 반포대교에서 한강대교로 이어지는 여울이 그것입니다. 비록 남김없이 바닥을 긁어낸 밋밋한 여울지대지만 여기서 몇몇 한정된 종의 여울 물고기들이 그나마 최소한의 산소와 산란처를 제공받습니다. 상처 입은 강의 신이 이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간신히 깃들어 있는 곳입니다. 아주 가끔씩은 피부가 상해 숨을 거둔 상괭이2)의 사체도 여기서 발견됩니다.

특히 잠실 수중보는 놀라움과 비탄의 장소입니다. 한강에 아직 이렇게 많은 물고기들이 살고 있다는 것에 한번 놀라고 이들의 비극적인 운명에 한숨짓게 됩니다. 4월에 이곳을 찾으면, 한강을 가로질러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수중보의 물살 아래서 무수히 많은, 거무스름하고 뾰족한 무언가가 들쭉날쭉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 저는 그것들이 물줄기의 현란한 그림자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무수히 많은 누치들의 주둥이였습니다. 2m도 넘는 수중보를 넘어서지 못하는 가망 없는 몸부림입니다. 한편, 수중보에 가로막힌 참게들은 어둠이 내리면 일제히 잠실 수중보의 양 옆 콘크리트 석축을 따라 기어오르기 시작합니다. 잠실 한강시민 공원 얕은 물가에는 상류로 가지 못한 참게의 사체들이 즐비합니다. 물속 생명들을 상류로 이끈 자연의 시간은 여기서 그들에게 비정한 떼죽음을 안겨줍니다.  

4대강 댐공사 홍보 광고를 보고 있자니, 강을 살려서 송사리가 돌아오게 하자고 합니다.

송사리는 본래 둠벙이나 늪지에 사는 종으로 농약 외의 유기물 오염에는 비교적 강한 반면, 여울에서는 살 수 없는 물고기입니다. 한강에 송사리가 살게 하려면 여주 이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둠벙을 살려두어야 하고, 팔당 유기농 마을의 농약 없는 논밭을 그대로 놔두어야 합니다. 바닥을 긁어 인공적으로 만든 댐에서는 송사리도 살 수 없고, 돌상어, 꾸구리, 모래무지, 퉁가리, 참마자, 다슬기 같이 예민한 여울생명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이 생존할 수 없습니다.

매년 인위적으로 강바닥을 파내서 수질이 개선되었다고 우긴다고 해서 강의 신들이 돌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본디 유람선이 다닐 수 없는 여울바닥을 긁어내 녹조 가득한 사막과도 같은 인공호반을 만드는 것, 자연과 생명의 순리와는 별다른 공명도 없기 십상인 잠시의 뱃놀이를 즐기기 위해 뭇생명들을 죽이고 그 터전에서 몰아내는 것, 이것이 과연 우리가 성취하고자 하는 문명인지 되물어 봅니다.

이포보 바벨탑에 오른지 41일만에 세상에 나온 환경운동가들에게
‘이름난 강의 신들’이 선사하는 참된 평화가 함께 하기를 빕니다.

                                          

1) 이 표현은 애니메이션의 거장인 일본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千
と千尋の神隱し: The Spiriting Away Of Sen And Chihiro, 2001)에서 따왔습니다.

2) 서해연안에 사는 쇠돌고래의 일종(Neophocaena phocaenoides)으로 바다와 강이 만나는 기수역에서도 종종 발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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