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5년 09월 2015-08-31   1100

[듣자] 운명은 이렇게 문을 두드린다

 

운명은 이렇게 문을 두드린다

 

베토벤 교향곡 5번 이야기

 

 

 

글. 이채훈 mbc 해직 PD
MBC에서 <이제는 말할 수 있다>와 클래식 음악 다큐멘터리를 연출했다. 2012년 해직된 뒤 ‘진실의 힘 음악 여행’ 등 음악 강연으로 이 시대 마음 아픈 사람들을 위로하고 있다. 저서 『내가 사랑하는 모차르트』, 『클래식, 마음을 어루만지다』 등 다수.

베토벤 교향곡 5번 C단조 Op.67

이 음악을 듣고 싶다면? 
유투브에서 Beethoven Symphony 5 Chung을 검색하세요. 
https://youtu.be/7WPQy7NsmUU (정명훈 지휘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관현악단)

 

음악은 개인의 경험과 얽힐 때 마음속 깊이 각인된다. 누구나 슬픈 사건, 아픈 추억과 함께 자연스레 떠오르는 음악이 하나쯤 있을 것이다. 나를 클래식으로 이끈 베토벤 교향곡 5번은 누나의 죽음과 연결되어 있다. 누나는 22살, 대학을 마치고 신참 기자로 일하고 있었다. 중학교 1학년이던 나는 누나의 갑작스런 죽음에 할 말을 잊었다. 그 때 누나가 남겨놓은 LP로 이 곡을 들었고, 삶과 죽음의 엄숙한 의미를 되새겼다. 이 곡은 운명처럼 나를 클래식 음악으로 이끌었다. 

참여사회 2015년 9월호 (통권 226호)

클래식을 전혀 모르는 사람도 몇 번은 들어보았을 “따따따따~~~~ 따따따따~~~~~~” 네 개의 음표로 시작하는 <운명> 교향곡이다. 이 주제에 대해 안톤 신들러Anton Schindler는 베토벤 자신이 “운명은 이렇게 문을 두드린다”고 설명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신들러는 베토벤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믿지 못할 소식통으로 악명이 높다. <운명>이란 제목을 쓰는 나라는 일본과 한국 정도이며, 유럽에서는 그냥 ‘교향곡 5번 C단조’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제자 페르디난트 리스에 따르면 베토벤은 빈 시내의 프라터 공원을 산책하다가 노란 촉새의 소리에서 힌트를 얻어 이 주제를 작곡했다고 한다. 지휘자 엘리엇 가디너는 프랑스 혁명에 참여한 농민들의 낙천적인 노래에서 따 온 주제라고 밝혔다. 모두 의미 있는 가설이지만, 어느 하나가 맞다고 증명하긴 어려워 보인다. 안톤 신들러의 설명은 이 곡을 소개하기에 무척 편리한 틀을 제공한다. <운명>이라는 제목을 ‘청각 상실’이라는 베토벤의 뼈아픈 운명과 연결해서 설명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6년 동안 앓던 귓병이 심하게 악화된 1802년 가을, 베토벤은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를 쓴다. 하지만 그는 자기 안에서 솟아오르는 예술을 꺼내놓지 않은 채 죽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자살을 포기한다. 이 유서에는 예술로 삶과 인간을 긍정하는 위대한 대목이 나온다. “불행한 사람들이여! 한낱 그대와 같이 불행한 사람이, 온갖 타고난 장애에도 불구하고 인간이란 이름에 값닿는 사람이 되고자 온 힘을 다했다는 것을 알고 위로를 받으라.”

교향곡 5번은 베토벤이 38살 되던 1808년, 인생의 정점에서 작곡했다. 그는 “운명의 목덜미를 쥐고” 삶을 긍정할 수 있었다. 세상의 소리를 듣지 못했기 때문에 오히려 깊은 내면의 소리를 음악으로 빚어낼 수 있었다. 따라서, 이 교향곡이 묘사한 운명은 그가 이미 극복해 낸 운명인 셈이다. 하지만, 그 운명은 얼마나 무섭고 끔찍했던가.

 

참여사회 2015년 9월호 (통권 226호)

<운명> 교향곡은 1808년 안데어빈 극장에서 베토벤 자신의 지휘로 처음 연주됐다.

 

1악장 ‘빠르고 힘차게allegro con brio’에는 ‘운명’의 동기가 끊임없이 나온다. 클래식에 입문할 때 피해 갈 수 없는 이 곡, 수고스럽지만 중요한 대목의 연주 링크를 확인하며 들어주시길 권한다. 맨 처음, 현악기와 클라리넷의 유니슨여러 악기가 똑같은 음정을 연주하는 것 이 두 차례 문을 두드린다. 대답을 기다리는 듯 숨죽인 패시지에 이어, 더 높게 문을 두드린다. 음악이 폭풍처럼 격앙되면 호른의 팡파레에 이어 부드러운 제2 주제가 나오는데, 이때도 운명의 동기가 낮은 음으로 흐른다. 승리를 예감케 하는 당당한 패시지가 운명의 동기와 어우러지며 제시부(소나타 형식은 대개 주제가 나타나는 제시부, 주제가 갈등하며 발전하는 전개부, 주제가 더 높은 차원에서 종합되어 결론을 이루는 재현부 등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가 끝난다. 

전개부에서는 호른이 운명의 동기를 통렬하게 연주하면 현악기가 그림자처럼 뒤따른다. (링크 2분 57초) 중학교 1학년 때 내게 가장 큰 충격을 준 대목이었다. 이제 운명과의 승부는 피할 수 없다. 문을 두드리는 횟수도 9번, 12번으로 점점 더 격해진다. (링크 3분 27초 부터) 숨 고르는 느낌도 잠시, 팀파니를 포함한 모든 악기가 힘을 다해 운명의 동기를 연주한다. (링크 4분 17초부터)

재현부, 오보에의 긴 솔로가 이어진다. 이 대목은 어린 내겐 끊길 듯 끊길 듯 이어지는 삶의 의지로 들렸다. (4분 32초 부터) 운명은 다시 문을 두드린다. 이번에는 미친 듯 두 손으로 번갈아 두드리는가 하면, 심지어 20번이나 연거푸 두드린다. (6분 00초 부터) 방 안에 혼자 있을 때 누군가 이렇게 문을 두드린다고 상상해 보라. 끔찍하지 않은가. 1악장 마지막 대목, 크레센도(점점 더 크게 연주하라는 뜻)에 이어 온몸의 무게를 다 실어 사정없이 두드릴 때에는 당장이라도 문이 박살날 것 같다. 생사를 걸고 냉혹한 운명과 씨름하는 베토벤의 모습 아닌가. 

이 곡은 추억에 잠긴 2악장, 신비로운 주술같은 3악장에 이어 승리의 함성이 폭발하는 웅대한 피날레로 이어진다. ‘고뇌를 넘어 환희로’ 가는 베토벤의 모토가 마침내 완성되는 것이다. 이 작품은 갈등과 투쟁을 지나 삶을 긍정하는 교향곡의 전형으로 브람스, 차이코프스키, 말러 등 후대 작곡가들에게 이어졌다. 

“운명이다.” 가혹한 현실 앞에서 주저앉고 싶은 유혹을 느낄 때, 운명이란 말은 나를 합리화해 준다. 그리스 비극에서 인간은 운명의 힘을 피해갈 수 없었다. 그러나 베토벤은 이 작품에서 불굴의 인간 의지가 운명을 이길 수 있다고 말한다. 운명의 힘은 강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존엄을 지키는 인간은 위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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