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0년 06월 2010-06-01   1203

최성각의 독서잡설-“동물 없이도 인간이 행복해 질 수 있을까”


“동물 없이도 인간이 행복해 질 수 있을까”
 

최성각
작가, 풀꽃평화연구소 소장

『동물로 산다는 것』 | 존 쿳시 지음
 전세재 옮김 | 평사리 | 2006년



창 밖에서 거위가 운다. 거위는 때없이 운다. 때로는 목을 빼고 높은 목소리로, 때로는 낮게 구구거린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거위의 시선을 쫓아가 본다. 아무 흔적도 없다. 버드나무 가지가 바람에 어깨춤을 추듯 흔들리고, 사위는 조용하다. 오월의 오후녘, 인적이 드문 이 골짜기에 살아 있는 존재는 마치 오로지 거위뿐인 것 같다. 거위는 왜 울었을까? 아무 뜻 없이 그냥 울었을까? 한가하게 마당의 풀을 뜯어먹던 거위가 왜 울었는지 인간인 나는 알아낼 재간이 없다. 그것은 거위와 내가 공유하는 언어가 없기 때문이다. 거위의 생각을 읽기 위해 아무리 애쓴다 해도 나는 인간의 마음으로 거위를 읽을 뿐이다. 다른 동물에게도 마찬가지다. 이른바, 의인화의 함정이다. 인간과 동물간의 소통불가능에 혹시 무슨 깊은 뜻이 있을까?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그러나 이야기가 너무 멀리 나가기 전에 근래 내게 일어난 이야기부터 해야겠다.


암탉이 사랑으로 거위알을 품다

나는 거위 두 마리와 닭 두 마리를 키운다.

동물을 키우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여러 종류의 번거로운 일이 따르고, 그 번거로움을 기꺼이 수행해야 하는 힘의 원천인 동물에 대한 최소한의 사랑이 요구된다.

거위를 키우게 된 것은 뱀 때문이었다. 거위가 뱀을 처치해준다고 누군가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곧바로 거위를 키우기 시작했다. 벌써 5년째다. 닭은 거위집을 너무 널찍하게 지은 탓에 덤으로 키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얼씨구나, 닭은 알도 주기 시작했다. 거위도 물론 한해에 40여개 가량의 알을 선사하기는 한다.

지난 초봄부터 거위가 알을 낳기 시작했다.

이제 세 살 된 놈들인데, 나를 만난 뒤, 두 번째 알의 계절이 온 것이다. 거위알은 달걀의 두서 너 배 크기다. 무겁기로는 과장해서 말해서, 아령만큼 무겁다. 초란을 발견한 날은 주변 분들과 같이 환호를 질렀다. 계속 낳을 것이기 때문에 멋진 거위알 요리를 해먹었다. 예상했던 대로 거위는 계속 알을 낳았다. 한번은 거위집에 가 보니, 너무 많은 알을 낳았다. 자그마치 7개의 알을 낳았다. 아름다웠다. 왠지 이 알들은 깨뜨려 후라이팬에 넣고 싶지 않았다. 바라보다가 슬그머니 부화를 시키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물론 부화는 내 몫이 아니라 거위가 할 일이지만, 그래야겠다는 생각이 깊어졌다. 사건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처음 하루 이틀은 거위 암컷이 알을 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암컷은 그때뿐, 마당에 나와서 놀기 시작했다. 이상하다, 싶어 다가가 보았더니 암탉이 알을 품고 있었다. 그들은 이 역할분담과 관련해 모종의 합의과정을 거쳤을까? 그것 역시 인간인 내가 알 도리가 없다. 나는 짐승들의 일에 간섭을 안 하는 게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무슨 대단한 철학 때문이 아니라 내 천성이 게을러서이다. 쳐내버려 두는 게 내 방식이다.

암탉의 이름은 ‘무꽁지’다. 정력이 왕성한 수탉들에게 너무나 많이 시달려 살갗이 나오도록 등판이 벗겨지고 꽁지털마저 다 뽑혀져 불쌍하기 그지없는 모습이 되어버렸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괴롭히던 수탉들은 지난여름 마침 사람들이 많이 모였을 때, 솥에 집어넣었다. 그 후로 무꽁지에게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무꽁지가 거위알을 품은 지 6주째, 지난 화요일(5월11일), 마침내 거위 다섯 마리가 세상에 태어났다. 동물들 스스로 새 생명을 이 행성에 출현시킨 것이다. 그것은 실로 신비롭고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일곱 개 알들 중, 다섯 개의 알이 생명으로 나아갔고, 나머지 두 개는 생명으로 나아갈 마음이 없었던 모양이다.

무꽁지가 알을 품고 부화의 순간을 위해 집중하는 모습은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무꽁지는 말 그대로 식음을 전폐하고 자신이 품고 있는 생명체들이 세상에 나오는 일에만 집중했다. 그 동안 정작 알을 세상에 내놓은 거위 암컷과 수컷은 마냥 놀기만 했다. 봄에 피는 꽃들을 즐겼고, 땅바닥에서 새로 솟는 풀잎을 즐겼다. 한가롭게 마당 바깥 게울가를 산책했고, 때없이 다시 맞이한 봄에 겨워 거억거억, 울어제끼곤 했다.



시골마당의 작은 전쟁

문제는 그 이후부터였다. 태어난 것은 거위새끼 다섯 마리인데, 정작 알을 품은 것은 다른 종인 암탉 무꽁지였던 것이다. 동물행동학자 로렌츠의 경험과 학설을 떠올릴 것도 없이, 당연히 거위 새끼들은 자신의 에미를 무꽁지로 생각했다. 무꽁지 역시 샛노란 거위새끼 다섯 마리를 철석같이 자기 자식으로 믿었다. “알을 누가 낳았든 오랜 시간 알뜰하게 품어서 생명으로 만든 것은 바로 나다”, 이게 무꽁지의 확고부동한 믿음이었다.

그러나 거위들의 생각은 달랐다. “무꽁지야, 이게 어떻게 네 새끼들이냐? 내 말이 어이없다면 부리를 봐라, 너랑 같냐? 발을 봐라, 너처럼 못 생겼냐? 품위있게 생긴 저 발과 우아한 부리는 너희들 닭들과 다르지 않냐? 네가 품어 낳은 새끼들은 병아리가 아니라 거위새끼들이란다. 안 그렇냐?”, 이게 거위들의 생각이었다.

무꽁지와 거위들의 생각 차이는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기어이 작은 전쟁이 일어나고 말았다. 가만히 있던 거위 수컷이 나섰다. 수컷의 이름은 철근이인데, 철근이가 무꽁지를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거위는 퇴화한 야생 기러기로서 잡식을 한다는 것 외에도 그 성격이 거친 것이 여러 특성들 중의 하나다. 철근이는 긴 목을 땅바닥에 낮추고 마치 발사된 어뢰처럼 부리를 앞세우고 무꽁지를 공격했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느닷없는 모성본능이 발동했을 뿐인 평범한 암탉은 자기 새끼를 빼앗겨 울화가 치민 세 살배기 수컷 거위의 상대가 안 된다. 옆구리와 몸통을 찍힌 무꽁지는 “나 살려라”, 하고 도망쳤다. 그러자 놀란 새끼거위들이 일제히 무꽁지를 향해 몸을 피했다. 무꽁지의 몸은 순식간에 앙징맞은 거위새끼들로 둘러싸였다. 그것은 딱히 혈통상의 아빠의 공격으로부터 자신들을 품어 만든 무꽁지 엄마를 보호하기 위한 의도여서라기보다 어떤 무서운 짐승이 화를 내니까 겁이 나서 그들이 태어나서 처음 느끼고 만났던 몸체를 향해 피신하는, 그런 방어적인 몸짓이었다.

무꽁지를 공격하던 철근이는 참으로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공격의 자세에서 다시 고개를 허공에 높이 쳐들면서 어이없어 했다. 철근이의 아내인 구리(거위 암컷)는 이 설명할 길 없는 난해한 사태에 봉착하여 물끄러미 상황을 지켜볼 따름이었다. 낳았으되 품지 않은 대가가 이렇게도 아플 줄을 몰랐다는 슬픔의 표정이 역력했다.



동물이 마구 다뤄도 되는 자동기계일 뿐이라고?

“동물은 단지 생물학적 자동기계일 뿐이다”라고 말한 사람은 르네 데카르트였다. 400년 전 ‘이 세상에서 절대적으로 확실한 것은 무엇일까’라는 주제로 깊은 고민을 했던 데카르트는 『이성을 바르게 이끌고, 학문의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방범 이야기, 이에 더하여, 그 방법을 시험한 굴절광학, 기상학, 기하학』(1637년)이라는 긴 제목을 책을 세상에 내놓는다. 그 책의 앞쪽 78페이지를 약칭해 ‘방법서설’이라 부르는데, 데카르는 바로 그 책에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멋진 말을 적어 넣기도 했지만, 동물에 대한 이토록 흉측한 폭언까지도 포함시켰던 것이다. 나는 데카르트를 여러 이유들로 혐오한다. 20대 때 대양서적판 『방법서설』을 뜻도 잘 모르면서 일별할 때에는 혐오도 경멸도 없었다. 그러나 후일 인간중심주의에 바탕한 그의 차가운 물심이원론物心二元論이 결국은 생태계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버린 오늘날의 과학과 기술만능주의의 토대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그의 진리추구가 안고 있었던 맹점을 혐오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인간 외의 생명체에 대해 품고 있었던 난폭한 무지에 대해 경멸하게 되었다. “모든 것을 의심하라”는 멋들어진 충고를 후세에 남김으로써 서양의 근대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과 상관없이, 그는 반생태적인 철학자였다. 서유럽의 한 백인 수학자가 세계에 끼친 못된 영향은 이후 생각보다 걷잡을 수 없이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동물이 단지 생물학적 기계일 뿐이라니? 이 어이없지만 철옹성 같이 단단한 편견을 아주 조심스럽게 물고 늘어진 책이 있으니, 존 쿳시의 『동물로 산다는 것』이다.

소설은 대학교수인 아들이 공항에서 어머니를 영접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어머니는 동물과 동물의식, 동물과 인간과의 윤리적 관계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소설가 엘리자베스 코스텔로이다. 노작가는 아들이 살고 곳의 애플턴 대학의 강연초청을 받았다. 이튿날 노작가는 카프카의 소설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를 인용하는 것으로 강연을 시작한다. 그 소설은 인간의 교육을 받은 원숭이 빨간 피터가 박식한 청중 앞에서 인간에 가까운 무엇인가로 변화했다는 간증을 하는 것을 담은 소설이었다. 그런 상징적인 내용을 서두로 강연을 시작한 노작가는 이어서 아우슈비츠 학살사건을 끄집어낸다. 1942년에서 1945년 사이 바르샤바 인근 트레블링카 지역의 나치 집단수용소에서는 적게는 백오십만 명에서 삼백만 명이 학살되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바르샤바 시민들은 오래도록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덧붙인다. 우리가 식탁에 오르는 동물들이 어떻게 키워지고 처리되는지 모르고 사는 것처럼. 역사는 나찌가 인간을 양처럼 학살함으로써 인간성을 상실했다는 점, 무엇보다도 사람을 동물처럼 죽였다는 점에서 단죄받았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을 짐승처럼 다룸으로써 그들은 스스로 짐승이 되었다”(19쪽)는 점에 주목했다. 사람은 왜 짐승취급하면 비난받는가? 노작가는 침착한 어조로 또 한 사람의 성인, 토마스 신부의 우려에 대해 소개한다. 성 토마스는 “인간만이 신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고, 신의 존재에 참여하기 때문에, 동물을 잔혹하게 다루는 것이 습관이 되어 인간도 잔혹하게 다루게 되지 않는 한, 우리가 동물을 어떻게 다루는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임마누엘 칸트 역시 “이성은 우주의 존재가 아니라 인간 두뇌에 한 부분일지도 모른다”고 하면서도 그 가설을 동물에게는 적용하지는 않았음을 노작가는 실망어린 표정으로 말한다.

나찌의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은 바로 동물을 다루듯이 인간을 다룬 데에 있는데, 그 말은 학살이 문제인 게 아니라 학살의 대상이 바로 인간이기 때문에 문제라는 것이었다.

이 대목에서 노작가는 데카르트의 이원론을 인용한다.

“우주는 이성에 기초하여 만들어졌다. 신은 이성의 신이다. 이성을 통해 우리는 우주가 돌아가는 규칙을 발견했으며, 그 규칙에 따르면 이성과 우주는 같은 존재다. 이성이 결핍된 동물이 우주가 돌아가는 규칙도 이해하지 못한 채 맹목적으로 규칙을 따르는 것은, 인간과 달리 동물은 우주의 부분이지 그 존재의 부분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 따라서 인간은 신과 유사하고, 동물은 사물과 유사하다.”(21쪽).

그러면서 노작가는 인간 이성은 생명체를 단지 사물로 보게 하는 근거라기보다는 ‘인간의 특정한 경향’으로 봐야 하지 않겠는가, 질문한다. 데카르트는 ‘소위 사유한다고 일컫는 행위를 하지 않는 모든 살아 있는 존재를 이류계급으로 취급’하며, ‘동물이 정서적 감각으로서의 충만, 구체화, 살아 있음을 느끼는 것, 즉 팔과 다리를 허공에 뻗칠 수 있는 육체를 지닌 존재로, 이 세상에서 생동하는 존재로 살아 있음을 느끼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게 어떻게 옳은 생각일까? 작중 작가가 집요하게 묻는다.



차고 넘치는 데카르트의 후예들

이후, 소설은 데카르트가 죽은 지 400년이나 흘렀는데도 여전히 완강하게 버티고 있는 데카르트의 후예들과의 합의점을 못 찾는 긴 토론으로 이어진다. 이 책은 소설이라는 허구를 빌려 작가 존 쿳시가 펼친 일종의 윤리논쟁집이다.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공들여 쓴 다른 소설과 달리, ‘생태계 복원을 위해서’ 현장의 인부가 과로로 목숨을 잃을 만큼 속도를 내서 생태계 파괴를 일삼는 지금 우리 시대에 이 진지한 책이 다루고 있는 쟁점은 다른 어떤 작품보다 소중하게 느껴진다.

우리나라에는 데카르트의 후예들이 너무 많다. 그리고 그들의 힘이 너무 세다. 그들 중의 한 사람인 이계진 강원도지사 후보가 5월 14일 TV 토론회에서 말했다.

“자연보호가 중요하지만, 쑥부쟁이 때문에, 전국에 수억 마리 있는 도롱뇽 몇 마리 죽는다고 공사를 못하는 현장은 자연보호일까 발목잡기일까 그런 생각을 해봤다”고.(오마이뉴스, 2010년 5월16일, ‘이계진 <쑥부쟁이, 도롱뇽 몇 마리 죽는다고…>)

공사는 왜 하는가? 그들은 인간 삶의 향상을 위해서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불필요한 개발’을 위해서는 동물 따위는 적당히 죽여도 괜찮다는 심성을 가진 정치가들에 의해서 한 사회 구성원이 행복에 이를 수 있을까?

우리는 일찍이 보기로 한 것, 보기로 되어 있는 것, 그리고 보고 싶은 것만을 보면서 살고 있다. 세상은 열려 있는데 우리는 여전히 보고 싶은 것,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감옥 속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으려고 한다. 누가 닫혀 있는가? 인간의 야만에 침묵으로 대응하면서 죽어가고 있는 동물들이 닫혀 있는 존재일까? 기계처럼 자폐적인 사고방식에서 단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갑갑한 우리 인간들이 닫혀 있을까?

우리의 두뇌 깊숙한 곳의 본능 속에는 동물이 있다. 전두엽 연구를 해온 이들이 밝혀낸 것이다. 다른 영역에서 인간존재를 고구한 이들도 그런 사실을 깨닫곤 한다.

잠시도 잊지 말아야 할 일은 우리가 이 행성의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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