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0년 11월 2010-11-01   2212

전태일 40주기-태일이와의 약속지키려…

*故이소선 어머니를 추모하며, 전태일 40주년 기념으로

<참여사회> 2010년 11월호에 실은 기사를 여러분과 나눕니다


 

여든 둘 어머니는

오늘도 골목길을 나섭니다

 

오도엽 작가, 『이소선 여든의 기억_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저자


엄마의 방은 옥탑입니다. 여름에는 아래층 순대국밥 집에서 올라오는 열기가 고스란히 방바닥을 달궈 연신 수건으로 땀을 훔쳐야 합니다. 겨울에는 얇은 샌드위치 패널로 만들어진 벽에 찬바람이 꽁꽁 달라붙어 보일러를 아무리 돌려도 코끝을 얼게 합니다. 그곳에서 엄마는 세월을 견디고 있습니다.

  엄마는 여든 둘입니다. 세월은 엄마의 살을 야금야금 갉아먹었습니다. 아니 뼈 마디마디까지 파고들었습니다. 대여섯 걸음 앞 화장실 가는 일조차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합니다. 이를 악물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었던 세월이었기에 엄마의 입안은 텅 비었습니다. 틀니를 끼지 않고서는 두부 한 조각도 씹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틀니마저도 무용지물입니다. 갈수록 쪼그라드는 잇몸은 틀니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엄마의 이름은 이소선입니다. 엄마에게는 태일이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열서너 살 여공들이 배를 쫄쫄 굶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 자신의 도시락을 여공들에게 주고 화장실 수돗물로 배를 채우던 아들. 퇴근시간에는 버스비로 풀빵을 사서 어린 여공들에게 나눠주고 쌍문동 집까지 두세 시간을 걸어서 오던 아들. 환풍기는커녕 창문도 없는 곳에서 옷을 만들다 폐병에 걸려 피를 토하는 미싱사를 자신의 월급을 쪼개 병원으로 업고 간 아들. 병에 걸린 미싱사를 쫓아내는 사장한테 대들다 자신마저 해고된 아들.

  엄마의 아들은 근로기준법을 만납니다. 밤새워 한자투성이 법전을 붙들고 공부합니다. 엄마에게도 법조항을 하나씩 일러주며 외우라고 합니다. “내가 뭐할라꼬 법을 공부하냐?” 엄마가 묻자, “배워두면 언젠가 쓸 일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 아들은 말합니다. “니한테 물어보면 되지?”라고 묻자, 아들은 “제가 없을 수도 있잖아요.”라고 답합니다. 엄마는 아들의 이 말을 듣자 불길함이 확 밀려들었습니다.

아들은 떠났고, 엄마는 아들이 되어 살고 있다

 ▲ 이소선 가족사진 (맨 왼쪽이 이소선, 가운데 어린이가 전태일).     ⓒ 전태일재단

▲ 이소선 가족사진 (맨 왼쪽이 이소선, 가운데 어린이가 전태일). ⓒ 전태일재단

1970년 11월 13일, 엄마는 아들을 병원에서 만났습니다. 이미 숯덩이가 된 아들은 온몸에 허연 붕대를 감고 입과 코만을 내놓고 누워있었습니다. 엄마는 어떻게든 아들을 살려달라고 의사에게 매달렸습니다. 아들이 엄마를 불렀습니다.

  “엄마 소용없는 일이야. 난 살아날 수가 없어. 내 말 좀 들어줘.

  그리고 약속해줘. 내가 못다 이룬 꿈을 엄마가 꼭 해주겠다고 약속해줘.”

  아들은 ‘전태일의 꿈’을 엄마에게 전했습니다.

벌써 사십 년 전 일입니다. 그렇게 아들은 떠났고, 엄마는 아들이 되어 살고 있습니다. 아들이 부탁한 약속을 이루지 않고서는 눈을 감을 수 없어 모진 세월을 견뎌왔습니다. 사십 년을 세상 가장 낮은 곳, 세상 가장 힘든 이가 눈물 흘리는 곳을 찾아다니며 미친 듯 살아왔습니다.

“건다리, 너는 내가 왜 사는지 아냐?” 

우연찮게 엄마를 만났습니다. 엄마를 만난 순간 나도 모르게 엄마의 방에 주저앉았습니다. 밤마다 조막만한 녹음기를 틀어놓고 엄마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짠지 매운지도 모르고 차리는 엄마의 밥상을 야금야금 훔쳐 먹으며 보냈습니다. “야, 건달(엄마는 하는 일 없이 엄마 방에 숨어들어 ‘옛날이야기’만 해달라며 ‘왔다리 갔다리’하는 나를 ‘건다리’라고 부릅니다)아! 건다리 너는 내가 왜 사는지 아냐?” 엄마가 물으면, “내가 우찌 아노? 내가 우예 사는지도 모르는데 엄마 사는 것까지 고민해야 되나!” 이리 쌀쌀맞게 굴며 엄마의 심장을 한 꺼풀씩 벗겨갔습니다.

  엄마의 이야기는 어둑어둑 어둠이 깔린 뒤에 시작됩니다.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이고 희끗하게 동이 터야 이부자리를 깝니다. 엄마의 이야기는 끝이 없습니다. “엄마, 자고 내일 들으면 안 될까?” 졸음에 겨워 방바닥에 드러누우며 말하면 엄마는 버럭 소리를 지릅니다. “뭐시? 잔다고!” 깜짝 놀라 몸을 옆으로 틉니다. “아, 아냐. 허리가 아파서. 요리 누워서 들을 테니까 계속 해.” 엄마는 모로 누워 있는 내가 졸든 말든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야, 근데 니 졸고 있는 것 아니냐?” 엄마가 발로 툭 나를 건들면서 묻습니다.

  “아, 아냐. 재밌구만. 계속 해.” 엄마의 이야기는 언제 끝났는지 알 수 없습니다.

  잠결에 눈을 뜨면 내 몸에 이불이 덮여 있습니다. 슬그머니 눈을 뜨고 엄마를 찾습니다. 엄마는 방 한 귀퉁이에서 성경책을 머리맡에 두고 누군가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합니다. 훌쩍훌쩍, 습한 기운이 방을 타고 전해옵니다. 엄마는 자신의 몸 안에 있는 아들과 눈물을 흘리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 왼쪽에서 두 번째가 전태일(평화시장 동료들과 함께 1960년대 후반).ⓒ 전태일재단

▲ 왼쪽에서 두 번째가 전태일(평화시장 동료들과 함께 1960년대 후반).ⓒ 전태일재단

▲ 왼쪽에서 두 번째가 전태일(평화시장 동료들과 함께 1960년대 후반).ⓒ 전태일재단

  “태일아! 이 엄마 만나줄래? 니가 부탁한 약속 지키지 못하면 엄마가 하늘나라에 가도 만나주지 않는다고 했잖아. 근데 엄마가 인제 다리에 힘이 없어 싸우러 돌아다니지도 못하고…….”

  엄마는 가끔 내게 묻습니다.

  “건달아, 내가 지금 죽으면 태일이가 만나줄 것 같냐?”

  엄마의 이야기 끝 무렵에 늘 하는 질문입니다.

  “엄마가 왜 지금 그 걱정인데? 아직도 삼사십년은 너끈히 살 것 같구만!” 내 말에 서운했는지 엄마는, “니가 볼 때는 내가 정상으로 보이냐? 내가 살아 있는 거로 보이냐 말이야!” 성을 냅니다. “멀쩡하구만, 뭐!” 내가 히죽거리며 말을 받아치면, “써글놈, 내가 니랑 말을 하나 봐라!” 하며 엄마는 픽 돌아눕습니다.

엄마의 고민은 끝도 없다… “이 망할 비정규직 세상은 언제 끝날라고”

여든 둘 엄마의 고민은 끝도 없습니다. 며칠 전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단식농성을 시작한다는 말에 큰 한숨을 쉽니다.

  “건달아, 니라도 가봐라. 지난번에 백일 가까이 단식했던 (기륭 김소연) 분회장이 포클레인에 올라가 있다며? 제발 밥 먹으며 싸우라고 해라. 굶어 죽어도 내가 죽어야 하는데, 이 망할 비정규직 세상은 언제 끝날라고, 저리 힘들게 외쳐도 모른 척한다냐.”

  아들이 버스비로 풀빵을 사줬던 ‘시다’가 요즘 ‘비정규직’이 아니냐고 엄마는 묻습니다. 세상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고통 받는 노동자가 많다고 합니다. 정규직은 제 배가 부르니까 비정규직 문제에 모르쇠 한다고 목청을 높입니다. 지금 당신은 정규직이라고 해도, 당신 자식 때가 되면, 세상이 모조리 비정규직 세상이 된다는 걸 깨우치지 못하면, 당신은 못난 아빠 엄마가 된다며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 엄마는 지팡이를 짚고 가서 나무랍니다.

▲ 기륭전자 비정규직 천일 농성장에 찾아간 이소선.ⓒ 오도엽

▲ 기륭전자 비정규직 천일 농성장에 찾아간 이소선.ⓒ 오도엽

  엄마의 요즘 걱정 가운데 하나는 청년입니다. 대학을 나오고 외국에 가서 어학연수를 해도 취직을 하지 못하는 현실이 너무 가슴이 아프답니다. 기껏 취직해야 비정규직 알바 인생이라고 한탄합니다. “예전에는 대학생들이 민주주의에 앞장서고 노동자와 함께 싸우고 하지 않았냐? 나 혼자 잘 될라고 아무리 발버둥치고 공부해봐야 세상이 바뀌지 않으면 소용없는데, 그걸 알아야 하는데”라며 1970년 이야기를 합니다. 전태일의 친구가 되겠다며 달려왔던 그 시절 대학생들을 그리워합니다.

  엄마는 오늘 밤도 기도를 합니다. 무릎을 꿇고 앉아 아들의 이름을 부르고,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말하고, 기륭전자 노동자를 찾습니다. “기운도 없으면서, 밤새 울며 기도하지 말라”고 말리건만 소용이 없습니다.

  “난 그날 이후로 죄인이야. 내가 왜 사는 줄 아냐. 죽어서 떳떳하게 태일이 얼굴 보려고 이제껏 산거야. 미쳐서 죽었으려면 수천 번도 죽었을 세월, 태일이가 부탁한 약속 지키려고 살았던 거야. 내가 얼마나 사랑한 아들인데……”

  엄마는 외롭습니다. 전태일의 이름을 걸고 다짐했던 숱한 이들, 지금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 지 궁금합니다. 엄마와 함께 하던 이 가운데 대통령도 되고 도지사도 되고 국회의원 배지를 단 사람도 있습니다. “엄마, 배지 달면 싹 달라지잖아. 그러면 얄밉지 않아?” 내 물음에 엄마는 씩 웃습니다. “그래도 난 미워할 수가 없어. 그 사람들이 전태일을 말하는 그 순간만은 진실했거든. 지금 무얼 하든 내게는 고마운 사람들 아니냐. 다 나처럼 미쳐서 살았다면 벌써 좋은 세상 왔겠지……” 엄마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꼬리를 감춥니다. 엄마의 이 말이 너무 밉습니다. ‘왜 나만 이 길에 놔두고 니들만 도망 가냐!’ 이리 욕이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옷도 몸뚱이도 온통 까만 엄마… 고운 옷 한 번 입은 모습 보고 싶다

이보다 더 미운 일이 있습니다. 삼 년 전입니다. 어렵사리 엄마를 꾀어(?) 여행을 가기로 했습니다. 태어나 한 번도 여행을 간적이 없다는 엄마에게 추억을 선물하고 싶어 진달래 곱던 봄날에 거사를 꾸몄습니다. 싫다던 엄마도 ‘건다리’의 엉뚱한 생각에 혹해 승낙을 했습니다. 출발 하루 전 날, 엄마와 종로5가 광장시장을 갔습니다. 모처럼 여행인데 건달이 옷 한 벌 사주겠다는 겁니다.

  나는 내 옷보다는 엄마 옷 때문에 따라 나섰습니다. 늘 칙칙한 검정색 옷만 입고 다니는 엄마에게 이번에는 꽃무늬가 그려진 화려한 옷을 입히고 싶었습니다.

  “야 이 건다리야. 내가 이런 옷을 우찌 입냐. 난 못 입는다.”

  한 번 걸쳐만 보라해도 손사래를 칩니다.

  “내가 이런 옷을 입고 다니면 남이 뭐라 하겠냐!”

  엄마는 옷을 내팽개치고 돌아섭니다. 억지로 발길을 붙들고 입게 했습니다.

  “뭐 이쁘기만 하네. 엄마 이거 사자. 응?”

  엄마는 못 이기는 척하고 검정 봉투에 담긴 옷을 가방에 쑤셔 넣습니다. 

▲ 2007년 봄 어머니의 묘소를 찾은 이소선. ⓒ 오도엽
▲ 2007년 봄 어머니의 묘소를 찾은 이소선. ⓒ 오도엽

  엄마의 몸은 늘 까맣습니다. 아들이 떠난 뒤로 숱한 이들이 전태일을 따른다고 목숨을 던지며 싸웠습니다. 날마다 영안실로 추도식장으로 분향소로 그리고 농성장으로 다녀야 했던 엄마는 티셔츠도 겨울외투도 목도리도 검정색입니다. 옷만이 아닙니다. 몸뚱이도 까맣습니다. 거리에서 경찰서에서 교도소에서 온몸으로 저항했던 엄마는 몽둥이에 맞고 구둣발에 짓밟혀 온통 시커먼 멍투성입니다.

  몸뚱이만이 아닙니다. 엄마의 심장은 까맣게 타들어가다 못해 허연 재가 되었습니다. 살짝 건들면 부서지고 후 불면 흩어지고 말 엄마의 심장. 그래서 고운 옷 입은 엄마 모습을 꼭 보고 싶은데, 엄마는 한사코 검정 옷만을 고집합니다. 사십년이 지난 오늘도 말입니다.

  우연찮게 엄마를 만났는데, 홀연히 엄마와 이별할까 걱정입니다. “니 이제 내 이야기를 책으로 썼으니까 떠날 거지?” “왜? 나 밥 해주기 싫어.” “써글놈, 누가 싫다고 했냐!” “그럼 신경 쓰지 마. 내가 언제는 우찌 살 건가 생각하고 살았어. 그냥 갈 때 되면 가는 거지. 건다리잖아!” 엄마의 속을 후벼 놓는 말인 줄 뻔히 알면서 이리 말했습니다. 달리 할 말이 없었습니다.

  2010년입니다. 아직 엄마 곁을 맴돌고 있습니다. 도망칠 기회를 엿보았지만 차마 발길을 돌릴 수가 없었습니다. 엄마의 아들이 떠난 지 40년입니다. 하지만 엄마는 1970년에 멈춰 있습니다. 아들의 꿈이 이뤄져야 엄마의 멈춘 시계바늘은 돌아갑니다. 엄마는 전태일의 스물셋을 살았고, 서른을 살았고, 마흔과 예순을 살았을 뿐입니다. 엄마는 전태일입니다. 아직도 전태일이고 앞으로도 전태일입니다. 그래서 엄마 곁을 떠날 수 없습니다.

  꿈은 꼭 현실이 되어야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꿈을 찾아 괴나리봇짐을 싸서 새벽길을 나서는 사람이 있기에 꿈은 희망이고 행복입니다.

  전태일이 세상에 던진 꿈, 아직도 멀리 있습니다. 하지만 헛된 꿈은 아닙니다. 이소선이 그 길을 마다않았기에 아직도 전태일의 꿈은 소외된 이들의 가슴에 희망으로 피어납니다. 그래서 여든둘 엄마는 오늘도 지팡이를 짚고 창신동 골목길을 나섭니다. 옥탑 방 가파른 계단을 오르내리면서도 엄마는 두렵지 않습니다.

  전태일 40주기는 기념하거나 기억할 일이, ‘아직은’ 아닙니다. 엄마가 살아 전태일이 되었듯, 이제는 내가 전태일이 되고 이소선이 되어야 합니다. 굳이 전태일의 사상과 정신을 이곳에서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소선의 삶의 흔적을 주절주절 이야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내 눈길을 잠시 옆으로 돌리면 전태일이 사랑했고, 이소선이 함께했던 이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 지금 이 시간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 나는 돌아가야 한다 / 꼭 돌아가야 한다 /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 생을 두고 맹세한 내가 /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 될 나약한 생명체들 /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전태일 일기> 가운데서

“엄마 꼭 크게, 나 잊어버리고 부탁하고 가게. 크게, 크게 대답해 주세요.” 그라는 거라. 그리고 피가 퍽 쏟아지고, 크게 대답하라 소리치면 피가 퍽 쏟아지고, 크게 대답하라 그라면 또 피가 퍽 쏟아지고……. 그라다 한참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쓰라져 있다가 태일이가 눈을 뜨며 마지막으로 뭐라 한지 아냐? “엄마, 배가 고프다…….” 그게 태일이 마지막 말이었어. 그 말이 얼마나 가슴을 쥐어뜯던지 나도 정신을 잃었어.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이소선 여든의 기억> 가운데서

  창신동 구불구불한 골목길 옥탑 방, 오늘도 엄마의 방에는 불이 꺼지지 않습니다. 두런두런 누군가와 이야기하는 소리가 흘러나옵니다. 방문 틈 불빛 사이로 태일이가, 비정규직이, 노동이, 흘러나옵니다. 엄마의 방문을 열지 못하고 돌아섭니다. 가파른 계단을 내려서며 엄마의 창문을 봅니다. 가을밤, 초롱이 떠있는 별무리에게 조용히 속삭입니다.
 
  “엄마를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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