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6년 05월 2016-04-29   649

[정치] 세상을 바꾼  청년과 시민의 힘

 

세상을 바꾼 
청년과 시민의 힘

 

 

글. 김만권 정치철학자
소크라테스를 존중하여, 정치와 사회를 철학으로 풀어 평범한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은 거리 위의 정치철학자다. 시민들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가 함께 말을 나눌 준비가 되어 있다. <불평등의 패러독스>, <참여의 희망>, <정치가 떠난 자리> 등을 썼다.

 

 

변화된 정치구도
20대 총선이 끝났다. 뭔가 이상하다. 총선에서 내가 찍은 후보가 당선되고, 내가 찍은 정당이 의석을 얻었다. 처음 있는 일이다. 게다가 반드시 심판해야 한다고 믿었던 정치세력이 정말 심판을 받았다. 이런 일이 현실이라는 게 조금 믿기지 않는다. 물론 새롭게 만들어진 3당 정치 지형이 마음에 든다는 건 아니다. 그래도 어제보다 나은 오늘이랄까. 뭐 그런 느낌이다.

개인적으로는 귀국 이후 지난 3년간의 시간에 대한 피로감이 많이 사라졌다. 지난 3년, 나는 이 땅의 민주주의 위기를 말하고 싶었고 열심히 뛰어다녔다. 문제해결의 열쇠는 누가 권력을 잡고 있느냐가 아니라 권력을 위탁하는 사람들의 힘과 결정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많은 사람들이 비웃었다. “결국 정치는 엘리트가 하는 거야.” 총선이 끝나고 난 뒤, “내가 뭐 1당을 만들어 주었으면 할 일은 다 한 거지”라고 인터뷰하는 정치지도자가 있는 걸 보면, 겉으로야 국민의 뜻을 받들겠다느니, 어부지리니 하며 겸손을 떨어도 여전히 정치엘리트들은 자신들이 이런 변화를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참여사회 2016년 5월호 (통권 234호)

 

세상의 절실한 문제를 직접 마주하고 있던 사람들
하지만 지난 3년 불러주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어떻게든 찾아가며 느낀 것 하나는 이 세계의 바닥에서 끊임없이 변화를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는 것이었다. 내가 치열하게 산다는 맘으로 보낸 시간은 그분들이 헌신한 시간에 견줄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언제나 한결같은 문제는 그 고민을 진심으로 들어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말대로 준비되지 않은 것은 인민이 아니라 정치지도자라는 점을 머리뿐만이 아니라 가슴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마키아벨리가 원했던 “사람들 속으로 뛰어 들어가 그들과 하나가 되는 정치지도자.” 

 

이번 총선이 보여준 것은, 영도다리 위에서 자신의 고민을 보여줄 카메라 프레임을 찾는 지도자, 자신을 비례대표의 가장 앞에 스스로 공천하는 지도자는 있을지언정 이 땅의 사람들과 하나가 되고픈 정치지도자는 없다는 명확한 현실이었다. “우릴 찍지 않으면 선택의 여지가 있어?”라는 태도로 공천과정에서 국민을 철저히 무시했던 그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다. 정치지도자들의 얕은 수가 아니라 대한민국 사회의 밑바닥에서 진짜 현실과 마주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끊임없는 노력이 변화를 이끌었다고 말이다. 하기야, 그 분들이 이런 말을 귀담아 듣겠는가.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잔인한 현실 옆에서 세상의 고민을 해결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그 수많은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구조적 불평등에 당당히 맞선 청년세대들
20대 총선에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은 사람들이 또 있다. 바로 청년세대들이다. 이번 총선에서 20대의 투표율은 19대에 비해 13% 증가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청년세대들의 정치적 무관심을 비난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대학에서 지구적 불평등을 가르치며 20대 학생들을 현장에서 마주하고 있는 나는 그런 일방적 비난이 적합하지도 않을뿐더러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지금 청년세대의 정치적 무관심은 1980년대 이후 지구적 맥락에서 형성된 구조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청년들을 욕하기 전에 청년들의 현실을 함께 마주하고 그것에 공감하고 함께 있자. 청년들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지구적 불평등 현상을 추적하는 가운데 목격했던 샌더스와 코빈 현상을 통해, 그리고 스페인의 아호라 마드리드 사례를 통해 얻었던 나 나름대로의 결론이었다. 그래서 정치철학자라는 원래의 직분에 어울리지 않게 샌더스를 앞세워 그리고 코빈을 앞세워 몇몇 팟캐스트와 방송에 출연하기도 했고, 내 전공분야도 아닌 미국 대선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여기저기 힘닿는 대로 글도 썼다. 

핵심은 샌더스도 코빈도 , 미국 대선도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샌더스를 만드는 청년들, 코빈을 만드는 청년들, 아호라 마드리드를 만드는 청년들이었다. 우리 청년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대들과 같은 맥락의 불평등을 당하는 세계의 청년세대들이 이렇게 스스로 움직이고 있다.” 그게 내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의 전부였다. 그 메시지를 들은 젊은 세대들이 미래를 위해 무엇을 할지 스스로 결정할 것이라 믿었다. 청년들을 위로한답시고 ‘88만원 세대’와 같은 비참한 이름을 붙여주는 대신, 스스로 자신에게 이름 붙일 수 있는 세대가 될 수 있다고 격려해주고 싶었다.

 

청년세대들이 스스로 결정한 미래의 시작
19대 총선에서 불과 몇 백표로 당락이 결정된 곳이 많았는데, 20대 총선에서 13% 늘어난 청년세대의 투표율은 그 차이를 뒤집는 데 꼭 필요한 만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 총선이 갖는 의미 중 하나는 우리 청년 세대들이 참여의 힘을 믿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다는 점이고, 이것이 청년세대 스스로 결정한 미래의 시작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나는 청년세대들이 자랑스럽다. 청년세대들이 이 경험을 통해 참여의 힘을 더욱 신뢰하고 정부와 권력을 향해 자신에게 필요한 것들을 당당히 요구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물론 나 역시 청년들과 그 일을 함께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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