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1년 01월 2010-12-01   945

서평-겨울 밤에 일기 좋은

겨울 밤에 읽기 좋은

-이반 부닌의 <어두운 가로수길>과 솔 벨로의 <오늘을 잡아라 >-

테레사 자유기고가

 

‘어두운 가로수길’이라니. 얼마나 서정적인가! 먼지가 부옇게 이는 여름날이어도 좋다. 만약 한낮의 지루한 해가 사라진 뒤의 가로수길이라면 열기가 가신 땅거죽으로부터 스멀스멀 어둠은 무한히 피어오를 것이다. 만약 그것이 겨울날 차갑게 식어버린 대지라면, 가로수들은 텅 빈 주변보다 더 비어버린 제 몸의 균형을 맞추며 모질게 서 있을 터이다. 

  모스크바는 명료한 도시다. 6월의 모스크바가 건조한 대기와 그것보다는 조금 윤택한 태양이 명랑하게 빛나던 도시라면 모스크바의 12월은 화끈하다. 그 맛은 에스프레소의 그것만큼  따끔하지만 결코 불쾌하지 않다. 검고 가는 자작나무가 늘어서 있는 아파트 단지는 또 얼마나 소설적인지. 이즈음 정강이까지 빠지는 희디 흰 눈은 깊이를 잴 수 없다. 우주의 깊이만큼 심오한 느낌을 준다. 프라스펙트 레닌(레닌대로)은 여전히 길게 죽 뻗어 있을 것이며, 유고자빠드나야역 근처에는 피부색이 짙은 콧수염의 남자들과 코끝이 휜 여인들이 추위도 잊고 바구니를 든 채 혹은 좌판에서 물건 값을 흥정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19세기 러시아의 작가 이반 부닌(1870-1953)의 『어두운 가로수길』은 딱 이즈음에 집어들기 좋은 ‘제목’이다. 순전히 제목에 이끌려 이 책을 집어 들었던 것 같다. 게다가 사랑 이야기니 술술 읽히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13년에 걸쳐 쓴 단편들은 저마다 사랑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예컨대 표제작인 <어두운 가로수 길>은 “모든 게 사라진다고 잊히지는 않아요.”라는 문장으로 압축될 것이다. 이 문장은 가혹하리만치 서글픈 느낌을 준다. 그 느낌은 마치 얼마 전 마종기 시인의 시 <전화>에서 받은 느낌과 닮았다.


당신이 없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전화를 겁니다.
신호가 가는 소리

당신 방의 책장을 지금 잘게 흔들고 있을 전화 종소리, 수화기를 오래 귀에 대고 많은 전화소리가 당신 방을 완전히 채울 때까지 기다립니다. 그래서 당신이 외출에서 돌아와 문을 열 때 내가 이 구석에서 보낸 모든 전화 소리가 당신에게 쏟아져서 그 입술 근처나 가슴 근처를 비벼대고 은근한 소리의 눈으로 당신을 밤새 지켜볼 수 있도록.

다시 전화를 겁니다.
신호가 가는 소리.

– 마종기 <전화> 전문 –

  어려운 시어를 쓰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 평이한 언어들이 빚어내는 정서는, 사랑의 어떤 측면을 정확하게 보여준다.아찔함을 느낄 정도다. 『어두운 가로수길』에서 부닌이 보여주는 사랑의 모양들도 제각각 사랑의 한 부분들을 건드린다. 오래된 기억으로만 남아있는 첫사랑을 다시 만나는 초로의 남자에게, 죽음 뒤에서라도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며 전쟁터로 떠나는 남자에게, 혹은 변심한 애인에게 한 방을 날린 사내에게 사랑이란, 연민일 수도 희생일 수도 질투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이란 “삶에서 행복은 없지만 그 삶에서 번갯불 같은 순간들이 있고, 그 순간들로 인해 살아”가는 어떤 것이라는 문장에 우리가 함께 공감하게 된다면 “시간에 대한 희망을 제외하고 나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라고 묻는 듯 깨달은 듯 던지는 문장은 이렇게 들릴 수도 있다. “시간과 함께 이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 아닌가요?”라고.  


“모든게 사라진다고 잊히진 않아요”

부닌은 러시아인으로서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1933) 인물이긴 하지만 그다지 우리나라 독자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나 역시 대학 때 처음 접하곤 거의 잊고 살았다. 비 영미권의 대중적이지 않은 작품을 펴낼 생각을 한 출판사(지만지)를 다시 보지 않을 수 없다(불행히도 이 책은 현재 인터넷 서점에서 품절이라고 정보가 뜬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 책은 작년에 읽다가 그다지 깊은 인상을 받지 못해 옆에 밀쳐 둔 책이다. 그러다가 얼마 전 다시 펴들게 된 것이다. 그 계기는 뜻밖에도 올 6월 손창섭 작가의 죽음이라고 해야겠다. 어느 신문에서 “스스로를 지운 사람”이라고 명명할 정도로 철저하게 자신을 숨기며 살았다는 이력이 눈길을 끌었던 데다 그가 쓴 그 유명한 <잉여인간>을, 실은 정식으로 읽어보지 않았다는 일종의 죄책감 비슷한 무엇이 내게 있었던 모양이다. 해서 <잉여인간>이 실린 단편집 『비 오는 날』을 읽어보기로 한 것이다. 손창섭은 작가가 되기 전 일본으로 건너가 중학을 다니는데 이 때 작가 안톤 체호프가 있었다 한다. 작가 소개에 따르면 손창섭은 체호프의 작품 중에 ‘아뉴쉬까’를 가장 좋아했다고 한다. ‘아뉴쉬까’라니. 아름답지만 서글픈 사랑이야기인 바로 그 ‘아뉴쉬까’라니 말이다.

  줄거리는 대강 이렇다. 모스크바 대학에 다니는 귀족 청년이 방학 때 부모의 영지로 온다. 이 집에는 안나라고 불리는 사랑스런 소녀가 있다. 이 청춘의 귀족 청년은 하녀인 이 소녀에게 마음이 끌리게 된다. 둘은 눈 내리는 언덕에서 함께 썰매를 탄다. 썰매를 타고 언덕을 내려오면서 청년은 소녀의 귀에다 대고 속삭인다. “아뉴쉬까(안나의 애칭)… 아뉴쉬까…”. 방학이 끝날 무렵 청년은 떠난다. 남은 소녀는 생각한다. 청년과 함께 썰매를 타고 언덕을 내려올 때 귓가에 들려오던 그 소리는 사랑의 속삭임이었던가, 바람소리였던가. “안나… 아뉴쉬까… 아뉴쉬까… 사랑해…”.

  나에게 ‘아뉴쉬까’는 이런 줄거리로 남아있다. 혹시 번역이 되어 있나 찾아보았으나 허사였다. 외국어로 읽었고 소련에서 짧은 영화로 만들어진 것을 영어자막과 함께 보았던 기억도 난다. 이렇게 일깨워진 정서는, 한 옆에 밀쳐둔 부닌의 『어두운 가로수 길』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책을 고르는 기준이나 계기는 별의 수만큼이나 다양할 터이지만, 나에게는 신문의 서평일수도, 출판사에서 보내오는 신간 알림 메일일수도 또는 술자리에서 옆 사람들이 주고받은 한마디 품평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번처럼 한 작가의 죽음과 그 죽음에 연쇄적으로 반응한 일련의 개인적 추억일 수도 있다.


“너무 절망적이라 허무마저 사치스런 오늘”

반면 부닌보다 43년 늦게 노벨 문학상을 받은 미국의 작가 솔 벨로의 『오늘을 잡아라』는 한 건방진 남자가 내뱉은 말 때문이다. “솔 벨로 읽어봤어? … 문체란 그런거지.” 영화 <질투는 나의 힘>이란 영화에서 출판사 편집장이란 작자가 부하 직원에게 의기양양하게 한마디 던진다. 특별히 이반 부닌보다 대중적인 면에서 형편이 나아보이진 않는 이 작가는 이렇게 나에게 각인되었다. 문체라… 영미문학전공자들에게는 익숙할지 모르지만, 그 역시 번역본이 별로 많지 않는 것 같다. 다른 작품이 있을 법하지만, 나에게 그의 책으로는 『오늘을 잡아라』가 처음이었다. 솔직히 제목은 무슨 자기 계발서나 주식 거래 지침서 같다는 느낌을 준다. 예전에 나온 번역서는 “그날을 잡아라”라고 했는데, 좀 뜬금없어 보이기도 한다. 책을 다 읽고 나면 아마 어느 제목이 더 적절한지 나름의 판단이 설 수도 있겠다.

  주인공 윌키(토니 윌헬름의 애칭)는, 한마디로 실패한 인간의 조건은 다 갖추었다. 은퇴한 의사 아버지는 소통불능이고, 하나밖에 없는 누나는 소식을 못 듣고 산 지 오래되었다. 얼마 전에 직장에서 쫓겨났으며, 이혼은 해주지 않고 별거중인 아내는 늘 돈을 요구하며 괴롭힌다. 이것이 윌키의 외부 조건이라면 그 자신의 내면은 어떤가? 사기꾼 브로커에게 속아 할리우드에 갔으나 단역 배우조차 되지 못한 채 10년을 허비했다. 늘 결코 선택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일을 최후에는 선택하고 만다. 이제 마흔 줄을 넘긴 윌키는 자신의 실패 원인이 무엇인지도 잘 알고 있다. 내일은 아직 오지 않았고 어제는 이미 지나갔으니 오늘을 잡을 밖에 도리가 없다. 허나 이런 처지를 자각한다고 해서 나아지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실패를 내정한 어리석은 짓이란 걸 잘 알면서도 사기꾼에게 가진 돈 전부를 맡기는 것이 윌키 같은 나약하고 어리석은 이의 숙명일까? 배반당한 걸 깨닫는 순간 느닷없이 낯선 사람의 장례식 행렬을 마주친다고 하여 달라질 것이 있던가? 그는 실컷 울었고, 눈물은 또 다른 시작의 전조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무도 모른다. 판도라가 가장 마지막으로 남겨두었다던 희망이 보일지는. 인생은 바닥이고, 바닥에서 솟구치기 위해서는 적어도 발구름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자의식은 우리의 삶을 바닥에서 끄집어내 주는 실제적 도구는 되지 못하는 듯하다. 다만, 도구를 찾아야 할 구실을 주는 정도는 되겠지만. 종국에는 행동만이 변화로 이끄는 열쇠이리라.

  단 하루 동안에도 일생을 산 것 같은 날들이 있는 법이다. 윌키가 단 하루 동안 뉴욕 브로드웨이 거리를 걸으면서 겪게 되는 일은 결국 우리의 전 생애일 수도 있다. 너무 절망적이라 허무감조차 사치로 느껴지는 어떤 날의 ‘오늘’처럼 말이다. 결국 우리는 지나간 어제를 돌이킬 수 없고, 오지 않은 ‘내일’ 때문에 몸 달을 필요가 없다. 다만, 오늘을 잡을 밖에. 하지만 이건 너무 뻔한 교훈 같다. 그래도 어쩌란 말인가, 생각만큼 교훈대로 안 되는 것이 인생인 것을. “자네에게 고통과 결혼하지 말라고 말해 주고 싶어. 그런 사람들이 좀 있거든. 그들은 고통과 결혼해서 꼭 부부처럼 함께 먹고 자고 하지. 그러다가 즐거움을 알게 되면 자기가 간통을 저지르고 있다고 생각할 정도가 된다니까?”(167쪽) 다만 이렇게 톡 쏘는 구절에서조차 위안을 느낄 수밖에. 이 위안은 보편성을 확인하는 순간에 찾아오는 안도 같은 감정이다, ‘나만 그런 게 아니군.’ 하는.

테레사는…
“제 이름은 테레사, 아녜스, 사라… 어쩌면 스밀라입니다. 이들은 모두 저를 매혹시킨 책 속 여주인공들입니다. 흔히 누구에게나 인생을 변화시킨 책 한 권쯤은 있다고 하는데 저는 부끄럽게도, 없습니다. 다만, 지금 현재 제 손에 들려 있는 책이 늘 최고의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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