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1년 05월 2011-05-11   1809

칼럼-섬

 

이태호 『참여사회』 편집위원장, 참여연대 사무처장

Solitude ⓒ V for Photography 작년에 일본에서 열린 국제토론회에 초청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토론 중에 무심코 “마치 섬처럼 외부와 단절되어 있다”라는 말을 했더니 통역이 고개를 갸우뚱하는 것이었습니다. 좌중을 둘러보니, 제 표현이 아무런 공감도 일으키지 못하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청중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일본인들은 ‘섬’을 사방으로 열린 공간으로 여길 지언즉 외부와 단절된 공간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었던 것입니다. 생각해보니, 동양과 서양 모든 문물에 개방적이었던 일본의 역사가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었습니다. 순간, 근거 없는 고정관념을 생각 없이 내뱉은 제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습니다.  

그제서야 뒤늦게 몇 해 전 필리핀 친구가 제게 해주었던 얘기가 떠올랐습니다. 그는 필리핀 전통 예절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 존중과 환대라고 알려주었습니다. 필리핀 사람들은 가급적 면전에서 얼굴 붉히는 말을 하지 않도록 교육받는다는 것입니다. 현재 오키나와로 불리는 옛 유구왕국1)의 전통도 비슷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참여연대 첫 공동대표 중 한 분인 오재식 선생은 태풍에 조난당한 중국의 상선들이 종종 유구에서 선박과 식량을 공급받아 귀향할 수 있었다는 얘기를 들려주시곤 하셨습니다.  
 
최근 비슷한 이야기를 중동문제에 관한 참여연대 아카데미 특강에서도 들었습니다. 아라비아 사막에 흩어져 사는 베두인들의 문화 역시 환대의 문화라는 것입니다. 적인지 친구인지 구별하고 환대하는 것이 아니라, 환대를 통해 친구가 되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거지요. 그렇지 않고는 사막에서 생존하기 힘들다는 겁니다.

어릴 적 영웅들의 전기를 읽은 이래, 문명의 역사는 곧 점령의 역사라고 생각해왔습니다. 하지만 섬들이나 오아시스에서 흔히 발견되는 환대의 전통은 문명의 바탕이 교류와 공존을 향한 노력에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반증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섬과 섬 사이에 바다가 있어서, 혹은 오아시스와 오아시스 사이에 사막이 가로 놓여 있음으로 해서, 그 곳의 사람들은 더욱 더 관계 맺기를 갈망하게 되었고, 그래서 섬과 오아시스들이 문명의 징검다리가 되고 나아가 다양한 문화가 만나 새로운 문화를 잉태하는 자궁같은 역할을 했을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전제가 필요합니다. 섬들이나 사막의 촌락들이 지닌 공존의 역사와 환대의 문화-예외적인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 오래도록 지속되어온-는 대체로 근대 이전까지만 유효하다는 겁니다. 이른바, ‘지리상의 발견’ 혹은 ‘대탐험의 시대’ 이후 섬들은 점차 교류와 공존의 공간이 아니라 점령과 쟁탈의 공간이 되어왔습니다. 특히 양차 세계대전과 냉전 이래 태평양의 섬들은 하나같이 군사기지 혹은 영토분쟁의 최전선이 되어버렸습니다. 하와이, 괌, 타이완, 오키나와, 사할린, 남사군도, 그리고 독도, 백령도, 연평도…….

오마이뉴스 ⓒ 유성호 태평양 전쟁 당시 일제는 제주도를 불침항모-침몰하지 않는 항공모함-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중국 상해나 남경을 폭격할 비행기가 급유 걱정 없이 이륙할 수 있는 천혜의 비행장을 만들고 섬 전체를 요새화했기 때문입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은 유황도와 오키나와 점령 이후 제주도를 점령할 계획도 가지고 있었다지요. 지금도 제주도 곳곳에는 세계대전과 냉전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서 주민들이 겪었던 처참한 고통의 흔적들이 생생하게 남아있습니다.   

냉전이 해체된 1990년대 초, 고르바초프 전 소련 서기장, 강택민 전 중국 국가주석이 제주도를 방문하자, 정부와 주민들은 제주도가 동북아시아 평화의 가교역할 같은 걸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상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제주도는 대개의 섬들이 그렇듯이 천혜의 자연환경과 온화한 기후를 지니고 있었고, 살벌한 국가안보 논리나 남북 간 대치로부터도 한 발짝 떨어진 입지조건이어서, 평화의 섬으로서 모든 조건을 두루 갖춘 것처럼 보였습니다. 제주도를 평화의 섬으로 선포하자는 논의는 급물살을 탔습니다. 이윽고 노무현 대통령은 2005년 제주도를 ‘세계평화의 섬’으로 지정하는 선언문에 서명합니다. 그런데, 2005년 제주도를 세계평화의 섬으로 지정하는 선언문에 서명하자마자, 노무현 대통령과 해군은 제주해군기지 건설계획을 확정하고 말았습니다. 이 기지는 ‘대양해군’의 전초기지로서 원유수송로 보호 같은 원거리 작전에 필수적이라는 것입니다. 제주도가 하와이의 진주만과 같이 ‘민군 복합형 관광미항’이 될 거라는 보충설명도 이어졌습니다.

현재, 제주도민들과 도의원 다수, 그리고 강정마을 주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해군기지 건설이 강행되고 있습니다.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의 일부이자, 절대보전지역으로 지정된 강정마을 앞바다에 3척의 이지스함과 잠수함, 그리고 미군의 핵잠수함과 항공모함이 드나들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중국을 비롯한 주변국의 위협으로부터 제해권을 지켜내기 위해서랍니다. 하지만 중국도 자신의 코앞에 최첨단 해군기지가 들어서고 미군의 핵잠수함까지 드나드는 것이 편안할 리 없습니다.

남이섬은 북한강이 실어온 모래톱이 만들어낸 작은 섬입니다. 이 섬이 TV 드라마로 유명세를 탄 이후 한국 관광객 외에도 중국과 일본의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옵니다. 여기에 착안한 주식회사 남이섬의 이사회는 입장권을 여권 모양으로 만들어, 가공의 공화국 ‘나미나라’에 입국하는 것처럼 꾸몄습니다. 거기서 세계의 시민들은 부조리하고 모호한 국가안보의 논리가 지배하는 현실세계를 잠시 떠나 강 너머 저편, 평화로운 현대판 ‘율도국’에 당도하는 간접체험을 합니다. 그들은 메타세콰이어 가로수 길을 비무장으로 거닐거나, 유니세프(UNICEF, 유엔국제아동긴급기금)의 전시관을 방문합니다.   

제주도는 그렇게 될 수 없는 것일까요? 제주도만큼은 다시 몰려오는 동북아시아 신냉전의 틈바구니에서 자유로운, 평화와 공존의 섬으로 남겨둘 수는 정말 없는 것일까요?

1) 유구왕국은 옛 탐라(현 제주도)와 지리적으로도 가깝고 문화적으로도 유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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