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1년 04월 2011-04-01   1518

주목! 이 강좌-세시봉 시대에 대한 그리움의 실체

세시봉 시대에 대한 그리움의 실체

이영미
대중예술평론가

작년 하반기부터 올 봄까지 텔레비전에서는 대중가요와 관련된 두 개의 열풍이 불고 있다. 하나는 <놀러와>의 추석특집부터 시작한 세시봉 열풍이고, 다른 하나는 작년 <슈퍼스타 K>부터 불붙어 올해의 <위대한 탄생>과 <서바이벌 나는 가수다>(이하 <나는 가수다>)로 이어지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다.

많은 평자들이 이미 지적했듯이, 두 경향의 부상은 시각성이 강한 최근 대중가요에 대한 식상함, 노래 듣는 재미에 대한 목마름 때문이라는 분석은 타당해 보인다. 최근의 아이돌 가수와 댄스그룹의 가창력 수준은, 오토튠이라는 소프트웨어가 없으면 음반 취입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업계의 정설이다. 이 컴퓨터 프로그램은, 목소리의 높이를 컴퓨터 조작을 통해 정확하게 보정해주는 것으로, 아무리 음의 높낮이가 엉터리인 노래도 이 프로그램으로 클릭을 몇 번 해주면 정확한 음높이로 부르는 노래처럼 들리도록 한다. 포토샵이라는 프로그램으로 인물 사진을 롱다리와 날씬한 허리, 잡티 없는 피부로 만들어주는 것처럼, 오토튠은 못 부른 노래를 잘 부른 노래로 보정해주는 프로그램인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녹음 음원으로 립싱크를 하며 춤을 추는 가수가 텔레비전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분칠 안한 정직한 목소리를 노출하여 감동을 주는 서바이벌 프로그램과 세시봉 멤버들의 즉석 공연은 신선한 충격일 수 있었다.

그런데 최근 세시봉 멤버 중 맏형인 조영남이 <나는 가수다>를 비판했다. 이미 가창력으로 대중에게 충분히 인정받은 최고 수준의 중견 가수들을 놓고, 가창력 테스트를 통해 순위를 매기는 발상이 모욕적이라는 것이 요지였다. 이에 대해 찬동하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나는 가수다>의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틀이란 가창력 있는 중견 가수들의 노래를 높은 시청률로 방송할 수 있게 하여 황금시간 대에 배치할 수 있도록 하는 장치에 불과하다는 옹호론이 강력하게 제기되었다.

어느 의견이 더 타당한가에 대한 논의가 이 글의 목적은 아니다. 이를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조영남의 이러한 비판으로 세시봉 열풍에서 간과할 뻔한 중요한 지점 하나를 다시 생각하게 했다는 점이다. 이미 나는 다른 매체에서, 세시봉 열풍이 한편으로 비주얼에만 치중하는 요즘 가요계에 대한 대중들의 불만의 표출인 동시에, 전후에 태어나 새로운 문화를 체험하며 성장한 1970~80년대의 청년 세대가 이제 노인으로 진입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는 요지의 칼럼을 쓴 적이 있다. 그런데 이번 논란을 계기로 우리가 세시봉 프로그램을 보면서 왜 그렇게 기분이 좋았었는지에 대한 또 하나의 이유를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건 바로 1970년대의 초기 포크가 지니고 있던 공동체적 분위기에 대한 그리움이다. 세시봉 프로그램들을 보면서 시청자들이 받은 감동과 만족감은, 단순히 추억이 주는 아련함, 40년 전 노래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예술적 질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또 다른 무엇이 있었다. 그것의 실체는, 그들이 둘러 앉아 호흡을 맞추어 노래하고 연주할 때에 풍겨 나오는 독특한 공동체적 분위기였다. 이야기를 하다가 노래가 시작되면, 그 옆에서 자연스럽게 기타 음을 찾아 연주를 시작하고, 또 한 사람은 슬쩍 일어나 뒤에서 더블베이스를 만진다. 그리고 그 사람의 독창 부분이 끝나고 클라이맥스에 들어가면 목소리를 더해 화음을 맞춘다. 경쟁이 아닌 상생과 조화의 아름다움, 이 얼마 만에 느끼는 것인가.

  이들 청년문화의 초기 포크송은 분위기가 늘 이랬다. 1970년대 초 텔레비전에 이들이 처음 출연했을 때에도, 이들은 늘 이런 분위기로 노래를 부르고 깔깔거리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래서 이들이 출연하는 프로그램은 <쇼쇼쇼> 같은 정통 쇼 프로그램보다는, 싱얼롱(함께 노래 부르기)과 간단한 게임, 신선한 감각의 개그와 토크 등이 어우러지는 청소년 프로그램들이 많았다. 초대 손님의 토크와 노래가 결합되는 심야 음악프로그램의 분위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가수들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런 노래를 즐겼던 당시 청소년들은 둘러앉아 손뼉을 치며 이런 노래를 불렀다. <길가에 앉아서>, <연가> 같은 이 시대의 노래들이 지금까지도 청소년단체의 캠프송으로 남아있는 것은 바로 포크송이 지닌 이런 문화 때문이다.

  당시 기성가요계가 이봉조 사단, 박춘석 사단, 신중현 사단 등, 작곡과 연주를 주도하는 강력한 ‘보스’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었던 것에 비해, 아직 대학생 티를 벗지 못한 이들은 서로 품앗이 하듯 초청공연이나 음반 녹음에 따라가서 공짜 연주를 해주고 공짜 초대손님을 해주었다. 그런 점에서 이들은 태도가 아마추어였지만, 그것은 음악 실력을 낮춘 것이 아니라 오히려 높여 주었다.

  그들의 노래는 그들 맘대로 바꾸고 편곡하고 새로운 음악적 아이디어가 수시로 생겼다 사라졌으며, 그 과정에서 ‘보스’의 허락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가끔 정돈 안 된 어설픔이 노출되기도 했지만, 기성 가요계가 상업성을 고려하여 감히 할 수 없었던 창의적인 발상과 새로운 감각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처음부터 직업인의 태도로 시작하여 밥벌이를 위한 눈치를 보며 활동했던 록그룹들과 달리, 당시의 포크가 더 창의적이고 파격적이며 의미충만한 노래를 지으면서 청년문화의 핵심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이유였다.

  물론 이것이 이들이 특별히 잘났기 때문은 아니었다. 이들은 고학력자였고, 가수 활동을 그만 두어도 먹고살 만한 다른 직업을 찾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만큼 그들은 여유로웠고, 그 여유로움이 공동체적 분위기 속에서 과감하고 창의적인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게다가 기성세대의 감수성에 반기를 드는 청소년 세대들의 광범위한 지지가 막 상승하고 있던 시기라 이들은 매우 자신만만한 행보를 할 수 있었고, 시대는 이들의 흐름을 주류로 성장시켜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런 공동체적 분위기가 주류적 흐름을 장악한 시대는, 이후 다시 오지 않을 정도로 이 시기는 예외적이었다.

  언더그라운드, 민중가요, 인디음악 등 비주류에서는 계속 이런 공동체적 분위기가 이어졌지만, 주류에서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는 서바이벌 게임을 해야 했다. 그런 점에서 세시봉 프로그램에서 보여준 그 분위기는, 우리의 기억 저편에 그리움으로만 있었던 에덴동산을 다시 만난 것 같은 행복감을 선사해 주었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치열한 경쟁만이 실력을 높여준다는 신화에 대해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경쟁뿐 아니라, 공동체적 상생 역시 창의성과 실력을 높여준다는 엄연한 진실을 간과하도록 만든 것이다.

  지금 텔레비전을 채우고 있는 수많은 서바이벌 프로그램은 바로 그런 경쟁의 신화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던가. 세시봉 프로그램이 몰고 온 예상치 않은 열풍은 어느 틈엔가 까맣게 잊어버린, 공동체적 조화와 상생, 이를 통해 만들어진 높은 질의 결과물에 대한 그리움이 그래도 우리 기억의 한 구석에 남아있음을 의미하는 것일 게다. 

참여연대 아카데미 느티나무 2011년 봄강좌
대중가요로 떠나는 시간여행 – 너희가 세시봉을 아느냐  이영미
05.12    왜 대중가요를 읽어야하는가
05.19    트로트, 식민지 근대의 비애와 사유방식
05.26    포크, 근대의 완성과 반성
06.02    댄스뮤직과 록, 탈근대의 희망과 절망
06.09    그리고, 지금 여기서 대중가요 함께 듣기
목 오후 7시~9시30분 총5회 8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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