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1년 07월 2011-07-06   1763

참여사회가 눈여겨 본 일-‘아픔의 공유’ 희망버스에 올라타다

‘아픔의 공유’ 희망버스에 올라타다

 

정문용 날라리닥터쓰  사진 최상천

 

나는 침묵했었습니다

 

처음에 그들은 유태인들을 잡아갔습니다.
그러나 나는 침묵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유태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그들은 공산주의자를 잡아갔습니다.
그러나 나는 침묵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엔 사회주의자를 잡아갔습니다.
그때도 나는 침묵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엔 노동운동가들을 잡아갔습니다.
나는 이때도 역시 침묵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노동운동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가톨릭교도들과 기독교인들을 잡아갔습니다.
그러나 나는 침묵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 내 이웃들이 잡혀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침묵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들이 잡혀가는 것은
뭔가 죄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은 내 친구들이 잡혀갔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나는 침묵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내 가족들이 더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은 나를 잡으러 왔습니다.
하지만 이미 내 주위에는 나를 위해
이야기해 줄 사람이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 에밀 구스타프 프리드리히 마틴 니묄러

 

 

“희망의 버스를 탑시다”

송경동 시인이 시작한, 한진중공업 해고 노동자들을 위한 연대 집회의 발걸음에 작은 용기를 내어 동참했다. 사실 난 촛불을 들어본 적도, 집회에 참가해 본 적도 없다. (한번, 부끄러워 차마 말할 수 없는, 2000년 의약분업과 관련해 내가 속한 이익집단의 이익과 관현된 집회에 참가한 적은 있었다.)

  삼삼오오 모여든 ‘자발적’ 시민들은 서울에서만 대형버스 10대를 채우고도 남았다. 수원, 평택, 전주, 광주 등 전국에서 700여 명의 사람들이 같은 마음으로 모여들었다.

  나는 아직 미혼이다.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기는 하지만 한평생 공무원이셨던 아버지는 퇴직 연금이 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시지는 않는다. 따라서 나는 내 수입을 혼자 소비하며 산다. 그런데 나는 혼자 먹고 살기에는 과한 수입이 있는 개원의사이다. 큰 걱정 없이 하루하루 살고 있으며, 앞으로도 큰 병에 걸리지 않는 한 별다른 걱정 없이 살 것이다. 솔직히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해고가 나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사실 거의 없었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인가, 그런 나의 삶에 대해 ‘죄스런 마음’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기독교인이지만 이웃의 아픔에 대해 외면했던 내 모습이 부끄러워졌고, 그러면서 조금씩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사회적 약자의 삶을 미약하게나마 들여다보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관심과 노력이 희망버스에 오름으로써 작은 발걸음이 되었다.

  방송인 김제동 씨는 반값등록금 촛불집회에서 “함께 행복해야 하기 때문에 이 곳에 왔다”고 말했다. 그렇다. ‘너’와 ‘내’가 행복한 세상. 그래야 ‘우리’가 행복한 세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날라리닥터쓰’, 희망버스에 오르다

6월 11일 토요일 오후 6시. ‘날라리닥터쓰’ 3명이 서울시청 앞 재능교육 교사들 천막농성장에 모였다. 서울 희망버스가 출발하는 곳이다. 1박 2일간 어떠한 일들이 펼쳐질지 몰랐지만, 우리는 ‘함께 행복할 수 있어야 ‘참’ 행복한 세상’이라는 마음으로 희망버스에 올랐다.

  ‘날라리닥터쓰’는 보건과 복지에 관해 공부하는 모임을 같이 하던 의사들 중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은 몇몇 의사들이 희망버스를 함께 타면서 시작된 모임이다. ‘김여진과 날라리 외부세력’에서 허가 없이(?) 이름을 가져다 쓰기는 하지만, 그들과 관련이 있는 모임은 아니다. 사회적 문제에 관심은 있었지만, 그것이 늘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았었는데, 이번 희망버스를 계기로 우리의 관심이 실천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부산까지 가는 길은 참 멀었다. 하지만 그 먼 길, 우리는 같은 마음을 나누면서 쉬지 않는 이야기들로 지루하지 않았다.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을 통해 부산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실시간으로 접하면서 근심 반 기대 반의 마음으로 부산대교(영도다리)에 도착했다.

  원래 다리 앞에서 하차한 후 다리를 건너면서 행진을 시작하여 한진중공업까지 갈 예정이었지만 경찰이 이미 다리를 막고 있어서 우리는 영도다리를 지나 버스에서 내렸다. 그리고 한진중공업까지 촛불행진. 경찰들과 대치가 이어지면서 행진은 더디었다. 결국 경찰이 한 차도를 내어주어 우리는 목적지인 한진중공업에 다다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곳은 이미 사측이 고용한 용역들이 정문을 가로막고 있었고, 우리는 정문을 통해 공장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 동쪽 담 쪽으로 갔다. 담 너머 크레인 위, 173일째(6월 27일 현재) 그 곳에서 외로이 싸우고 있는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의 모습이 보였다.

  차도로 행진하던 우리는 잠시 멈춘 후, 인도로 이동하였다. 우리가 인도로 이동하고 경찰이 차도로 물러난 사이, 내 키의 두 배가 넘는 담장 위로 얼굴을 가린 사내들이 올라섰고, 이내 사다리가 우리 앞으로 내려졌다. 사실, 얼굴을 가린 사내들, 무서웠다. 아군인지 적군인지도 몰랐다. 사다리에 올라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짧은 순간 망설였다. 괜히 넘었다가 연행되는 것은 아닐까, 들어갔다가 나오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밖에 있다가 적당한 때 봐서 갈까 하는 생각들로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하지만, 이내 나는 사다리를 오르고 있었고, 담을 넘어 공장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 사내들-한진중공업 노조원들이었다-의 진실한 눈빛이 나를 끌어올리고 있었다.

  60대 어르신들부터 10대 아이들까지, 우리는 한 마음이 되어 하나둘 그렇게 담장 안으로 들어갔다. 시민 500여 명이 한 마음이 되어 공장 안으로 들어갔고, 곧 공장 안쪽의 용역들을 노조원들이 몰아냈다. 약간의 물리적 충돌이 있었지만, 이내 공장은 노조원들과 시민들의 평화로운 공간으로 바뀌었다. 우리는 그 곳에서 밤을 새며 축제 같은 시간을 보냈다.

범법자가 된 ‘국민’, 일터를 잃은 ‘노동자’

사측은 우리더러 외부세력의 무단 불법 침입이라 했다. 경찰은 우리에게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의 집단 건조물 침입과 폭력행위,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의 해산명령 불이행 혐의를 적용하여 사법처리하겠다고 한다. 담 한 번 넘었는데, 현행법 두 가지에 저촉되는 범법자가 되는구나.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고, 학교의 주인은 학생이다. 그렇다면, 공장의 주인은 누구인가? 그들에게 묻고 싶다.

  공장의 주인은 바로 그 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다. 그들이 비록 지금은, 일방적으로 정리해고 당했지만, 엄연히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노동조합원들이다.

  우리는 외부 용역들이 우리의 길을 막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담을 넘게 된 것이다. 그 땅의 주인들이 내어 준 사다리를 타고 그 집에 들어갔을 뿐이다. 그런데, 그런 우리더러 불법침입이라니.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가 군함을 건조하는 방위산업체라서 국가보안 목표시설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 곳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은 국가방위산업의 역군들인데, 더 큰 이익을 위해 그들을 하루아침에 해고한 자들에게는 현행법이 왜 침묵하는가? 40여 년 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쓰러져 간 전태일 열사의 외침을 어찌하여 지금도 같은 울분으로 들어야 하는가? 쉽게 잠들지 못하는 밤은 그렇게 새벽으로 바뀌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다른 일정 때문에 먼저 공장을 나가 서울로 향하던 배우 김여진 씨와 시민 5명이 긴급체포되었다. 그 소식은 트위터를 타고 이내 우리에게, 그리고 그 곳을 지켜보고 있던 전국민에게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갔다. 곧 훈방조치 되었지만, 그 일은 ‘나도 연행되면 어떻게 하나’ 하고 잠시나마 근심했던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나의 신념으로부터 옳은 일이라는 확고한 외침으로 시작한 일인데, 아직 내게 닥치지도 않은 외압에 두려워하며 근심했던 내 모습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좀더 당당하고 떳떳한 ‘날라리닥터’가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이어진 마무리 집회에서, 해고노동자 자녀들이 부른 ‘아빠, 힘내세요’ 노래는 내가 들었던 그 어떤 노래보다도 슬펐다. 그 동요의 가사에 가족들의 아픔이 구구절절 전해졌다. 또 해고노동자의 아내가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을 땐, 많은 사람들이 눈시울을 적셨다.

 

희망은 이웃의 아픔을 느끼는 일에서부터 시작한다

“산 자는 누구나 죄인이었던 그 날 이후, 우리는 각자의 양심에 검은 리본을 달았었고 스스로에 대한 반성이란 것도 했습니다. 129일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목매달아 죽은 시신의 얼굴이 편안해 보였을까? 함께 하지 못했던 자책감에 몸부림을 했었고 우리 모두의 죄를 혼자 뒤집어쓰고 속죄한 재규 형 때문에 한동안 서로 눈을 마주치는 일조차 두려워했습니다.” (김진숙의 『소금꽃나무』 중에서)

 

  김진숙 지도위원이 35m 높이의 85호 크레인에 오른 것은 지난 1월 6일 새벽이었다. 85호 크레인은 2003년 당시 한진중공업 노조지회장이던 김주익 씨가 생을 달리 한 곳이다. 그리고 그 아래는 곽재규 씨가 몸을 던진 곳이기도 하다. 그들의 죽음은 조금 더 세월을 거슬러 올라 한 노동열사의 묘비에 다다른다.

 

“재벌의 나라에 가난한 노동자로 태어나 / 인간답게 살기를 염원하던 사람 / 폭압의 세월에 목숨 바쳐 ‘전노협’을 지키고 / 죽어서도 투쟁의 깃발 높지 않은 노동자 / 살아오라 열사여! / 천만 노동자의 가슴 속 노동해방의 불꽃으로” (노동열사 박창수의 묘비문 중에서)

 

  그들의 ‘아픔’은 이 땅의 많은 ‘아픔’들 중 하나이다. 그 ‘아픔’은 노쇠한 육체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픈 시대를 살아온 인생으로. 산업화 독재 정권에 착취당한 노동이고, 이른바 ‘성공한 쿠데타’에 짓밟힌 일상이며, 자본의 육중한 몸뚱이에 눌린 힘없는 인생들이다. 박창수, 곽재규, 김주익… 그들은 ‘노동열사’라는 이름으로 기억되는 ‘아픔’인 동시에,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의 ‘아픔’인 것이다.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은 ‘희망양말’을 준비해 돌아가는 우리에게 한 명 한 명 인사하면서 양말을 건네주었다. 양말을 건네받으면서 나는 차마 그들의 눈을 쳐다볼 수 없었다. 나는 떠나지만, 나는 편안하고 따뜻한 일상으로 돌아가지만, 그들은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이 싸움터에 다시 남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젠, 그들의 삶이 나와 아무 상관없는 이야기가 아니다. 나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이웃의 아픔이고, 그것은 곧 나의 아픔이다.

  1박 2일 동안 나는 그 곳에서 무엇을 하고 왔을까? 나는 왜 그 곳에 갔을까? 노조가 준비한 밥을 먹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함께 한 다른 사람들의 아픔에 귀 기울이고, 같이 자고, 같이 울고 웃고 소리 지르고, 같이 놀고. 그런데 언론은 우리를 범법자라 부른다. 말로만 듣던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자란다. 어쩌면 소환장이 날아올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이제 떳떳할 수 있다.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당당하게 서 있었기 때문이다.

  함께 행복할 수 있어야 ‘참’ 행복한 세상이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모든 행복. 그것은 또한 내게 남겨진 과제이기도 하다. 나는 오늘도 행복을 꿈꾼다. ‘너’와 ‘내’가 더불어 행복한 세상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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