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1년 04월 2011-04-01   1061

어느날 문득, 영화 한 편

온전함을 위한 가혹한 도정

조광희 변호사

영화 ‘블랙스완’은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켰다. 나는 이 영화를 두 번이나 봤고 한 번 더 볼 용의가 있다. 이 영화의 무엇이 나를 매혹시켰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나는 ‘편안한 산책’같은 영화를 좋아하진 않지만 과도한 긴장을 요구하는 영화도 부담스러워 한다. 비록 잔혹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신경을 끊임없이 자극하는 이 영화를 보고 나는 왜 비탄과 감동의 눈물 한 줄기를 흘렸을까.

  뉴욕 발레계의 재능 있는 발레리나 니나는 마침내 ‘백조의 호수’의 주인공으로 발탁된다. 니나에게는 ‘백조’와 ‘흑조’라는 상반되고 적대적인 두 역할을 동시에 수행할 것이 요구된다. 그런데, 본래 모든 ‘역할’은 단순히 기능적인 것이 아니라 성격의 문제이기도 하다. 문제는 니나에게 순수한 백조적인 성격은 갖추어져 있으나, 욕망을 대변하는 흑조적인 성격은 결여돼있어 그녀의 흑조 연기는 생동감이 없다는 것이다. 최고의 발레리나가 되고 싶어 하는 그녀는 일생의 기회 앞에서 오히려 파멸의 위기에 직면하고, 계속되는 환각과 신체적인 변화에 시달린다.

  딸을 통하여 못다 핀 발레리나의 꿈을 대리만족하려는 왜곡된 엄마. 니나에게 밀려난 선배 발레리나의 파멸이 보여주는 우울한 미래. 그녀의 자리를 위협하는, 생래적으로 흑조적인 성격을 타고난 릴리. 카리스마 넘치는 발레단장의 유혹인지 단련인지 알 길 없는 요구들.

  이러한 다중적인 과제 앞에서 과연 니나는 위협적인 경쟁자를 물리치면서도 선배가 걸어간 파멸의 길을 회피할 수 있을까. 단장의 유혹을 뿌리치면서도 그의 버림을 받지 않을 수 있을까. 그리고 마침내 어머니의 욕망이 아닌 자신의 욕망을 실현할 것인지. 그 모든 과제는 그녀가 흑조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는가에 모아지고, 그것은 백조인 그녀가 흑조의 캐릭터를 자기 속에 받아들일 수 있는가의 문제가 된다.

  칼 구스타프 융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선한 사람이 되기보다 온전한 사람이 되고 싶다.” 백조와 흑조, 순수와 욕망, 선과 악, 사랑과 증오 따위의 온갖 이분법으로 나누어진 세계는 사실 세계의 모습 그 자체는 아니다. 자연은 선악을 모른다. 무심한 자연은 말없이 생성되고 변화하고 사라질 뿐이다. 그러한 이분법은 자연에서 문명의 세계로 넘어온 인간이 자신과 타인과 세계를 인식하는 시선에 내재되어 있는 인간적인 것일 뿐 본래적인 것은 아니다. 문명은 그 세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존재에서 당위를 이끌어내고, 자연에서 선을 추출해낸다. 그리고 그 아이들에게 진실한 것, 선한 것, 아름다운 것의 가치를 내면화하도록 요구한다. 문명의 그러한 기획이 인간의 본질에 잘 맞았더라면 아이들은 더욱 행복해졌을 것이고, 이 세계는 더 나아졌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문명에 속해있지만 무엇보다도 자연의 자식이다. 자연은 그러한 이분법에 저항한다. 그래서 어두운 욕망은 끝내 거세될 수 없고, 우리가 우리 자신 속의 어둠을 몰아내려 할 때마다 어둠은 점점 응축되어 폭발 직전에 이르고, 자기 안의 그림자를 부인할 때마다 그 그림자는 자기를 놓아달라고 절규한다.

  이 영화는 엄마로 대변되는 문명이 훈육한 선의 세계는 온전한 세계가 아니며, 그러한 억압을 이겨내야만 비로소 온전해 질 수 있다는 가혹한 진실에 대한 은유다. 극도의 신경증에 시달리며, 혼란의 극한을 이겨낸 니나는 마침내 소녀에서 여인으로, 백조에서 흑조로 완성된다. 그 과정은 수많은 인간이 걸었고, 무수히 많은 작품이 보여준 인간 승리의 기록이다. 아로노프스키 감독은 유망한 발레리나가 역경을 딛고 프리마 발레리나가 되는 짧은 여정을 통하여 그 고통과 불안과 환희를 음울하면서도 눈부시게 표현하고 있다.

  내가 이 영화에 빠져든 이유는 아마도 그러한 힘겨운 여정이 남의 것으로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우리는 백조로만으로도, 흑조로만으로도 살 수 없다. 선과 악을 그리고 빛과 어두움을 우리 속에 모두 가져야만 우리는 비로소 온전해진다. 벼랑 끝까지 몰린 니나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부정했던, 그러나 기실 자신 속에 가능성으로 존재하면서도 은폐되어 있던 자기 자신을 회복하고 받아들인다. 이로써 어머니를 극복하고, 단장을 만족시키고, 릴리와 관객의 찬탄을 이끌어낸다.

  알다시피 어떤 예술도, 어떤 영화도, 그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텍스트는 아니다. 각 개인은 저마다의 주관적인 경험과 감정과 사유의 총체적 자산을 가지고 텍스트와 대화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텍스트를 보고 공통적인 감정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것은 우연의 일치이거나 어떤 경향을 보여주는 것일 뿐, 우리는 각자 자신의 모든 존재를 걸고 어떤 작품을 마주한다.

  이 영화에서 무엇을 보는가는 각자의 자유이다. 어떤 이는 ‘흑조를 탐한 백조의 파멸’을 보기도 하고, ‘전시되어야 하는 신체의 고행’을 본다. 어떤 이는 ‘소녀의 불경한 성인식’을 보기도 하고, ‘발레계의 어두운 이면’을 보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자신의 것인 줄 알았던 타자의 욕망을 몰아내고 주체가 욕망을 회복하는 과정’을 읽어낸다. 내게 이 영화는 선악의 이분법을 넘어서 비로소 성숙한 인간이 되는 미성년의 가혹한 투쟁의 기록으로 보인다. 그것은 내가 여전히 그러한 투쟁의 와중에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를 보고나서 잠을 못 이루던 어느 밤에 나는 트위터에 이렇게 썼다. “영화 블랙스완이 자꾸 생각난다… 얼룩말에게서 배우자. 우리, 얼룩스완으로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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