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1년 12월 2011-12-05   2062

아주 특별한 만남-해고 노동자에서 민주 인사로 우뚝 서다

해고 노동자에서 민주 인사로 우뚝 서다

 

한겸택 회원

 

 

이경휴 수필가, 「참여사회」 시민기자

“언젠가 같이 없어질 동시에 사람들과 좀더 의미 있고 건강한 가치를 지켜가면서 살아가다가 ‘별 너머의 먼지’로 돌아가는 것이 인간의 삶이다.” 안철수 

 

또 한 해가 가고 있다. 이럴 때면 늘 등장하는 사자성어가 다사다난多事多難이다. 올해에도 어김없이 지면의 여기저기를 장식할 것이다. 하지만 예년과는 달리 그 속에서는 희망이라는 작은 풀씨 하나를 우리는 감지할 수 있을 것 같다.

  지난 10월 치러진 서울시장 선거에서 시민의 힘으로 시장을 탄생시켰고, ‘소금꽃 나무’의 김진숙 님이 309일 만에 땅을 밟았고,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1500억 원 상당의 주식을 기부하며 ‘실천’의 장을 열었다. 상식, 참여, 실천으로 요약되는 안철수 원장의 메시지는 정치권을 일시에 패닉상태로 만들어버렸다. 이를 두고 한 작가는 역사는 흐르고 시민들은 대화하고 연대하며 날마다 진화 중이라고 했다. 

  역사가 흐르듯 노동 현장의 역사를 바로 기술하고자 횃불 높이 들었던 사람을 만났다. 70년대부터 노동운동을 하다가 1993년 한 대기업으로부터 해고된 노동자 한겸택(59세) 회원. 질곡의 세월을 이겨내고 2004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로부터 민주화운동을 인정받았고 아울러 보상도 받은 위대한 인터뷰이다.

  카페 ‘통인’에 들어서는 순간 평화로운 저녁노을 한 줌이 의자에 드리워져 있는 듯했다. 이순(耳順)을 눈앞에 두고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과 같은 표정을 짓는 사람이 어디 흔하랴. 18년  간 노동현장에서 뛰었던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변신(?)이었다. 다탁에 놓여있는 엄청 두툼한 책자가 눈에 들어왔다. 『○소리 민주화운동이야기』라고 써진 책의 두께가 주는 중압감이 그의 신산했던 삶을 짐작할 수 있는 유일한 증거였다. 옆에 있는 검정색 작은 가방에선 많은 자료들이 얼핏 보였다. 오늘의 인터뷰는 즉문즉답이 아닌 한 편의 대하소설을 읽는 것 같은 시간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남편은 끌고 아내는 밀고

서로 편한 시간을 절충하다보니 일요일이었고, 식사를 하기엔 어중간한 시간이라 다과로 대신하기로 했다. 앞에 놓인 빵을 집어 들며 맛에 대한 품평이 있었다. 의아해 하자,

  “해고 되고 집사람이 제빵사 자격증을 따서 빵집을 했죠. 그럭저럭 경제적으로 안정이 되어갔는데 가게 가까이 대형마트가 들어서며 그 안에 큰 빵집이 둘이나 생기더라고요. 매상이 팍 반으로 줄어들었고 잇달아 IMF가 와서 가게를 접었죠. 그래도 빵맛은 좀 압니다.”

  대하소설 1권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듯싶었다. 1권의 발단 부분은 이미 지난 10월 마지막 주말, 대청호반에서 있었던 MT에서부터 있었다고 한다. 때문에 참여연대 ‘어버이연합’(?)으로부터 열렬한 지지와 추천으로 송년 인터뷰의 주인공으로 등극하셨다. 자칭 18번이라는 ‘타는 목마름으로’를 열창하면 스스로가 정화되는 것 같다고 고백하며 좌중을 휘어잡았다고 한다. 18번이요, 애창곡이 ‘타는 목마름으로’이니 아직도 그는 목이 타는가? 어리석은 독백을 해보았지만 그는 여전히 평온한 표정이었다. 잠시 망설였다, 대하소설의 어느 부분부터 강독을 시작해야 하는지. 가장으로서 힘들었던 점부터 이야기해 달라고 하자 뜻밖의 답변이 나왔다.

  “마누라 자랑하면 팔불출이라지만 집사람 힘이 절대적이었기에 가장으로서 어려움은 전혀 없었죠. 솔직히 노동조합운동을 한다면 감방 갈 각오를 해야 하는데 망설였죠. 그런데 집사람이 나중에 눈을 감을 때 후회할 일은 하지 말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가야 잘 살고 가는 거 아니겠느냐며 용기를 주었죠. 조합원을 만나려 다닐 때도 지갑을 두둑하게 챙겨주며 집안 일 걱정은 말라고 했죠.”

  현대판으로 부창부수(婦唱夫隨)요 민주가정의 표본이 아닐까. 부인 역시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 탓에 약자의 입장을 세상에 고하곤 했다. 「버스 안내양의 근무일지」로 신동아 논픽션 부문에 최우수상을 수상했고, 이어 86년 중편소설로 문예중앙에 등단한 소설가이다. 때문에 방대한 독서량으로 다져진 지혜가 책 밖의 세상에서 고민하고 갈등하는 남편에게 전폭적인 지지와 멘토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던 것이 아닐까. 팔불출이 아니고 사실을 그대로 전달할 뿐인데 무척 쑥스러워했다.

 

노동운동과 해고 그리고 암흑 속으로

진솔하게 본인의 이야기로 들어갔다. 1977년 회사에 입사하여 1993년 해직 당할 때까지 고군분투 했던 일지를 들춰 정리를 했다.

  1977년 기계정비 중 엄지손가락이 기계에 물려 전치 6주의 사고를 당했는데도 회사에서는 보상을 거부, 구로노동상담소를 찾아 상담 끝에 회사 측으로부터 보상을 받아냈다. 이로 인해 그의 직장생활에는 빨간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현장 작업조건 개선을 위해 노동조합 사무실에 찾아가 항의를 하자 불순세력으로 낙인이 찍혀 시말서를 강요했다.

  1987~1989년 회사 측과 어용노동조합 위원장의 밀실야합으로 이뤄진 임금협상에 항의하여 파업에 주동적으로 참여했고, 1989년 자주적인 노동조합과 조합원들이 결성하고 월간 소식지 <징소리>를 발간했다. 그해 위원장 선거에 출마하여 낙선했으나, 회사의 온갖 협박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대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회사의 흑색 비방과 어용노조에 대응하기 위해  ‘○○ 민주노조실천노동자’회를 결성했고, 노동자들의 부당한 처우 개선을 <한겨레>신문에 투고했다. 1992년 임금청구소송을 제기했으나 패소했고 이어 노동조합 명예훼손과 반조직 혐의로 노동조합에서 제명처분 됐다. 1993년 명령불복종으로 해고되면서 그간의 활동을 문제 삼아 퇴직금의 1/3만 통장으로 송금 받았다.

  이 몇 줄의 글이 그의 16년 노동운동사 압축파일이다. 그 행간에 숨어있는 많은 분노와 좌절과 애환이 그를 키운 ‘8할의 바람’이 아닐까.

  정리하는 중간 중간 그는 비통한 심정을 몇 마디 거들며 읊조렸다.

  “생산성 향상이라는 것이 원가 절감 차원에서 진행되는 게 아니라 5명 할 일을 4명으로 줄이고, 1분에 80번 돌리던 기계를 100번 돌리면서 노동자들을 조여 대는 겁니다.”

  “주·야간 교대를 할 때는 일요일 들어가서 월요일 퇴근할 때까지 라면을 주식 겸 간식으로 6~7번을 먹게 되더라고요. ‘우리는 실험용 쥐가 아니다’라고 라면 박스 뒤에 써서 항의도 했죠. 그런데 같이 일하던 친구도 반장이 되면 이건 우리를 더 조여 대는 거예요. 개구리가 올챙이 적을 생각 못 하듯이.”

  “파업이 끝나자 삼청교육대 출신 깡패를 구사대라는 이름으로 현장에 집어넣어 나를 못 살게 했어요. 술만 먹으면 빨갱이 때려잡는다고 몽둥이를 들고 나타나 유리창을 다 깨고, 유리조각을 입에 넣어 씹고, 내 머리에 담뱃재를 털고…. 구사대에 맞설 사람이 2~3명만이라도 있었다면 운동을 하는데 큰 힘이 되었을 텐데.”

  절실하고 절박했던 상황에 나온 절규였으리라. 40여 년 전, 전태일 열사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나에게 대학생 친구가 한 명만이라도 있었다면.’ 역사 속에는 가정(假定)이 없지만 개인의 삶에 있어서 가정이란 상상력의 원천이 된다. 또한 그것이 삶의 동력이기도 하다.

 

암흑 속에서 빛을 보다

2년간에 걸친 소송에서 패소하면서 그가 얻은 결론은 법이란 기업가를 위해 존재하는 방어벽이라는 사실이었다. 현장 노동자로서 한 시간도 살아보지 않고, 피눈물로 작성한 16년 노동일지를 단 몇 줄로 언급하는 판사를 보면서 법은 기껏해야 지배층의 이익과 안전을 꾀하는 수단일 뿐 약자에겐 독배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법질서나 법과 원칙은 힘 있는 자, 돈 가진 자, 연줄이 닿는 자들이 제멋대로 살기 위한 방편에 불과하다는 것도 동시에 깨달았다.

  그는 현장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마음속의 민주열사 3인’이 있다며 목소리가 떨렸다. 열악했던 노동현장에서 투신으로 항거했던 이들을 공장 담장 밖에서는 아무도 모르게 처리해버린 주도면밀함에 치를 떨었다. 그는 그들의 기일을 홀로 여태껏 기리고 있다고 한다. 

  해고 이후 그는 한동안 환영과 환청에 시달렸다. 시너 통을 들고 공장 담벼락을 넘다 뒷덜미를 잡히는 꿈을 꾸고, 끓어오르는 분노와 울분을 참을 수 없어 괴로워했다. 합법적인 방법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 것도 없는 암흑천지였다. 그럴 즈음 한 줄기 빛이 스며들었다.

  “1997년 한겨레신문에서 ‘법률문학상’을 공모한다는 기사가 났더라고요. <시민과 변호사>라는 서울지방변호사 회지에서 주최하는 문학상이었죠. 가작으로 당선되었는데 시상식에 가니 분위기가 이상했어요. 유시춘 씨가 심사위원이었는데, 그 후로 슬며시 공모전이 없어져버렸어요. 그래도 상을 타고 나니 다소 안정이 됩디다. 나를 표현함으로서 울분과 분노를 털어내고 긍정적인 생각도 갖게 되었죠. 지금도 난 긍정의 힘을 믿습니다.”

  숨 가쁘게 달려온 시간들이 절정으로 향해 달리고 있었다. 상기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뒤이어 2004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로부터 민주화운동을 인정받아 보상도 받고 나니 세상이 달리 보입디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하지만 사람을 업그레이드 시키더군요. 길거리를 다니면서도 ‘나는 행복합니다.’를 외치고 싶더라고요. 하지만……”

  순간 먹구름 한 점이 얼핏 지나갔다. 긴 호흡 끝에 면구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회사에서 받아야 하는 퇴직금을 국민의 세금으로 받은 셈이라 부채의식이 많습니다.”

 

시민운동도 조급증에서 벗어나자

지면 탓으로 소설의 대단원은 이쯤에서 막을 내리고 소설 후기로 들어갈 참이 되었다. 자연스럽게 참여연대 이야기로 들어갔다. 회원 가입 시기와 동기 및 참여연대에 기대하는 바에 대하여 여쭸다.

  “가입은 1994년으로 기억해요. 박원순 서울시장이 사무처장 때였으니까요. 그러다가 IMF로 빵집을 닫고, 아들도 산청 간디학교엘 보냈는데 초창기라 학비뿐만 아니라 기부금도 필요했어요. 적금, 보험금 다 헐면서 회원도 탈퇴를 했죠. 그러다 2007년 재가입 했어요. 앞서 말했듯이 민주화운동 인정을 받고 나니 부채의식도 있고, 그걸 갚은 길을 모색하다 다시 참여연대 문을 두드렸죠. 이번에 처음으로 MT를 가보니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도 많아 편안합디다. 회원 탈퇴로 서먹했던 분위기가 단박에 없어지면서 가까워졌죠. 가입 동기라면 시대의 흐름에 동참한 거죠.”

  빙그레 미소를 짓다 마지막 질문, 참여연대에 바라는 것에 대해 생각을 가다듬는 듯 했다.

  “아주 어려운 일이지만 민중 속으로 들어와서 민중과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합니다. 한발보다는 반발만 앞서고, 조급하게 굴지 말고, 활동가 중심에서 대중과 함께 할 수 있는 소모임 활동을 적극 펼쳤으면 합니다. 소모임을 통해 열성적인 회원도 발굴하고. 이 점이 미흡한 것 같아요.”

  조급증,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만성질환이 아닌가. 그 선두에 정권이 앞서서 엉터리 처방전을 내고 있다. 을사늑약과 맞먹는다는 한미 FTA에 대하여 시민들은 그 실체를 알기 시작했는데 정부는 조급증을 부린다. 1%를 위한 FTA인가. ‘별 너머 먼지’로 돌아가는 것이 인간의 삶이라고 ‘통큰 기부’도 하는데 고작 ‘재단 기부’로 꼼수를 부리니 어찌 시민들이 광장으로 나오지 않겠는가. 그가 거들었다.

  “밀실야합이죠. 비공개적이고 서두르는 것은 분명 그들만의 먹잇감이 있는 거죠.”

  촌철살인의 일침이요, 노동현장의 생생한 기억을 되살리는 죽비소리이다. 새해에는 희망을 감지하는 자동센서가 곳곳에서 작동하는 해가 되길 소망한다며 자리를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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