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1년 09월 2011-09-02   2042

참여사회가 눈여겨 본 일-“나는 너다, 함께 살자”

 

나는 너다, 함께 살자

“우리시대의 연대, 당위가 아닌 필연입니다”

 

 

황진미 영화평론가

 

지난 주말 서울에서 4차 희망버스 행사가 열렸다. 희망버스라니, 사실 1차 희망버스 제안을 접했을 때 ‘과연 몇 명의 시민들이 자비를 들여 부산에 갈까?’ 반신반의 했다. 그러나 연인원 2만 5천 명이 희망버스를 타고 부산에 모여들었고, 밤을 새워 희망을 나누었다. 어쩌면 희망버스는 이 시대의 ‘순례’ 같다. 영도는 바티칸이고, 85호 크레인은 대성당이며, 발코니(?)에서 손 흔들며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는 김진숙은 흡사 교황 같지 않던가? 많은 순례객이 김진숙을 알현하고 말씀듣기를 청하여 불원천리 노숙도 마다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내 속의 불안과 냉소와 무기력을 떨쳐버리고 열정과 의지로 충만한 마음을 나누어가지길 원해서가 아닐까.

 

“내 삶의 불안이 크레인 위 당신들과 공감하게 했다”

서울 중간계층의 40대 주부가 아이까지 데리고 3차 희망버스에 오른 현상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 표면적으로는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무작정 달리는 검프를 좇아 뛰던 사람들이 떠오른다. 미국의 80년대, 허무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진지함을 갈망하던 ‘뉴에이지 운동’ 같은 것 말이다. 그러나 김진숙의 농성은 검프의 달리기가 아니며, 희망버스는 뉴에이지 운동이 아니다. 당시 검프를 따라 자아를 찾으려 고행하던 미국 중간계층은 삶이 이토록 단조롭게 계속되리란 불안에 숨막혀했다.

  반면 희망버스에 오른 한국 중간계층은 티끌같이 남아있는 삶의 안정성이 언제고 파탄 나고 말리라는 불안에 휩싸여 있다. 신자유주의의 정리해고가 없었던들 김진숙은 동료의 죽음이 서린 크레인 위로 올라가지 않았을 것이고, 신자유주의가 전면화 시킨 삶의 불안정성이란 공통감각이 없었던들 서울의 중간계층이 희망버스에 연대하진 않았을 것이다. 85호 크레인의 김진숙은 90:10의 사회에서 90이 느끼는 불안과 공포의 표상이자, 그것을 이겨내는 승리의 표상이다. 이를테면 기독교에서 ‘십자가 위의 예수’처럼 고난과 죽음의 표상인 동시에 구원과 부활의 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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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중간계층이 해고노동자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느끼게 된 것을 단순히 ‘불안의 전면화’ 때문이라고 뭉뚱그려버리는 것은 추상적이다. 2008년 촛불시민들은 비정규직 문제에 연대하지 못했다. 광우병을 둘러싼 검역주권과 굴욕협상 등이 주요의제였고, 한미FTA, 교육, 4대강, 민영화 등으로 의제가 확대됐지만, 노동문제는 별로 이슈화되지 못했다. ‘MB OUT’은 쉽게 동의되는 구호였지만, ‘비정규직철폐’나 ‘정리해고반대’는 열린 광장에 숟가락하나 더 얹는 느낌의 구호였고, ‘신자유주의 반대’ 나 ‘노동해방’은 너무 나간 구호 같았다. 무엇보다 발랄한 촛불집회 분위기에 칙칙한 노조 조끼를 입은 아저씨들은 ‘구려’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2011년 촛불시민들은 기꺼이 영도로 달려가 노동자들과 함께 “해고는 살인이다”를 외친다. 2008년 촛불과 2011년 영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2008년 촛불은 여름과 함께 스러졌다. 스스로도 MB이후의 사회에 대한 상을 가지고 있지 못했던 촛불은 응답 없는 정부에 막혀 제 풀에 지쳤다. 이후 촛불을 둘러싼 논의가 분분했지만, 그때 우리가 무엇이었는지 알려주진 못했다. 다만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와 입술은 내 가슴에 남았다’는 시구처럼, 희미한 단상과 감흥이 우리 안에 남았다. 그때 무엇을 외치며 싸웠는지는 잊었지만, 여름밤 촛불을 켜놓고 둘러앉아 보았던 얼굴과 그들에게 건네받은 김밥의 맛과 밤공기의 온도가 ‘몸의 기억’으로 남았다.

  ‘이 사람들이 다 누구야?’ 촛불시민들 스스로도 의아해 하던 익명의 얼굴들, 이들은 각자 개인 이름으로 자신을 대의하고 있었다. 경찰도 가장 곤혹스럽게 느꼈던 ‘그들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이후 새로운 운동 주체를 논하는데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패션, 요리, 영화, 야구 동아리, 혹은 ‘도봉구에 사는 걱정 많은 사람들’ 등 각종 취미나 지역을 명기한 잡다한 깃발들은 오히려 그들의 정체를 오리무중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것만은 분명해졌다. 첫째, 이제 대의에 의해 조직된 정당, 조합, 사회단체가 운동을 대표하거나 매개하지 않는다는 점. 둘째, 자기 삶을 가꾸는 일상적 행위의 공동체가 어떤 이슈를 만나는 순간 운동과 결합하게 된다는 점이다.

 

용산에서 두리반으로

2008년 촛불이 물러간 자리에 신자유주의는 역습해왔다. 2009년은 용산참사로 시작되어 쌍용차 파업으로 이어졌다. 두 사건 모두 극한의 폭력과 처절함이 맞부딪힌 ‘시가전’이었고, 철저한 고립 속에서 결과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였다.

  건설자본에 의해 삶의 터전을 빼앗긴 상가세입자들이 생존권을 보장하라며 망루를 짓고 버티다 용역과 경찰의 강제진압으로 5명이 사망했지만, 사망자는 1년 가까이 장사를 지내지 못했고, 생존자들은 ‘도심 테러리스트’ 죄목으로 법의 심판을 받았다. 언론은 흡사 알카에다를 묘사하는 방식으로 ‘전철연’을 묘사했고, 시민들은 철거민의 처지에 동정하면서도 투쟁방식에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민주정권’ 10년 동안에도 철거는 계속되었고, 철거민의 곁을 지킨 사람들은 ‘전철연’밖에 없지 않았던가.

  기본골격으로 보자면 용산참사는 뼈아픈 패배이다. 진압과정의 폭력성과 재판과정의 공정성이 논란으로 제기되었지만, 결국 철거민들은 물론 용산참사 범국민대책위 위원장까지 징역형을 받았다. 그러나 가장 바닥을 친 패배로부터 새로운 싸움의 싹이 움트고 있었다. 

  2009년 4월 용산의 철거직전의 호프 레아에 사람들이 모였다. 촛불미디어센터와 촛불방송국을 열었다. 미술작업을 하고, 사진전을 열고, 공연을 하고, 영화를 틀고, 라디오 방송을 하면서 레아는 사람들이 북적이는 곳이자 예술가들과 활동가들의 살롱이 되어갔다.

  이 사람들이 다 누구인가? 짧게는 평택 대추리에서 보던 사람들이다. 미군 기지에 농토를 빼앗긴 농민들과 함께 “올해도 농사짓자”는 질박한 구호아래 벽화를 그리고, 설치미술을 하고, 공연을 벌이다 2007년 봄 그곳을 떠나온 사람들. 2008년 촛불아래 목례를 하며 스쳤던 이들이 2년 후 용산에서 재회했다.

  이들은 더 멀게는 새만금에서, 천성산에서, 이라크 파병반대 운동에서 만난 적이 있는 사람들이다. 소위 ‘민주정부’의 경찰곤봉을 맞아가며, ‘정권이 바뀐다고 대체 무엇이 달라지는가?’를 스스로 곱씹으며 단련된 사람들이다. 이들은 이명박 정권에 대한 반대나 선거에 일비일희 하는 정치공학적 접근으론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진즉에 알아버렸다. 섣부른 ‘진보의 희망’을 품느니, 차라리 ‘우린 안 될 거야’ 같은 체념으로 기묘한 급진성을 드러내는 이들은, 다른 방식의 삶을 욕망하지도 않거니와 선택할 수도 없는 ‘잉여’들이다.

  대의로써 투쟁한다기보다는 삶의 습속이 도무지 자본주의적 체제와 맞지 않기 때문에, 자기 욕망에 충실한 것이 바로 투쟁이 되는 아나키한 사람들. 레아는 그들의 인큐베이터가 되었다.

 

딴따라는 딴따라 방식으로! 삶이 된 투쟁과 승리

그해 12월 용산의 유족들이 가까스로 장례를 치르던 그때, 용산참사 때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상태로 또 하나의 용산참사가 일어나고 있었다. 건설자본은 용역을 시켜 홍대 칼국수집 두리반을 강제철거하고 펜스를 쳤다. 두리반 주인은 펜스를 뜯고 가게에 들어가 용역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공포와 싸우며 쪽잠을 자고 있었다. 2010년 1월 말, 레아의 활동가들이 두리반을 처음 찾았고, 2월 홍대 부근 인디밴드들이 두리반에 모여 공연을 시작했다. 이후 두리반은 매주 공연이 열리는 활력 가득한 장소가 되었고, 뒷마당에는 상추가 자랐다. 라디오 방송과 영어 강좌가 열렸고, 주중에는 밴드들의 상설 연습실이자, 주말에는 화끈한 춤판이 벌어지는 클럽으로 변신했다. 이곳은 항시 사람들로 넘쳐나서, 용역이 치고 들어오려고 짬을 봐도 도저히 할 수 없는 살아있는 공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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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리반 싸움에서 가장 크게 성장한 것은 청소년들이었다. 2010년 5월 1일 메이데이를 맞아 열린 ‘51+’ 파티에는 무려 3천 명이 두리반을 찾았다. 그때 자원봉사자나 관객으로 결합한 이들 중 절반이 청소년이었다. 하자센터에서 온 아이들도 있었고, 홍대 주변의 거리 문화가 좋아서 모여든 가출청소년도 있었다. 이후 두리반에서 먹고 자며 상근하는 청소년이 늘어났다. 이들은 청소년인권 조례청원운동에 열심이었다. 이들에게 두리반은 홍대 근처에서 잠 잘 수 있는 곳이기도 하고, 뮤지션들과 자연스럽게 만나거나 또래 청소년활동가들과 교류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들은 두리반에서의 활동을 자신의 삶에서 ‘일탈’로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입시로는 도저히 규정지을 수 없어 막막하던 자신의 현재와 미래에 어렴풋이 빛을 주었다고 말한다.

  홍대 인근은 인디밴드들에 의해 엄청나게 경제적 가치가 부푼 공간이지만, 정작 뮤지션들은 ‘성북동 비둘기’ 신세가 되어 쫓겨날 위기에 처해 있다. 두리반은 이들에게 연습실과 공연장을 제공했다. 그들은 ‘누군가를 위해 연대한다’는 거창한 의미보다는 자신들의 한 뼘 남은 삶의 공간을 지키고자 두리반에 깃들였다. 두리반 주인장 유채림 작가의 말처럼 ‘작가는 작가의 방식으로’, 딴따라는 딴따라 방식으로 싸우게 되었다. 삶과 투쟁이 분리되지 않고, 삶이 그대로 투쟁이 되는 것. 두리반 싸움은 그것을 보여주었다.

  500일이 넘는 버티기 끝에 두리반은 홍대 근처에 두리반과 비슷한 규모의 칼국수 집을 열게 해주겠다는 합의를 얻어내었다. 용산투쟁의 참혹함을 생각해 보았을 때,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합의였다. 건설자본은 500일 이상 공사가 지체되면서 감당할 수 없는 금융손실을 입었고, 세입자의 ‘생떼거리’에 굴복하고 말았다는 선례를 남기게 되었다.

  두리반 승리 이후, 이들은 다시 명동 마리에 결합해 있다. 마리는 새로운 난장이 펼쳐지는 발전소이다. 이를테면 ‘잡년행진’ 같은 프로젝트가 트윗에서 만난 사람들이 마리의 인력들과 유기적으로 결합하면서 급조될 수 있었다. 서울대 총장실을 점거한 학생들이 기획한 록 페스티발 ‘본부스탁’의 아이디어도 두리반과 마리의 인력들과 느슨하게 연계되어 있다. 이들은 구룡마을과 강정마을로 오가며 접속한다.  

 

쌍용에서 한진으로

두리반이 홍대의 거점이 된지 1년이 되었을 때, 홍대 청소노동자들이 대학본부를 점거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들은 최저임금도 못 받는 비정규직 하청노동자였다. 80년대 노학연대가 한창이던 시절에도 학생들은 학내 노동자에게 관심을 기울인 적은 없었다. 우리 곁의 노동자임에도, 그들은 늘 비가시적인 존재였다. 학생운동이 다 사그라진 21세기 대학에서 몇몇 학생조직이 그들의 처지에 관심을 기울였다.

  지금의 대학생은 80년대 ‘준지식인’으로서 지위가 없다. 대학생은 살인적인 등록금을 벌기 위해 뛰어야 하는 알바생이자, 장래 비정규직 노동자이다. 누구나 스펙전쟁에 매달리던 때도 있었지만, 김예슬 선언과 외교통상부 장관 딸 특혜사건을 거치면서, 알바와 휴학을 반복하며 졸업한 대학생들이 번듯한 정규직장을 얻을 확률보다 신용불량자가 될 확률이 높다는 것이 자명해졌다. 연애와 결혼과 출산을 꿈꾸는 것마저 사치가 되어버린 현실이 자각되었다. 평범한 대학생들은 자신이 바로 피할 길 없는 미래의 비정규직 노동자임을 서서히 인식했다. 물론 대학생이 단일한 계급에 속하는 것도 아니며, 단일한 계급의식을 지니는 것도 아니다. 홍대 총학생회처럼 자신을 학교 당국과 동일시하는 학생들도 있다.

 

“밥 한 끼 먹자”… 벽을 허문 운동과 참여의 물꼬

이들의 분열적 자의식을 드러내 보인 것이 배우 김여진의 행보였다. 김여진은 별다른 주장 없이 자주 농성장에 가서 밥을 먹으며, 총장이나 총학생회장에게 밥 한번 같이 먹자는 제안을 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이 핵심이었다. 밥 한 끼 같이 먹을 수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IMF 이후 쩍 벌어진 계급사회에서 이미 구분되어 있었다.

  SNS는 김여진의 주장에 공감하는 낯모르는 사람들을 한 무더기 만들어주었다. 이들은 ‘김여진과 날라리 외부세력’이라는 이름으로 홍대 노동자 파업에 동참했다. ‘날라리 외부세력’이라, 얼마나 화끈한 커밍아웃인가? 이후 김여진은 쥐벽서 사건, 반값등록금 등을 의제화하면서 시민들의 연대를 이끌었다. 김여진은 홍대 싸움에서 그랬던 바로 그 화법으로 ‘85호 크레인의 김진숙’과 대화했다. “저기 사람이 있다.” 이것은 용산참사에서 한진중공업 사태까지 계속 되뇌어지는 구호이다.

  쌍용 자동차 담장 안에서 77일 간의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지만, 협상 후 돌려받은 것은 복직을 기다리다 죽은 노동자와 가족 15구의 시신이었다. 공장의 바리케이드는 노동운동을 고립시켰고, 고립된 노동운동은 극한의 물리적 충돌로 치달으며, 시민들과 더욱 멀어지는 악순환을 낳았다. 한편 이들을 고립 속에서 죽게 만든 책임이 시민사회에도 있다.

  희망버스는 쌍용차 해고노동자 위로문화제를 하던 문화예술인들의 구상으로 출발했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밥이 나오고 프로그램이 나왔다. 김진숙의 크레인에 촛불 시민이 연대에 나선 이유는 더 이상 노동자들을 죽게 할 수 없다는 가슴시린 반성과 간절한 기도가 깃들어있다. 그들은 말한다. “우리가 왔다, 너무 늦은 것은 아닌지?”

 

“우리가 남이가?”

좁은 한국사회, 한 다리 건너 해고노동자가 있고, 두 다리 건너 철거민이 있다. 자본가가 아닌 이상, 누구도 해고와 철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는 미래의 해고노동자이고 철거민이다. 스펙 쌓기를 포기한 대학생들은 자신의 미래를 위해 비정규직 노동자 싸움에 연대할 수밖에 없고, 자식에게 집 한 채 물려줄 헛꿈을 포기한 사람들은 분배정의가 이루어진 사회를 물려주려 노력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혼자가 아닌 여럿이 함께하는 자기 계발이자 미래설계이고 재테크이자 노후대책이다.

  연대는 당위가 아니라 필연이다. 우리가 남이가? 나의 삶은 너의 삶과 너무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어서 도저히 남일 수가 없다. 나는 너다. 함께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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