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1년 04월 2011-04-01   1324

위대한 시민-“조금씩 느리게 걸어야 더 많이 볼 수 있어요”

“조금씩 느리게 걸어야 더 많이 볼 수 있어요”

작아서 아름다운 생태환경 전문출판사 그물코 장은성 대표

강지나 참여사회 편집위원

“이곳에 있으면 여기저기서 나를 찾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일을 잘해서도 아니고 사람이 없어서도 아니다.
 도시에서는 루져였던 내가 마을사람의 일원이 돼서 함께 일하고 인정받고 있다는 느낌이
무지 뿌듯하다.”


한 기업의 대표라면 소비자 기호에 맞게 상품을 개발해서, 현 유통구조에 맞게 가장 매력적인 방법으로 상품을 노출시키고, 많이 팔아서 큰 이윤을 남기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시장의 정석(?)을 철저히 무시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생태환경 전문출판사 그물코의 장은성 대표다.

대형서점 거부하고 독자와 직접 만나다

그물코는 파주출판단지 같은 데에 사무실을 두지 않는다. 충남 홍성군 홍동면, 다시 말해 시골 촌구석 갓골에 2004년 자리를 잡았다. 홍동은 50여 년간 생태농업기술을 전문적으로 가르쳐 온 풀무학교가 있는 마을이다. 학교를 중심으로 곳곳이 생태적인 삶이 가득하고, 생협을 중심으로 마을자치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으니 생태환경 전문출판사로서 최상의 터전인 셈이다.

  그물코에서 나온 책들은 우리나라 최대의 유통망을 자랑하는 대형서점에서는 찾을 수 없다. 그가 대형서점 횡포에 저항해 납품을 거절했기 때문이다.

  “현재 유통구조는 대형서점이 원하는 대로 이익배분을 하고 기본 몇 백 권씩 시중에 깔아 놓도록 되어있다. 하지만 실재로 몇 권이 팔렸는지 장부를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는다. 어느 서점은 거래를 끊은 지 3년이 지난 지금도 재고량을 정확히 알려주지 않고 있다.”

  한번은 『녹색평론』에 ‘K서점을 뺀 모든 서점에서 그물코의 책을 살 수 있습니다’라고 광고를 낸 적이 있다. 그 후 출판사로 책을 직접 주문하는 양이 부쩍 늘었다. 그렇다고 그물코가 인기 없는 책만 발간해 온 건 아니다. 2002년에 처음 펴낸 『녹색시민 구보씨의 하루』와 2008년에 나온 『똥꽃』은 만 부이상 팔린 베스트셀러이고 각종 언론과 교육단체에서 추천하는 우수도서이다. 화려한 광고나 유통망이 없어도 읽을 가치가 있는 책은 독자가 알아보는 법이다. 그물코는 거래하는 서점에 책을 십 여 권 정도밖에 내놓지 않는다. 실제로 독자가 찾는 만큼만 책을 내놓는 실거래가 이루어지는 셈이다. 그러다 보니 홍동에 자리를 잡은 후에 오히려 쌓여있던 빚을 다 갚았다.

  “홍동에 와서 살다보니 돈 쓸 일이 줄어들었다. 사무실 월세도 없고, 생활비도 덜 나가고, 마을을 위해 내는 책은 마을공동체에서 하는 거고, 대중용 책은 적게 찍어서 적게 뿌리니까 손해도 적다. 여기 와서 농민들을 보고 느끼면서 몸으로 배운 원리이다.”

지속가능한 삶을 출판 시스템에 그대로 옮기다

그물코에서 나온 책들은 미색모조를 쓰지 않는다. 보통 시중에 나오는 책에 쓰이는 종이가 미색모조인데, 꽤 고급종이에 속한다. 무게도 더 나가고 제작단가도 비싸다. 그물코는 처음부터 재생용지를 사용했다. 요즘에는 손바닥 책으로 「갓골문고」를 내는데 주력하고 있다. 정말 손바닥 만 한 크기의 이 책은 마을의 여러 가지 이야기를 담아 시리즈로 엮어내는 것인데, 제작비가 적게 들고, 텍스트의 양도 적어서 읽기에 부담이 없다. 「갓골문고」는 현재 3편이 나와 있고, 올해 10편까지 계획하고 있다.

  그물코는 유명 작가를 따로 관리하지도 않고 그저 내고 싶은 책이 생기면 낸다. 평생 농부로 살아온 할머니의 1년 생활을 취재한 『할머니이야기』(가제)나 토박이 농민이 직접 쓴 『농사의 달인』(가제), 도시사람들을 위한 『주말에 짓는 벼농사』가 그런 책들 중 하나이다.

  “좋은 책은 저자나 역자들이 인세를 받지 않겠다고 할 때가 많다. 마을의 각종 모임에서 인쇄물이 필요하다고 들고 오면 기획비도 안 나오지만 그냥 일을 한다. 마을을 위해 내는 책들은 마을 전체가 돌아가는 것을 보면 손해라고 할 수 없다. 연말에 장부를 보면 한 일은 엄청 많고 통장에 돈도 계속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데, 실제로는 항상 가난하다(웃음).”

  장 대표는 출판사 사장 외에도 직함이 많다. 마을에 있는 ‘느티나무 헌책방’의 책방주인이고, 작년에 개관한 ‘맑밝도서관’의 사무국장이고, 올 3월에 문을 연 동네마실방 ‘뜰’의 공동출자자이면서, 마을공동체문화연구소를 비롯한 각종 크고 작은 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무엇보다 그는 직접 벼농사, 밭농사를 짓고 송아지 ‘장금이’를 키우는 농부이다. 필자에게 갓골의 이곳저곳을 구경시켜주면서 끊임없이 마을사람들과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무척 정겨웠다.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도록 ‘느리게’ 걷다

“이곳에 있으면 여기저기서 나를 찾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일을 잘해서도 아니고 사람이 없어서도 아니다. 도시에서는 루져였던 내가 마을사람의 일원이 돼서 함께 일하고 인정받고 있다는 느낌이 무지 뿌듯하다. 또 지역에 있으면서 지역에 필요한 책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출판업자로서 존재감을 느끼게 해주는 일이다. 『우리마을입니다』 같이 면단위의 지역을 소개하는 책자는 보기 드물다. 동네마실방 ‘뜰’은 우연히 몇 명이 의기투합해서 4개월간 준비하고 100여 명의 사람들이 출자금을 모아서 만들게 되었는데, 그 일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배우고 또 내 얘기도 할 수 있다는 것이 행복했다.”

  그는 말처럼 참 행복하고 여유로워보였다. 하지만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 저런 행복은 너무 거리가 먼 얘기가 아닐까? 귀농의 삶이란 큰 결단이 필요한 일인 듯 보였다.

  “꼭 내려와서 살지 않더라도 생업을 유지하면서 이런 마을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널려있다. 실제로 주말마다 내려오시는 분들도 많다. 혹은 직접 농사를 짓지 않고 생태농업을 하는 농민 한명과 도시의 20가구가 생협을 결성하면 양자가 모두 안정된 가격에 친환경 쌀을 먹을 수 있다. 모내기철이나 추수철에 내려와서 품앗이를 하면 얼마든지 전원생활도 즐길 수 있다.”

  장 대표의 머릿속에는 갓골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즐거운 상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가끔 출판사 대표라는 정체성에 혼란이 올 정도로…. 마치 암소 한 마리도 가지지 못한 힐러리 클린턴을 안쓰러워했던 방글라데시 마이샤히티 여인들처럼 소박한 삶에서 오는 행복에 흠뻑 빠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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