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0년 11월 2010-11-01   1714

전태일 40주기-청계피복노조 ‘최고 불행한 지부장’

청계피복노조 ‘최고 불행한 지부장’

삼동친목회 임현재 씨


월간 『참여사회』 최인숙 팀장

 

전태일의 죽음은 당시 많은 노동자와 학생에게 영향을 끼쳤다. 노동운동에 투신한 사람들, 재야 활동 후 정치인이 된 사람들, 뒤늦게 전태일 평전을 읽고 인생의 진로를 바꾼 사람들…. 40년이 지난 지금 그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노동자가 ‘인간답게 살 권리’를 당당하게 요구해야 하는데, 바보처럼 아무 말도 못 했다. 우리는 바보들이다.“

  1968년 6월. 전태일은 평화시장 재단사 친구들과 ‘바보회’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바보회는 노동환경 개선에 실질적인 역할을 할 또 다른 바보회 ‘삼동친목회’를 조직했다. 최종인, 김영문, 이승철, 임현재, 조병섭, 강진환, 주현민 씨 등이 그 바보들이다. 전태일 40주기에 부쳐 임현재 씨를 만났다. 그는 평화시장을 떠나지 못한 걸까?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가까운 곳에 그의 사무실이 있었다.

  임현재 씨(62세)는 전남 고흥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머슴살이를 하면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학교를 보내지 못한 아버지의 마음은 학교 가고 싶은 네 마음보다 더 아프다.”는 사촌형의 말에 중학교 진학도 포기했다.

  전태일과 같은 나이에 서울로 왔다. 초등학교만 졸업한 촌놈에게 일자리는 주어지지 않았다. 이런저런 일을 하며 전전하다 21살 평화시장 삼화사에서 재단보조 일을 시작했다.

  “일자리만 있으면 좋았다. 1주일, 1달 밤새 일해도. 전에는 떠돌아다니면서 하루 일해서 그날 품삯 받아 생계를 유지해야했고, 다음 날 일이 없어 맘 졸이는 것보다 행복했다.”

  해방세대, 전쟁을 겪은 사람들이 많았던 60~70년대는 어렵게 자란 탓에 일 할 수 있는 것에 감사했다. 근로기준법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때여서, 사업주는 노동법을 지키지도 않았고, 지킬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사업주들은 그것을 악용해 실컷 부려먹고 싼 임금을 주면서 또는 안 주면서 일을 시켰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 열풍에 노동자는 철저히 희생당했다. 수만 노동자가 임금을 떼이고 쫓겨났지만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거나 다른 곳에 가 보아도 나아질게 없다며 참고 또 참았다. 그 시기에 노동운동을 한다? 꿈도 못 꿀 일이다.

  이 때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들고 나왔다. 사실 임현재 씨는 사치스럽다고 생각했다. 겨우 얻은 일자리에서 눈 딱 감고 열심히 일해 인정받아 재단사 되고 돈 벌어 사장도 될 수 있었다. 나 살기도 바빴던 때, 같은 처지인 친구 태일은 ‘나’보다 ‘우리’를 먼저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자신도 갑자기 해고를 당했다. 동료와 힘없는 동생들이 사업주에게 폭행당하는 것은 다반사에 쥐꼬리만한 월급도 못 받고 쫓겨나는 일들이 점점 많아졌다. 아는 형에게 취직 부탁 하러 간 그 자리에서 전태일과 처음 만났다. 얼마 후 태일이 그를 찾아와 함께 하자고 제안해 평화시장에서 다시 뭉쳤다.

  “전태일 그 친구는 오래전부터 노동법 공부를 많이 했다. 노동법에 무지한 우리에게 무엇이 잘못됐고, 어떻게 개선해야 한다는고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우리는 그 자리에서 ‘삼동친목회’를 만들었다.”

  삼동친목회가 조사한 노동실태조사 결과가 경향신문에 실렸다. 정부는 여론에 밀려 노동자 처우를 개선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번번이 지켜지지 않았다.

  결국 전태일은 분신으로 항의했다. 1970년 11월 27일 청계피복 노동조합이 세워졌다. 전태일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 노동조합운동을 시작했다. 새마을노동교실 등을 통해 노동자들에게 전태일과 ‘노동’에 대해 알려주었다. 1981년 전두환 신군부가 노동조합 정화를 내걸고 청계피복노조를 강제 해산시켜버렸다. 이에 항의하다 모두 감옥에 가게 됐다. 청계피복노조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임현재 씨는 ‘최후의 지부장’, ‘최고 불행한 지부장’으로 남았다.

  임현재 씨는 징역 12월을 선고받았다. “보통 민주화운동으로 감옥에 갔다 오면 투사가 된다”는데, 임 씨는 함께 구속된 동료들 뒷바라지까지 하는 가족을 보며 많이 괴로워했다. 출소 후 생업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아동복 사업을 하다 운영이 어려워지자 맨몸으로 할 수 있는 보험설계사가 됐다.

  “당시에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후회는 없다. 세상 보는 눈이 달라졌고 배운 것이 많아서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됐다. 개인보다는 더 많은 사람을 생각해야 했던 삶에서 나 자신과 가족을 위해 노력하고 노동하고 헌신하는 것으로 바뀐 것이다.”

  전태일 40주기 행사위원회는 11월 13일까지 ‘전태일 기억 주간’으로 정해 서울광장과 청계천 등 시내 곳곳에서 다양한 추모 행사를 열 계획이다. 사람들은 전태일을 기억에서 꺼내 지금 서 있는 자리에 놓을 것이다.

  “사람 나이 한 살 한 살이 쌓여 10살 되고 20살 되고 40살 되듯이 40주기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게 중요하진 않다. 해마다 11월이면 전태일 몇 주기라며 떠들썩하지만 정작 전태일을 살려내기 위한 고민은 하지 않았다.”

  현재 전태일 재단 이사로 활동 중인 임 씨는 전태일 거리를 조성하자며 매일 평화시장에서 노래하는 사람들, 전태일 평전 읽고 독후감 쓰기 대회에 참여하는 학생, 교사, 전태일 재단을 후원하는 시민들이 전태일을 살려내고 있는 반면, 전태일 정신을 운운하며 당선된 정치인들이 이제는 전태일을 외면하는 것에 아쉬워했다. 전태일을 살리는 일은 유가족이, 전태일과 함께 운동했던 친구들이 편하게 살기 위한 것도 아니다. ‘전태일 살리기’를 통한다면 사회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전태일은 인간답게 살 권리, 노동자의 인권을 위해 자신을 불사른 사람으로 지금 세대에서 잊지 않고 후대에 물려줘, 다시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의미에서 값진 유산인데, 너무 소홀히 하고 등한시 하고 있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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