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1년 12월 2011-12-05   3170

위대한 시민-박민영 씨

“우리는 한번도 촛불을 내려 놓은 적이 없다”

위대한 시민 – 박민영씨

 

글 강지나 「참여사회」 시민기자

 

위대한시민-박민영씨 ▶박민영씨

 

그녀는 인터뷰를 한사코 사양했다. 자신은 인터뷰하기에 적절한 사람이 아니라고 부끄럽다고 했다. 박민영 씨는 2008년 촛불 때 처음 집회에 참여하면서 세상공부를 했다. 방송을 보다가 무작정 기륭전자 농성장을 방문하기도 했고, 사람들과 함께 1년을 넘게 <독재신문>을 직접 만들어 배포하고, 각종 사회적 이슈에 대해 바자회를 열어 모금활동을 했다. 지금은 굴업도 환경문제를 위해 굴업도에서 거의 매주 문화행사들을 주최한다. 그녀는 시민단체 상근자도 아니고, 사회과학 이론으로 무장한 먹물도 아닌 그냥 ‘일반시민’이다. 도대체 그녀보다 더 적절한 인터뷰이가 어디 있단 말인가(^^).

 

개념녀들, 거리로 나오다

 

박민영 씨가 처음 집회에 나오게 된 데에는 가입되어 있는 온라인 카페의 영향이 컸다. 원래는 패션, 미용, 요리 등 여성들의 생활 속 관심사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카페인데, 정치적 이슈가 워낙 많고 우리 생활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보니 회원들이 거리로 나와 촛불을 들게 되었다. 사회문제에 관심이 없고, 외모나 쇼핑에만 관심 있는 여자들을 시쳇말로 ‘된장녀’라고 한다. 이런 온라인 카페 회원들이 촛불시위에 참여하는 것을 두고 보수언론들은 된장녀들이 거리에 나왔다고 비아냥거렸다. 하지만 그들은 미국산 소고기나 청소노동자, 재개발 등을 패션만큼이나 중요한 자기 생활 문제로 느끼고, 촛불집회를 공동체가 소통하는 축제의 장이라고 생각하는 이 개념 있는 여성들을 결코 이해하지 못했다.

  “이번에 한미 FTA반대 신문광고를 내는데 자발적으로 돈을 내고, 집회장에 빵을 가져와서 나눠주고, 특정 사기업 제품의 불매운동을 하는 등 꾸준히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회원들이 있다. 이들이 뭔가에 함께 참여할 수 있다는 열기는 여전히 뜨겁다.”   

  이들은 집회현장에서 자신들의 코드와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달했다. ‘4대강 하지마’라는 손세정제를 직접 디자인하고 제작해서 나눠주고, 물고기의 생명권을 보장하라는 내용의 물티슈를 제작하기도 했다. ‘기륭전자’, ‘언론악법 철폐’ 때는 바자회를 열어 수익금 전액을 투쟁현장에 전달했고, 평생 제대로 된 투표를 하자는 행동지침을 담은 ‘약속카드’는 이해찬 전 총리도 지갑 안에 넣어 가지고 다닐 정도로 대 히트였다.

 

괴담 진원지가 온라인 카페?

 

얼마 전 한 보수언론에서는 이런 온라인 카페를 괴담유포의 진원지이자 전문 시위꾼들로 지목했다. 뭔가 정형화되지 않은 채 들불처럼 번지는 민중의 힘이 무서웠던 것이다.

  “카페 이름이 거론되면 마치 운영자들이 선동한 것처럼 비춰져서 맘이 좋지 않다. 사실 얼굴도 모르는 회원들의 힘이고 SNS라는 소통구조가 만든 힘이다. 한번은 홍대 청소용역 아주머니들에게 스티로폼 깔개를 보내드리려고 제작업소 사장님 계좌번호를 트윗에 올렸는데, 순식간에 몇십만 원이 모였다. 돈에 맞춰 배달되어 온 깔개의 양을 보고 엄청 놀랐다. 그런데 그때 돈을 보냈던 얼굴도 몰랐던 사람들이 지금은 어느새 트친(트위터로 맺는 친구)이 되어 있더라(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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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담이란 원래 정상적인 의사소통구조가 차단되었을 때 입에서 입으로 전하며 상징적인 이야기를 통해 민중들의 억눌린 답답함을 해소하는 통로였다. 대부분의 알짜 정보가, 그것도 실시간으로 SNS를 통해 유통된다는 것은 현재 공식적인 의사소통구조에 큰 문제가 있다는 반증이다. 이것이 바로 이 시대의 진짜 무서운 괴담이다. 박민영 씨가 사람들과 만든 <독재신문>도 이런 소통구조에 대한 답답함에서 시작되었다.

  “2008년 12월 31일에 보신각 타종 행사에 수천 군중들이 모여 ‘MB OUT’을 외쳤는데, 기사에 한 줄도 나오지 않았다. 그때 뭔가 다른 활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대안언론’ 형식으로 <독재신문>을 만들었다. 모두 그냥 일반인들인데 직접 글을 쓰고 디자인을 하고, 만평도 그렸다. 구한말 <독립신문>을 패러디해서 만든 거라, 종이 질이나 판형(세로줄)이 독특해서 사람들이 많이 봤다. 2주에 1회씩 21회까지 냈으니까 꽤 오래 한 셈이다. 지금도 다시 만들고 싶어서 전자책형태로 내볼까 생각중이다.”

  이 신문 전에 7개월여 동안 만들었던 <犬찰 WHO>가 기존에 나와 있는 기사들의 짜깁기였다면, <독재신문>은 시민들의 창작물인 셈이다.    

 

MB효과가 공감과 연대정신으로

 

박민영 씨는 여러 온라인 카페 활동과 ‘굴업도를 사랑하는 문화예술인 모임’으로 바쁜 와중에도 정재승 교수의 ‘10월의 하늘-재능기부’에도 참여했다. 구미까지 내려가 아이들에게 유니버설 건축에 대해 얘기해준 것이다. 그 와중에 서울대 공익인권법센터가 여는 ‘NGO활동가를 위한 공개 강좌’도 듣고 있다. 지금도 마음이 동하면 기륭전자를 종종 방문하곤 한다. 물론, 본인의 생업인 건축디자인 사업과 대학 강의도 함께 병행하고 있다. 도대체 세상을 향한 이런 열정과 행동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MB 효과다. 그분 덕분에 세상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고, 그분 덕분에 2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한 직종과 배경을 가진 좋은 분들을 만났다. 용산 투쟁 때 폐점된 실내포차 하나를 근거지로 썼는데, 그때 거기서 사람들하고 <독재신문> 접고, 밥 해먹고, 팩차기 했던 기억이 참 좋았다. 살아있는 거 같은 느낌이었다. 그때 농담으로 ‘우리 5년 후에도 박00 반대하면서 이러고 있는 거 아닐까?’ 했는데 그 농담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시작은 ‘가카’ 덕분이었을지 모르지만, 그 열정이 식지 않고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은, 미대 다니던 시절 친하게 지냈던 청소 아주머니, 기륭에서 만난 노동자들, 굴업도에서 만난 주민들이 나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공감능력과 연대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들의 일이 곧 나의 일이고 내 가족의 일인 셈이다.

  박민영 씨는 2009년에 집시법위반으로 조사를 받다가 경찰들이 ‘촛불은 2008년 후반에 꺼진 거 아냐?’ 란 말을 하는 걸 들었다.

  “겉으로 보기에 촛불은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한 번도 촛불을 놓은 적이 없다.”
아마 저들에게 딱 맞는 괴담이 바로 이런 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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