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1년 06월 2011-06-20   1307

문강의 문화강좌-박물화된 놀이

박물화된 놀이

문강형준 문화평론가

 

놀다’라는 단어는 재미있는 놀이를 하면서 즐기는 행위나, 여유롭게 쉬는 것을 의미한다. 노는 행위는 힘든 일이나 힘쓰는 일의 반대편에 놓인다. 놀이와 노동은 그래서 서로 상반된 의미계열 속에 있다. 노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는 않다. 지루하지 않게 잘 놀 수 있으려면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많아야 한다. 함께 놀든, 혼자 놀든 다르지 않다. 잘 노는 일이 ‘창조’와 연관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생각이 단순하고, 시야가 편협한 사람은 다양하고 길게 놀 수가 없다. 반면, 전통적으로 노동은 놀이와는 달리 창조력을 요구하지 않았다. 영어단어 ‘labor’의 어원에는 ‘쟁기질을 하다, 고통스럽게 힘을 쓰다, 고통을 견디다’ 등의 의미가 담겨있다. 노동은 예로부터 ‘육체노동’을 의미했으며, 그것은 밥을 벌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지,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하는 것이 아니었다.

  신분사회에서 놀이와 노동을 담당했던 신분이 따로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상류층은 한가롭게 놀면서 시와 노래와 학문을 즐겼고, 하층민은 힘겹고 반복적인 노동에 종사해야만 했다. 시지푸스가 받은 ‘끝없는 노동’의 벌이 말해주듯, 상류층에서 몰락한다는 것은 창조적 놀이 대신 의무적 노동을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반대로, 중세 유럽의 유토피아 중 하나인 ‘코카인’ 이야기가 보여주듯 하층민의 신분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노동 대신 놀이를 마음껏 즐기는 이미지로 나타난다. <콩쥐팥쥐>나 <신데렐라> 등의 민담은 가족 안에서도 놀이와 노동이 권력 관계에 의해 분할된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자기 자신의 노예

‘근대화’는 핏줄에 의한 신분사회를 벗어나 모든 인간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평등하다는 인식을 전제로 하는 모델이다. 이 평등의 인식을 뜻하는 말이 ‘민주주의’다. 근대화가 언제나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인간으로서 평등한 지위를 가진다고 선포하는 민주주의 사회는 필연적으로 ‘대중사회’가 된다.

  모든 정치인들이 ‘국민을 위해 일한다’고 말하며 머리를 조아리는 민주주의-대중사회의 주인은 ‘대중’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한 꺼풀만 벗겨보면, 민주주의-대중사회에서도 여전히 신분이 있고, 계급이 있다. 그 신분과 계급은 족보가 아니라 돈에서 나온다. 민주주의-대중사회의 경제원리인 자본주의는 그 기원부터 기존의 신분과 계급이 막아놓은 벽을 무너뜨리는 혁명적 힘을 자랑하면서, 능력이 있는 이는 누구라도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퍼뜨린다. 신분사회에 주인과 노예가 있었다면, 민주주의-자본주의-대중사회에서는 주인이 사라진다. 남을 위해 일하던 노예는 이제 자신을 위해 일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남는다. 노예는 주인에 대항해 봉기할 가능성이라도 있지만, 이제 주인 없는 노예에게는 그런 가능성조차 없다. 이제 모두는 자기 자신을 위해 일하는 ‘자신의 노예’가 된다. 보드리야르는 말한다. “우리의 서비스기반 사회는 노예기반 사회, 즉 자기 자신을 위해 노예가 되는 개인의 사회이자, 자신의 기능과 역할에 종속된 사회다. 완벽하게 해방되었기에, 완벽하게 노예적인 사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과거의 속담은 이제 ‘자신이 스스로를 도우라’는 ‘셀프-헬프’의 자기계발 담론으로 바뀐다.

  다시 말해, 이 민주주의-자본주의-대중사회는 모두가 ‘노동자’가 된 사회다. 알바에서부터 사장까지, 동사무소 직원부터 대통령까지, 이 사회에서는 모두가 ‘열심히’ 일하고, 또 일해야만 한다. 모두가 노동을 해야 하는 사회에서는 놀이의 영역을 따로 정할 수가 없다. ‘노동을 놀이처럼 하라’는 격언이 등장하는 때가 된 것이다. 노동을 피할 수 없다면, 노동을 즐기면서 해야 한다. “무대를 즐기세요”라는 말은 <위대한 탄생>이나 <나는 가수다>에서만 반복되는 말이 아니라, 사실 이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에게 ‘부과된’ 명령과도 같다. 그러나 아무리 놀이처럼 하는 노동이라도, 노동은 결국 노동이다.
 

‘대신 놀아주는 이’의 탄생과 놀이의 박물화 

모두가 노동자가 된 사회에서는 ‘놀이’를 자신의 ‘노동’으로 삼는 이들이 생겨난다. ‘나 대신 놀아주는 이들’, 곧 연예인이나 스포츠 선수가 그들이다. 이들은 열심히 게임을 하고, 농담을 하고, 술래잡기를 하고, 노래를 부르고, 야구와 축구와 피겨스케이팅을 하고, 역할놀이를 하면서 ‘논다’. 그리고 그 놀이의 대가로 돈을 번다. 연예인들이 자신들이 ‘노는 행위’를 ‘일한다’고 표현하는 것이나, 스포츠 선수들의 경기가 ‘전쟁’에 비유되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너무나 정확한 어법이다. 민주주의-자본주의-대중사회의 이 새로운 직업인들을 ‘놀이-노동자’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 시대에 노동과 놀이의 경계는 사라진 듯 보이지만, 사실 둘 사이의 분리는 더욱 심해졌다. 야근까지 하고 집에 돌아온 노동자는 텔레비전에 나와 게임하고 춤추며 ‘노는’ 이들을 바라보는 것이지, 그 자신이 ‘노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삶의 모든 부면이 노동의 영역으로 재편되면서, 창조적으로 놀 수 있는 능력은 사라지고 만다. 이제 사람들은 놀이를 ‘하는’ 대신 놀이를 ‘보고’, 놀이에 ‘감동’받는다. 아감벤의 말에 기대자면, 놀이는 ‘박물화’된 셈이다. 마치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 미술관에 놓인 예술품을 절대 만지지 않으면서 그저 ‘감상’하는 것처럼, 이 시대의 놀이는 ‘감상’하는 것이 되었다. <나는 가수다>는 노래를 박물화하고, <1박2일>은 여행체험을 박물화하고, <무한도전>은 또래간의 놀이를 박물화한다. 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노동에서, 놀이-노동을 하는 사람들 역시 노동에서 허우적거리는 셈이다. 하는 노동은 다 다르지만, 그것이 말 그대로의 ‘놀이’는 아니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미디어(텔레비전에서 컴퓨터까지, 노래방 기계에서 스마트폰까지)를 통하지 않고 스스로, 함께, 자연스럽게 놀 수 없는 시대, 놀이 자체가 경쟁과 노동과 상벌의 형식을 취하는 시대가 우리 시대다. ‘놀이능력’이 사라진 인류에게 미래는 어떤 곳일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정부지원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가입


참여연대 NOW

실시간 활동 SNS

텔레그램 채널에 가장 빠르게 게시되고,

더 많은 채널로 소통합니다. 지금 팔로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