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1년 04월 2011-04-01   1349

기획-2011참여연대 5대 중점 과제: 왜, 보편적 복지국가인가?

왜, 보편적 복지국가인가?

이태수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위원장, 꽃동네현도사회복지대학교 교수

지난해 6·2 지방선거에서 시작된 ‘무상급식’ 논쟁으로 ‘보편적 복지’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보편적 복지’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하고도 양극화가 심화되고, 근로빈곤층이 증가하는 등 불안하고 위태로운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이에 참여연대는 보편적 복지국가의 기본원칙과 쟁점을 짚어보고, 복지국가 건설을 위한 이행 전략을 논의해 시민과 함께 복지국가를 만들어 갈 것을 밝혔다. 본지에서는 2011년 참여연대 5대의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회원, 독자와 함께 공유하고자 2011참여연대 5대 중점 과제 연속 기획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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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역사는 진보의 역사이며, 인간의 존엄과 자유, 정의, 평등이 확대되는 과정이었다.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생산성 증대의 성과를 가져온 자본주의의 구축도 물질문명사에서 보면 진보의 역사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체제는 다른 한편 공동체정신을 파괴시키고 적자생존의 잔인한 동물세계 법칙 아래 개개인의 존립근간을 흔드는 모순이 공존하는 아이러니한 제도였다. 이에 19세기말 “일할 수 있는 자 일하며 자신의 능력껏 살아간다”는 자본주의의 대전제를 깨어버리는 새로운 접근, 오늘날의 용어로 하자면 ‘사회보험제도’가 창안되어,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하려는 또 다른 진보의 역사가 본격화되었다.


인류의 진보와 20세기 복지국가의 실험

20세기 전반 50년 동안 서구는 두 번의 세계대전과 한 번의 심각한 경제대공황을 겪으면서 체제위기와 사회위기를 맞이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소련의 사회주의경제체제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19년에 종결된 1차 세계대전 이후 구미선진국가들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자국민들을 사회주의의 도전으로부터 격리시키고, 자본주의 수범효과를 노리며 각종 사회보장제도를 확대하였다. 아울러 1920년대 말엽부터 불어 닥친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사회보장제도는 더욱 확대·정립되는 단계를 밟아 나갔다.

  2차 세계대전 이후는 서구의 경제가 황금성장기를 맞는 1970년대까지 사회보장제도역시 강화, 정착되는 단계를 거치게 되었고 비록 1970년대 중반 이후부터 신보수주의 이념의 등장, 경제동력의 상대적 저하, 신사회적 위험의 등장 등에 의해 전통적인 사회보장제도대해 축소 또는 조정의 필요성이 강하게 대두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서구의 사회보장제도는 강건한 기반을 유지하고 있으며 그 실효성을 근본적으로 부정당하고 있지는 않다.


복지국가와 동떨어진 한국의 20세기 역사와 폐해

서구의 20세기가 사회보장제도를 기반으로 한 자본주의와 복지국가를 접목시키는 진보와 실험의 역사였다면 20세기 대한민국 역사는 압제와 폭압, 전쟁, 빈곤의 역사와 민족해방, 경제부흥, 민주화 등의 역사가 교차하는 역동적 시기였다. 

  폭압적인 일제 강점기도 치열한 독립운동이 국내외에서 전개되었고 분단의 비극, 전쟁의 참화, 독재정권의 폭정을 겪었지만 민중들의 강인한 생명력은 4·19혁명, 5·18 광주민중항쟁, 6월 민주항쟁으로 승화되어 마침내 이 땅에 민주주의의 싹을 틔웠다. 경제성장의 구호아래 인권과 민주주의를 유린하고 균형성장을 파괴한 개발독재와 재벌중심 관치경제의 구조적 유산이 깊이 남아있지만, 20세기 중반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던 농업국가 대한민국이 오늘 날 산업화된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 된 것 또한 발전과 진보의 한 단면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진전에서 한 가지 누락된 것이 있다면 서구의 역사가 20세기에 경험한 복지국가의 역사를 밟지 못했다는 점이다. 특히 대한민국의 특수한 역사적 경험 속에서 복지는 ‘버림받은 자식’이라 여겨질 만했다. 보수진영은 ‘복지’를 시혜의 산물이자 통치술의 ‘작은’ 수단으로 치부하였고, 진보진영은 민주화투쟁에 몰입하면서 자본주의 폐해를 극복하고, 민중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대안으로서 사회보장제도 구축과 복지국가 구현에 대해 구체적인 고민을 하지 못했다.

  이러한 가운데 20세기 말 한국은 IMF 경제위기를 혹독하게 치러야 했다. IMF 경제위기는 노동을 제외한 모든 상품과 모든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강제하고, 초국적 자본이 세계 각국의 경제 시스템을 지배하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경제시스템이 만들어놓은 덫이었다. IMF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한국의 ‘복지국가 구현’은 더욱 요원해졌다.

현 상황의 위기와 보편적 복지국가의 필요성

하지만 한국사회가 그동안 ‘복지국가’에 대한 고민 없이 일방적인 성장지상주의, 시장만능주의를 표방한 결과 현재 감내해야 하는 사회적 위기 상황의 심각성은 매우 크다.

  지금까지 한국사회의 지배적 논리는 양적 경제성장을 통한 사회발전이었고 이 과정에서 경쟁과 효율은 필수불가결한 작동기제였다. 아울러 개인의 삶은 개인의 노력과 능력의 결과로서 보장되어야 한다는 자조自助주의에 기반하고 있었다. 더 빠른, 더 많은 성장을 위해서는 인간 본연의 권리나 자유, 창의성, 더 나아가 공동선 등은 잠시 유보되거나 하위적인 개념으로 제약시킬 수 있다는 전제가 사회적 당위로 강요되어 왔다.

  80년대말 어렵게 성취한 정치적 민주화는 총체적인 사회제도를 개혁하는 사회적 민주화로 발전하지 못했고, 새로운 시대적 소임을 찾지 못한 한국사회는 세계화 흐름에 빠르게 흡수됐다.

  게다가 한국의 보수진영은 물론 정권교체를 통해 탄생한 민주정부까지도 더욱 극렬해진 신자유주의 가치와 원리를 국가운영의 기조로 채택하였다. 1998년의 외환위기와 2008년의 세계적 금융위기 사이의 10년 동안 과거 한국 사회의 구조를 총체적으로 점검하고 수정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  

  그 결과 여전히 성장제일주의가 지배하는 한국사회는 인간의 존엄성과 품위가 절하되고 노동력으로서의 가치까지 저하됨으로써 성장의 동력이 상실되고 한계가 극명히 나타나는 사회가 되었다. 한편으론 고용 없는 성장jobless growth이 정착되고 자본과 노동의 균형은 심각히 파괴된 상태에서 자본의 이윤 창출이 곧 국부의 창출이란 맹신은 일방적으로 굳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관념은 곧바로 현대자본주의 중요한 생산요소인 지식의 담지자로서의 ‘노동’이 지닌 가치가 더욱 중시되는 역설적 상황에 직면하게 되며 양자의 괴리는 우리사회의 미래에 암운을 던져주는 주요한 거시적 요인이 되고 있다.

  자본과 노동 간의 균형 파괴만이 아니라 자본 내에서도 마찬가지 양상이 벌어지고 있다. 재벌과 대기업의 과도한 지배력은 중소기업과의 상생 관계를 만드는 것이 근본적으로 불가하다 할 정도로 약탈적이며, 수출기업과 내수기업, 2·3차 산업과 1차 산업 등의 균형 역시 그 정도를 잃은 지 이미 오래다.

  이런 가운데 한국 국민의 삶은 위기의 징후들로 가득하다. 임금 노동자의 반수 이상은 비정규직으로 살아가면서 불안정한 신분과 저임금의 이중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 정규직 노동자라해도 언제 닥칠지 모르는 해고의 불안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헌법과 법률이 보장하는 노동기본권을 온전하게 누리지 못하고 있다.

  경제활동 인구의 30%에 이르는 중소자영업자들은 자영업의 과잉과 골목상권까지 밀고 들어온 대자본과의 경쟁 속에서 정상 이윤을 확보하지 못한 채 폐업과 도산, 재창업과 몰락의 악순환을 계속하고 있다.

  또한 국가와 사회의 미래를 책임질 젊은 청년들에게 88만원 세대의 족쇄를 채운 채 비정규직이나 청년실업으로 인생을 시작하게 만들고 있다.

  여전히 가부장제 유습이 제도와 관념 속에서 사라지지 않은 가운데 우리 사회가 여성들에게 제공하는 것은 직장에서의 ‘유리천장’과 비정규·저임금 노동자의 길이며, 대가없는 질곡인 ‘돌봄노동’에 치여 사는 길이다. ‘모든 아이는 모두의 아이’라는 슬로건이 국가전략이 될 만큼 선진 각국은 미래세대를 양육하는 일을 중시하고 국가적인 투자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사회의 많은 수의 아이들이 빈곤과 차별, 폭력에 방치되고 있다. 세계 최저의 출산율 속에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노령국가화 되고 있지만 노령인구에 대한 부양의 책임은 국가와 사회가 아닌 개인과 가정에 내맡겨져 있다.  

  각 계층의 생존상의 위기는 전반적으로 우리 사회를 ‘불안’의 사회로 만들고 있고 중산층을 포함한 대부분의 한국 국민은 ‘아동양육’, ‘교육’, ‘의료’, ‘노후’, ‘주거’, ‘고용’ 등 ‘6대 불안’에 휩싸여 살아가고 있다.

  따라서 한국사회에서 복지국가 구현의 필요성은 이러한 개인적, 가정적, 사회적 위기의 심각성에서 확인되고 있다. 이제 한국사회는 복지국가로서의 국가의 역할을 인정하지 않고는 더 이상 지속가능한 사회가 불가한 시점에 와있다. 복지국가 없이 민중의 삶의 기반이 와해되는 것과 동시에 더 이상 지속가능한 경제성장도 불가하다. 

 

보편적 복지국가를 통한 한국사회의 미래 전망

97년 경제위기보다도 더 심각한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고 가장 첨예하게 사회적 파열상이 드러난 지금 상황은 공동체의 미래를 위해 절체절명의 심정으로 새로운 결단을 선언하지 않을 수없는 엄중한 시기이다.

  그 선언은 우리 사회의 성장의 목표와 방법을 새롭게 정하는 패러다임의 전환에서 출발해야 한다. 국가 경제의 성장은 그 구성원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그들의 복리를 증진시키기 위한 것임을 명실상부하게 확립하여야 한다. ‘성장을 위한 성장’, ‘사람을 경시하는 성장’을 거부하면서 ‘사람을 위한 성장’을 목표로 내걸어야 한다. 계층 간, 분야 간 양극화나 지나친 불균등성을 제어하면서 분배의 정의를 경시하지 않는 성장이 필요하다. 누구나 노동을 통해 자아실현과 사회적 기여도를 찾는 것은 물론, 자신과 가족 구성원의 삶을 책임질 수 있다는 안도감이 현실에서 구현되어야 한다. 노동을 통해 자신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주체적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는 전제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의 경제사회 구조가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위기상황을 항시 초래시킬 수 있다는 인식에서부터 교육, 보육, 의료, 주거, 노후에 대한 사회적 담보가 제도적으로 구축될 수 있도록 사회임금social wage이 적극적으로 발동되어야 한다.

  이렇듯 1차적인 생산과정에 각자가 참여하여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적절한 조건을 확보하도록 하고, 이후 교육, 의료, 주거, 문화, 사회복지, 환경 등 포괄적인 사회정책을 통해 사회 구성원 모두가 자신의 천부적 권리의 하나인 생존권을 부여받음으로써 이것이 경제성장과 사회발전의 혁신적 동력이 되도록 국가의 운영원리를 수정해야 한다.

  우리는 그와 같은 국가운영의 원리가 구현되는 체제를 ‘보편적 복지국가’라고 한다. 보편적 복지국가에서는 대한민국 헌법이 보장한 대로 모든 국민의 인간다운 생활이 보장되며 복지는 더 좋은 경제의 동반자가 된다. 기업의 생산과 노동자의 인간다운 생활은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하며 성장 없는 분배도, 분배 없는 성장도 용납되지 않는다. 좋은 일자리를 민간에서 뿐만 아니라 공공의 영역에서 창출하며 근로 빈곤은 원천적으로 성립하지 않게 된다. 남녀 모두 돌봄 노동의 수행자로서의 역할을 공유하면서 돌봄 노동의 사회화를 통해 일-가정의 양립이 보장되고, 진정한 성평등의 사회가 구현된다. 빈부의 차가 극심하게 드러나지도 않고 사회연대와 공동체적 양식이 시민정신으로 구현되어 지역사회에서부터 든든한 사회적 경제의 기초가 마련되게 된다. 인간으로서의 자유와 존엄이 만끽되면서도 사회정의와 연대가 강고해지고 민주주의는 더욱 확대된다.

  이제 보편적 복지국가의 확립만이 우리사회의 희망이며 미래로의 비상구임을 자각하고 우리 사회에서 많은 이들이 동참해야 한다. 특히 ‘보편적 복지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국민이 복지국가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복지국가 구축을 위해 조직화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힘이 복지국가 구현을 위한 정책, 제도 제정 마련하는 정치권력과 결합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한국 사회의 민주화와 한국 민중들의 인간다운 삶의 확보를 위해 질주해온 모든 시민사회노동세력은 ‘보편적 복지국가’ 구축을 위해 다시 한 번 힘을 모아야 한다. 참여연대 역시 이러한 뼈저린 자각을 이제라도 국민을 향해 엄숙히 고백하고 앞으로 주체적 역할을 다 해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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