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1년 03월 2011-03-01   1947

안건모의 사는 이야기-세시봉 가수와 민중 가수

세시봉 가수와 민중 가수

뒤늦게 세시봉 프로그램 재방송을 봤다. 세시봉은 1970년대 유행하던 음악다방 이름인데
거기에서 활동했던 가수들이 모여 그때 유행하던 노래를 들려주면서 이야기를 하는 프로그램이다.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요즘 아이돌 못지않게 인기가 있었던 가수들이 나왔다.
송창식과 윤형주의 아름답고 시원한 목소리는 나이가 들어도 여전했다.
김세환의 <좋은 걸 어떡해>, 윤형주의 <조개껍질 묶어>,
송창식의 <한번쯤>. 이런 노래는 내 젊은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그때가 1970년대 후반, 내가 스무 살 무렵이었다. 공장을 다니거나 건축현장에서 일을 하면서
언젠가는 나도 노래 가사처럼 멋지게 살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하얀 모래위에 시냇물이 흐르고 파란 하늘 높이 흰구름이 나르는” 곳에서
예쁜 여자에게 “한번쯤” 말을 건 뒤에 “조개껍질 묶어” 그녀의 목에 걸겠지 하는 희망 속에 살았다.
나는 두 살 위인 형과 이들이 부르는 노래를 배우고 싶어 기타를 끼고 살았다.
형은 나보다 더 미쳐서 기타를 빨리 배웠다. 결국 낮에는 박스공장을 다니면서
저녁에는 ‘삼류싸롱’(술집)에 나가 어설픈 기타 솜씨로 전자 기타를 쳤다. 형이 가끔 몸이 아프면
나보고 대신 나가라고 했다. 나는 겨우 주요 삼코드를 번갈아 잡으면서 리듬만 치는 기타 실력이었다.
하지만 그 삼류싸롱에서 음악을 듣는 손님들은 술에 곤드레만드레로 취해 저놈이 기타를 잘 치는지,
음악을 제대로 하는지 판단하지 못했다.
나는 그렇게 열심히 기타를 쳤지만 딴따라가 될 수는 없었다.
공장과 건축현장에서 잔뼈가 굵었고, 군대를 제대한 뒤 운전면허증을 따서 버스 운전을 20년 했다.
가끔 심심할 때면 트로트나 이 세시봉 때 유행하던 노래를 부르면서 기타를 쳤다.
10년 전부터 우리나라 노동자들의 열악한 현실을 깨달으면서 집회 현장을 자주 다녔다.
거기서 부르던 민중 가수들의 노래는 내 마음을 울렸다.
“흩어지면 죽는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이런 노래들을 들으면 힘이 생겼고, 금방이라도 세상이 바뀔 것 같았다.
이젠 집회 현장에 가서 그런 노래가 나오면 따라 부를 수 있을 정도가 됐다.
세시봉을 보면서 생각했다. 이 세상이 우리 노동자 세상이 되어 민중가수들도 투쟁만 외치는
행진곡풍 노래가 아니라 따뜻한 노래를 부르면 좋겠다고.
늘 노동자들의 집회 현장에서 살다시피 하고 있는 민중가수 박준, 김성만, 지민주, 연영석 같은 이들이
투쟁가가 아닌, 사랑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보고 싶다.
아, 정말 몇 년 뒤에는 민중가수들을 초대해 세시봉 같은 프로그램을 만들면 좋겠다.
세시봉 추억이 아니라 농성장 추억을 이야기하고 그때 세상은 왜 그렇게 차별받는 비정규직이 많았는지
어떻게 우리가 자본가와 싸워 비정규직을 없애고 평등한 세상을 만들었는지 이야기하면서
노래 부르는 그런 프로그램. 뭐 오래지 않아 나오겠지. 아, 상상만 해도 유쾌하고 즐겁다. 

안건모 님은 20여 년 동안 버스 운전사로 생활하며 쓴 일터 이야기를 모은 에세이집 『거꾸로 가는 시내버스』의 저자로, 현재 중·고등 학생부터 청년들, 노동자, 농민, 장애인, 또 세상을 사람이 사람답게 살 만한 곳으로 바꾸고 싶어 하는 분들이 함께 쓰고 함께 읽는 월간 <작은책>의 발행인입니다. <참여사회> 3월호부터 안건모 님이 우리 사는 세상 이야기를 독자들과 나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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