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0년 01월 2010-01-11   1251

칼럼_막다른 길에서도 삶은 이어집니다

2010년 1월호 <참여사회> 칼럼



막다른 길에서도 삶은 이어집니다



<참여사회> 새 편집위원장 이태호입니다.

제 소개를 대신해서 저희 가족 얘기를 해볼까 합니다. 



10년 전의 일입니다.
2000년 첫날을 맞는 날, 어느 조간신문에 우리 큰어머니의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큰어머니는 그해 100번째 새해를 맞으셨습니다.
두 세기를 사신 분이니 신문에 날 만도 했지요.
우리 집안 모두가 큰 기쁨으로 2세기를 이어온 큰어머니의 생애에 대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기사를 읽으면서 그분이 사신 세월의 아득함에 약간의 현기증을 느끼지 않을 수 없더군요.
어린 시절 배운 창가도 또렷이 부르곤 하시던 그이는 인류가 달나라를 가는 것도,
고손자들이 컴퓨터 게임기를 가지고 노는 것도 다 보셨습니다.
조선시대에서 탈산업사회까지 사신 셈이죠.
그 시간들이 큰어머니에게는 또 얼마나 현기증 나는 세월이었을까요?


큰어머니는 우리 나이로 열한 살 때 경술국치를 당하셨고,
스무 살 되던 해 3·1만세운동을 보셨습니다.
큰집은 그 후 만주로 이사 가서 제재소 일을 업으로 하며 사셨는데,
아침에 일어나면 제재소 앞마당에
호랑이 발자국이 선연해서 흠칫 놀라곤 하셨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같은 얘기입니다.


큰어머니는 마흔여섯 살에 해방을 맞으셨습니다.
20세기 동안 한반도를 휩쓴 세 차례의 큰 전쟁-러일전쟁, 태평양전쟁
그리고 한국전쟁을 모두 겪으셨습니다.
4.19도, 광주항쟁도 그리고 87년 민주화운동, 6·15남북정상회담도 다 보셨죠.
하지만 돌아가시기 전까지 소망하던 통일은 보지 못하셨습니다.
큰어머니는 2001년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제게 북에 살아계실지도 모를 형님에 대해 말씀하신 것은
큰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수년이 지난 뒤였습니다.
아버지는 해방될 때 평안남도 평원군 노지면에서 농사를 짓던 열성 기독청년이셨습니다.
해방 후 혼례를 올리신 아버지는 한국전쟁 직전 아들도 보셨다고 했습니다.

평소 이북정권에 비판적이시던 아버지는 해방 이후 5년간 편치 않은 생활을 하신 듯합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 인민군으로 징집되자 아버지는 남하하는 부대에서 두 차례나 탈영하셨습니다.
그 후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어 ‘거제도폭동’으로 알려진 사건에 휘말려 수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서야 비로소 반공포로로 석방되셨습니다.

아버지는 포로석방 후 미군 선교사의 후원으로 목사가 되셨고 63년에 재혼하셨습니다.
처음에는 북에 두고 온 가족들 때문에 결혼을 주저하셨는데, 신도들이 목사가 홀아비노릇 하는 것이 교회에 좋지 않다며 강권하는 바람에 마지못해 설득당하셨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아버지는 평생을 북의 가족들에게 미안해하시며 사셨습니다. 제가 마흔이 다 되기까지 알리지 않으신 것도 같은 이유에서구요.

당신은 이산가족 상봉신청을 하라는 가족들의 권유도 끝내 뿌리치셨습니다.
아버지의 새 반려자는 한국전쟁에 종군한 경력을 가진 여군 간호장교였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간호학교 졸업반에 다니시던 어머니는, 어느 날 학교를 에워싼 군인들에 의해 징집되어 종군하게 되셨다고 했습니다. 낙동강에서 두만강까지 피비린내 나는 전선을 따라 남과 북을 오가기를 여러 번 하셨다고 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북의 어머니는 한국전쟁으로 인해 만나고 헤어지셨습니다.
평원군에 혹 살아계실지도 모를 또 다른 어머니와 이제는 환갑이 넘었을 형님에게
전쟁은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이고 재난이었을 테지요.
그분들에게 전쟁은 아직도 진행 중이고,
어쩌면 여전히 전쟁 같은 고단한 삶을 살고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글을 쓰고 있는 저는 전쟁과 분단이 없었다면 이 땅에 나오지 못했겠지요.
그렇다면 저는 전쟁이 만들어 준 인연에 감사해야 하는 것일까요?


반공목사인 아버지의 소원과는 정반대로 저는 학생운동에 가담했고, 대학시절의 상당 기간을
거리에서 살았습니다. 지금도 시민운동 평화통일운동을 업으로 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학생시절 아버지로부터 ‘빨갱이 아들’이라는 꾸지람도 여러 차례 들었습니다.
부자관계가 스스럼없어지기까지는 꽤 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이제 아버지도 어머니도 다 떠나가셨습니다.
하늘나라에서 큰어머니와, 어쩌면 저의 또 다른 어머니와도 다시 만나셨는지도 모르겠네요.
그 기막힌 긴 세월에 대해 뭐라고 말씀들 나누셨을까요?
대학시절 막걸리잔 앞에 놓고 숟가락으로 탁자를 치면서
고래고래 부르곤 하던 노래 한 소절이 생각납니다.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

겨울에 기나긴 밤

어머님하고 둘이 앉아

옛이야기 들어라

나는 어쩌면 생겨 나와

이 이야기 듣는가?



소월의 ‘부모’라는 시에 곡을 붙인 노래입니다.
그때도 이 노래를 부를 때는 왠지 모를 울렁증을 느끼곤 했는데,
이 가사들이 오늘밤처럼 이렇게 아련하고 간절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경술국치 100년, 한국전쟁 60년, 광주민주화운동 30년을 알리는 경인년 새해가 밝아오려 합니다.
이 땅에 터 잡고 살아온 모든 목숨들이 다들 어떻게 생겨 나와서 오늘을 살고 있는지,
돌아볼수록 참 경이롭고 또 가슴 뜨거워지는 한겨울밤입니다.

막다른 길목에서도 삶은 이어지고, 생명은 늘 새로운 길을 여는 것이겠지요.
설사 그것이 아리랑 고개같이 구불구불한 길일지라도 말입니다.
이 땅, 그리고 지구촌의 모든 시린 가슴들에 평화가 깃들기를 빌어봅니다.

새해를 열며… 이태호 드림*

*<참여사회> 편집위원장.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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