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6년 02월 2016-01-30   1796

[특집] 각자도생의 사회와 가족, 그리고 개인

특집_가족의 탄생

 

 

각자도생의 사회와 가족, 
그리고 개인

 

 

글.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

가족의 신화 
새해 벽두부터 아동 학대 뉴스로 나라가 떠들썩하다. 아버지와 동거녀에게서 학대 받은 11세 소녀가 먹을 것을 훔치다 잡히기도 하고, 부모에게 죽임을 당하고 몇 해 동안 시신까지 방치되어 온 초등학교 1학년생 살해 사건까지 발생했다. 다른 한편에선 재산을 물려받은 자식들이 노부모를 방치해 재산 반환 소송이 일어나는가 하면, ‘효 계약서’처럼 그동안 잊혀져온 전통 윤리(효)가 근대적인 계약 관계의 외피外皮를 빌리는 현상도 나타났다. 부모가 자식을, 자식이 부모를 버리거나 학대하는 사건들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런 인륜을 짓밟는 행위들은 역사상 늘 있어 왔다. 서구적 인간의 원형적 서사인 오이디푸스 신화나 우리에게 친숙한 설화 ‘콩쥐팥쥐’, ‘나무꾼과 선녀’ 등 동서양의 가족 이야기들은 비극적이거나 폭력적이거나 기만적인 인간관계를 여과 없이 보여주었다. 동시에 초인적 사랑의 화신으로서 어머니나 부계 혈연을 공유한 운명공동체로서 가족 역시 가부장적 사회에서 인간이 기댈 수 있는 마지막 울타리로 칭송되어 왔다. 

어떤 것이 가족의 진짜 모습일까? 가족사회학자들은 가족에 대한 오래된, 그러나 잘못된 신념을 ‘가족의 신화’라고 부른다. 신화, 즉 역사적 사실의 외양을 띠지만 현실을 바로 보지 못하게 하는, 그래서 현실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욕망을 억압하는 사회적 서사의 힘이 가족에서처럼 뚜렷하고 강력한 곳은 찾기 어렵다. 이런 가족 신화 중 하나가 가족은 개인의 합을 넘어서는 어떤 것, 사랑의 운명공동체, 가족구성원은 동질적인 이해관계를 지닌다는 가정이다. 

가족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 

그런데 이런 가족의 신화가 깨지고 있다. 가족의 가장은 아버지로서 그의 생각과 판단이 가족구성원의 견해를 대표하며 가족 모두에게 이로울 것이라는 통념이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었다. 사랑과 희생의 담지자로서 어머니 역시 더 이상 아이들을 위해 참고 살지만은 않으며 집을 떠나기도 한다. 자녀들은 결혼하고 자식을 낳아 키우는 부모세대의 생애과정을 따르기보다는 자기만의 삶을 살겠다고 주장하고 이런 저런 실험을 시작하고 있다. 

이런 변화의 양상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개인화’라고 할 수 있다. 가족의 신화로부터 벗어나 가족구성원들이 개인으로서 자신을 인식하거나 인식할 수밖에 없게 된 상황이다. 흔히 ‘개인화’라고 하면 개인들의 자기주장이나 이기주의와 같은 것으로 오해 받지만, 개인화의 원인은 두 가지 방향에서 찾을 수 있다. 

첫째, 근대사회의 도래와 함께 출현한 ‘개인’의 주체적 인식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근대사회에서 인간이 자기정체성을 획득하는 방편은 가족이나 친족, 종교, 지역, 국가 등 집단의 구성원으로서였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가家의 구성원으로 자신을 인식했고 가의 혈연적 계승과 번영을 사명으로 삼았다. 그러나 근대사회에서는 전통 집단들이 지닌 구속력이 와해 내지 약화되고 그로부터 분리된 개인들이 자신의 주체성을 주장하게 되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종교를 가지고 있고 가족과 친족을 중시하며 출신 지역에 대한 애착심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그 모든 집단들과는 분리된 존재로서 자신을 인식하고 집단의 구속성에서 자유로워지기를 갈망한다. 

둘째, 개인화의 다른 방향은 지난 20세기 말부터 분명해졌다. 신자유주의 경제체제가 전 세계를 지배하고 폴라니가 말한 ‘사회 보호’ 시스템이 무력화되면서 사람들이 자신을 보호해 줄 가족이나 사회 조직으로부터 떨어져 나오게 된 현상이다. 한국에서는 1990년대 말 외환위기 후 결혼율과 출산율이 저하하고 이혼율이 상승해 왔는데, 위험사회에서 가족을 구성하거나 꾸려나가기 어렵게 된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제 가족은 더 이상 가족구성원들의 안식처도, 울타리 역할도 못하게 되었고, 개인들은 스스로 알아서 자신의 생계와 운명을 책임지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참여사회 2016년 2월호

 

가족 대신 사회적 보호 시스템으로 
개인의 자기주장으로서 개인화와 홀로 자기 삶을 꾸려가야 하는 존재로서 개인화의 두 추세 중 한국사회의 개인화 현상에는 어떤 의미가 두드러질까? 사회 계층과 집단, 개인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1990년대 전반 소비사회의 등장과 함께 나타난 개성의 강조, 개인주의의 확산이 전자의 추세라면, 1990년대 말부터 진행된 경제위기와 가족의 약화는 두 번째 추세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지난 해 언론 지면에 자주 등장했던 ‘각자도생各自圖生, 제각기 살아 나갈 방법을 꾀함’이란 말은 한국사회에서 최후의 보루가 되어 왔던 가족이 더 이상 개인들의 울타리로서 기능하지 못하게 된 현실을 암시한다.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위험사회에서조차 위험의 분배는 고르지 않다는 것이다. 실업자가 될 위험, 도산할 위험, 빈곤에 처할 위험, 결혼하지 못할 위험, 심지어 자연재해의 피해를 입을 위험조차 개인들에게 동일한 확률로 주어지지 않는다. 개인이 처한 사회경제적 지위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 때 어떤 사회보다도 강력한 한국의 가족주의가 다시 등장할 수 있는데, 불안하고 위험한 사회에서 정치적·경제적·사회적 권력과 자원을 지닌 가족은 자신의 구성원들에게 더욱 막강한 울타리를 제공할 수 있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수저계급론’이 하나의 증거다. 가난한 가족에서 태어난 개인들은 노력해 봤자 별 수 없을 것이라는 절망감의 표현이다.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자녀의 지위에 강력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은 사회계층론의 고전적 명제인데, 왜 굳이 이 시점에 수저계급론이 공감을 얻고 있는가? 위험사회에서 가족이 더 이상 자신의 보호막이 되어 주지 못하는 중·하층 젊은이들이 겪고 있는 불안과 분노, 좌절의 감정이 그 배경일 것이다. 생애과정의 위험들에 홀로 맞서야 하는 개인들이 자신을 지켜주지 못하는 가족에 대해, 폐쇄적인 사회에 대해 느끼는 절망감이 확산의 동력이 되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 지 알 수 없지만, 당분간 가족은 사랑의 안식처나 거센 바람을 막아주는 울타리이기보다는 분노와 절망의 투사점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가족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대신 이제는 사회가 울타리 노릇을 고민해야 한다. 개인에 대한 사회적 보호 시스템을 재설계하고 강화해 나가야 할 때다. 너무 늦기 전에. 

 


 

월간참여사회 2016년 2월호
[특집] 가족의 탄생

각자도생의 사회와 가족, 그리고 개인 신경아
가족이 달라졌다 김유경
새로운 가족정책이 필요하다 송다영
차별을 거두어야 ‘가족의 다양성’이 보장된다 정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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