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6년 06월 2016-05-30   2764

[특집] 국민국가와  국민의 두 얼굴

특집2_고장 난 나라, 빗나간 애국

 

국민국가와 
국민의 두 얼굴

 

 

글. 전주희 수유너머N 연구원

 

 

‘신의 이름으로 왕이 지배하던’ 국가는 근대와 함께 국민국가의 형태로 극적인 전환을 맞이한다. 국민국가의 사전적 정의는 “공통의 사회, 경제, 정치생활을 영위하고 공통 언어, 문화, 전통을 지닌 국민공동체를 기초로 하여 성립된 국가”다. 그런데 이러한 정의는 동어반복적이다. 국민국가란 국민공동체다. 국민국가란 국민들로 구성된 국가다. 국민국가의 정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국민에 대한 정의가 덧붙여져야 한다. 그런데 공통의 언어, 문화, 전통을 공유하는 것이 반드시 근대 이후에 성립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국민은 대체 어떤 존재인가? 근대 이전, “짐이 곧 국가다”라고 호기롭게 선언했던 ‘태양왕 루이’에게 국민들은 없었던 것일까? 물론 왕의 영토에서 거주하며 살아가는 인간들은 존재해 왔다. 우리는 이들을 신민 혹은 백성이라 부르지만 국민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국민이라는 인간은 언제 출현하게 된 것일까? 

 

국민국가의 탄생
영국의 정치철학자 홉스는 『리바이어던』에서 봉건적인 권력이 아닌 시민적 권력을 통해 구성되는 새로운 국가 모델을 상상했다. ‘리바이어던’은 성서에 나오는 바다괴물이다. 『욥기』 41장에는 “지상에 더 힘센 사람이 없으니 누가 그와 겨루랴”는 문구로 리바이어던의 강력함을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이 괴물의 몸은 대략 300여 명의 인간들로 채워져 있다. 국가를 왕의 신체이자 정신으로 사유했던 중세시대와 가장 난폭하게 단절한 이 역사적인 이미지는 근대국가가 왜 국민국가로 불리는지를 알게 해 준다. 

통상 영토, 주권, 인민을 국가의 3요소로 꼽는다. 리바이어던이라는 바다 괴물은 인민들로 구성된 주권을 상징한다. 그리고 바다 위로 솟아 그가 통치할 대지를 향해 우뚝 서 있다. 홉스는 국가를 마치 부품들이 결합해 하나의 거대한 기계처럼 상상했다. 이 ‘인공기계’ 혹은 ‘인공신체’가 홉스가 꿈꾸는 새로운 시대의 국가다. 

그런데 어떻게 이처럼 다양한 인민들이 국가라는 하나의 신체가 될 수 있었을까? 홉스에게 답은 명확하다. 그에게 인민은 다양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인민은 ‘만인은 만인에 대해 전쟁상태’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타인에게 공포를 느낀다. 이 공포라는 정념은 근원적으로 해소되지 않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생명의 안전’을 위해 절대적인 권력에게 자신의 권리를 양도한다. 절대적인 주권자에게 양도는 필연적이므로 국가가 정당화되고 국가에 대한 자발적 복종은 의무가 된다. 계약의 파기란 없다. 그것은 곧 국가의 죽음과 내전의 개시를 의미한다. 따라서 내란은 국가라는 단일한 신체에 자라난 종양이므로 마땅히 제거되어야 한다. 홉스에게 대중은 새로운 국가를 구성하기 위해 고른 ‘재료’ 였다. 하지만 완벽하게 통제될 수 없는 공포 그 자체이기도 했다. 따라서 ‘사회계약’이라는 말의 힘을 보충해줄 강력한 칼의 힘을 필요로 했다. 

홉스가 구상한 국민은 자신의 의지와 판단으로 국가를 구성할 수 있는 주체로서의 국민이 아니다. 그들은 이미 리바이어던이라는 국가의 몸에 귀속되어야 하는 무지한 국민이자 위험한 군중으로 남아있어야 했다. 

 

참여사회 2016년 6월호(통권 235호)

 

국민은 만들어진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종종 날카로운 칼의 힘 사이로 유유히 빠져나오는 말이 갖는 힘이 있다. 탱크와 총검 사이로 빠져나온 광주의 소문이 그랬고, 거친 파도 아래 침몰한 진실을 인양하기 위한 집요한 탐문이 있다. 그래서 국가는 늘 소문이 갖는 말의 힘을 통제하고 싶어한다. 홉스처럼 말의 힘을 칼의 힘으로 제압하는 것이 아니라면 통치자는 ‘말하는 입’을 통제해야 한다. 이 말하는 입에 대한 통치야말로 근대국가에서 국민이라는 주체화의 본질을 설명해준다. ‘자유롭게 말하되, 하나의 입으로 말하게 하라.’ 이것을 우리는 넓은 의미에서 내셔널리즘nationalism이라고 말할 수 있다. 

프랑스 철학자 에티엔 발리바르에 따르면 내셔널리즘은 국민 혹은 국가로도 번역되는 ‘nation’이라는 물질적 조건하에서 작동하는 이데올로기다. 그것은 통치자들의 통치이념이 아니라 국민들에 의해 승인되고 체험된 경험으로 각인되어야 하는 것이다. 태극기, 무궁화, 국기에 대한 경례 등은 ‘국민화’를 위한 국가적 의례다. 예전에는 국민학교로 불린 초등학교를 비롯한 교육제도는 인간을 국민으로 재생산하는 제도다. 

홉스와 달리 루소는 칼의 힘보다는 말하는 입에 주목했다. 그는 『사회계약론』에서 근대국가의 주체인 인민의 문제를 날카롭게 제기했다. “인민이란 왕을 선출하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그로티우스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인민이 왕을 선출하는 행위를 검토하기 전에, 인민이 인민으로 되는 행위를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루소가 말하는 인민은 태어남을 의미하는 나티오natio, 즉 자연적 인간이 아니다. 그는 정치적 시민인 국민nation을 발견하였으며, 국민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것을 간파했다. 

 

국민과 국민들
여기에서 국민국가와 국민 사이의 기묘한 간극이 발생한다. 홉스처럼 국민과 국민국가는 단일하게 설립되는 것이 아니다. 국민국가 설립 후에도 여전히 국민화의 과정은 지속된다. 다시 말해 국민화의 회로는 늘 재생산되어야 하며 이는 언제나 불완전한 것이다. 즉 국민국가와 국민은 불일치의 가능성을 포함한 채 관계 맺는다. 국민이라는 단일한 주체는 오로지 자기 속에 몰입하는 주체다. 이를 위해서는 타자를 향한 상상력이 절단되어야 한다. 절단된 자리에서 권리는 책임으로 바꿔치기 되며 국가는 국민에게 책임을 묻는 자리가 된다. 

하지만 국민은 늘 국민들이다. 태극기를 든 손은 때로 탱크에 맞선 저항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국민들의 입으로 말해지면서 때로 국가의 단일한 시스템에 차이를 가져오기도 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촛불집회 때 불린 노래는 단일한 국민이 아닌 국민들의 입으로 나와 국가라는 시스템의 내부를 뒤흔들기도 한다. 

그런데 이는 홉스가 걱정했던 국가의 죽음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국가 역시 하나의 생명체라면 이 생명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타자들이 침입하여 생명 그 자체를 다양하게 변화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근대사회의 또 다른 발명품인 인민 민주주의, 인간의 복수성에 대한 정치적 긍정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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