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8년 01-02월 2018-01-03   2239

[기획] 서촌역사기행3 – 서촌, 근대를 넘어

서촌역사기행 3

서촌, 근대를 넘어

글.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  

 

 

조선왕조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과정을 서촌은 또렷하게 관망할 수 있었을 것이다. 타의와 자의로 변화된 현실 속의 대한제국 아래 서촌 역시 급격한 도시변화가 일어난다. 경복궁 옆이라는 지리적 이점으로 터를 잡았던 사대부 집안의 대저택이 사라지고 분할되어 작은 형태의 한옥과 집단주거지 형태의 상업적(집장사) 한옥 건축이 발생한다. 이 시기 서촌은 지방에서 서울로 유학, 이사, 구직 등의 필요에 의해 많은 서민들이 이주하게 된다. 서울에서 오랫동안 산 토박이들과 서울로 이주한 주민들이 혼재된 삶의 방식이 나타나는 것이다.

 

한편 일제는 일본인들로 하여금 조선 땅은 엘도라도(El Dorado,낙원)라는 인식을 심어주며 일본인 이주정책을 펼치게 된다. 철도, 광업, 은행업, 어업, 농업 등 모든 분야에서 일본인들의 이주를 독려하며 당근을 제공한다. 즉 철도를 건설하며 자본과 노동력을 착취하고, 한편으론 수탈을 용이하게 하였다. 광업권을 가져가서 조선 땅 곳곳을 파헤치고 수탈해갔다. 근대적 은행업도 최대 주주는 일본인들로 조선의 자본까지 독식했으며, 독도의 강치 멸종사에서 볼 수 있듯이 돈이 되는 어업권은 일본인의 손에 들어갔다. 질 좋은 쌀 수탈은 말로 표현할 수 없겠다. 

 

이러한 수탈과정에서 일본인들은 그들만의 거주지를 형성했는데, 지금처럼 명동 회현동이 일본인들의 영역에 들어간 이유는 종로처럼 구 도심권은 아직까지 조선인들의 자본과 힘의 영역에 있기에 명동 쪽이 그만큼 저항이 덜 했기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 이후 사직단의 변천사 

또한 서촌부터 서대문, 아현동일대에 광업, 철도, 은행업, 증권 등 상업경제인들의 거주지를 형성하면서 경복궁 옆 효자동 백송 주변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 직원들의 관사가 들어오면서 한옥들을 몰아내기 시작한다. 관사에는 고급관리들의 저택이었던 칙임관(勅任官)① 저택과 일반 직원들의 주임관(奏任官) 건물들로 나뉜다. 현재도 칙임관 건물 한 채와 주임관 건물 수십 채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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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척식주식회사 칙임관 관사 ⓒ황평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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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동 동양척식주식회사 주임관 관사 ⓒ황평우

 

사람들이 많이 모이다 보니 당연히 교육시설이 필요했다. 일제는 필요한 공간이 부족할 때 조선왕실의 재산과 토지를 이용했는데 이용이라기보다는 강제 처리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조선왕조는 건국과 동시에 사직(社稷)과 종묘(宗廟)를 세웠다. 종묘는 조상에게 감사하고 조상들로 하여금 후손을 지켜달라는 의미이며, 사직은 전통적인 농경국가였음을 알 수 있는 곳으로, 이에 따라 땅 신과 농사를 관장하는 신에게 항상 농사가 잘 되게 해달라는 기원을 올렸던 곳이다. 즉 조선에서 종묘와 사직은 정권의 안위인 위계질서와 최대의 산업인 농업에 대한 국가적 예의와 중요성을 알 수 있는 곳이다. 

 

그런데 일제는 종묘와 창덕궁의 맥을 끊어버리고 필요하다는 이유로 도로를 내버렸다. 현재 후손들은 이 도로를 연결하기 위해 무진 고생을 하고 있다. 또 사직단을 이리저리 도려내서 공원처럼 놀이 공간을 만들어 버렸다. 또한 반드시 일제가 행한 행위라고 볼 수 없지만, 1895년 공립 보통학교인 매동초등학교를 세운다. 일제는 1920년 사직단 뒤 언덕에 우리나라 최초의 공립도서관인 종로도서관을 세운다.

 

배화여고도 마찬가지다. 근대 시기 여성교육이 필요했는데 1898년에 개교한 후 1916년에는 생활관도 지었는데 이 건물은 근대문화재로 등록되어있다. 이 건물은 원래 선교사들의 숙소였다. 붉은색 2층 벽돌집에 기와지붕을 얹은 모습, 정면 가운데 현관 바로 위에 발코니를 꾸민 모습이 이색적이면서 아름답다. 20세기 초 서양 선교사 숙소 건축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는 건축물이다. 사직단! 패망한 조선에서 백성을 생각했다는 권력자들의 자기만족이라고 비하할 수도 있겠으나, 종묘와 사직은 한 국가의 자존심과 같은 공간이었다. 이러한 엄숙한 공간을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파괴한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배화여고

배화여고 생활관 ⓒ황평우

 

도서관

사직단 터를 침범한 옛 사직동팀 건물. 현재 어린이도서관 ⓒ황평우

 

사직단은 권위주의 정권 때는 청와대 민정실의 부속기관인 사정기관으로 있으며 온갖 폐악질을 다했었다. 이른바 ‘사직동팀’은 온갖 권력의 잔심부름을 맡았던 곳인데 2000년 김대중 정부 때 폐지되었다. 사직동팀이 사용하던 건물에는 현재 ‘어린이 도서관’이 자리하고 있다. 이 건물터도 사직단 경내에 들어가 있는데, 사직단을 복원하며 지역주민들과 갈등이 있었다. 사직단 복원 전에 어린이 도서관의 새로운 자리를 먼저 만들고 사직단을 복원한다고 했으면 갈등이 없었을 텐데 문화재청, 서울시, 종로구의 안일한 태도가 아쉬울 뿐이다.

 

근대 예술가들의 산실, 서촌

또한 서촌은 화가 이중섭이 가족을 그리워하며 작품 활동을 했다고 추정되는 곳과 시인 윤동주가 연희전문을 다니며 잠시 하숙했던 집도 존재한다. 초현실주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건축가 이상(1910~1937)과 행적과 작품에 논란이 있는 시인 모윤숙, 한국화가 이상범(1897~1972)의 집과 작업실도 서촌에 있다. 옥인동에는 한국화 분야의 원로 박노수 화백의 가옥이 남아 있다. 박노수 가옥은 1937년 지은 한옥과 양옥의 절충형으로, 벽돌로 지은 1층은 온돌 마루 응접실 등을 두어 프랑스풍으로 꾸몄고 나무로 지은 2층은 마루방 구조로 만들었다. 현재 이 짐은 종로구청에 기증되어 미술관으로 일반 시민을 맞이하고 있다. 이처럼 서촌은 조선조의 문화유산과 근대의 문화예술인들이 기거하거나 칩거하며 작품 활동을 한 산실이기도 하다. 

 

해방 이후 친일파의 거두 이완용과 윤덕영은 서촌의 지세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하여 이곳으로 이주해왔다. 친일파 이완용이 700평이 넘는 대저택을 지었고 현재는 양옥이 건축되었는데 부지면적은 그대로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서대문 “독립문”의 현판은 이완용의 글씨다. 즉 중국의 예속하에 있던 조선이 독립하라는 의미로 친일파인 이완용이 독립문 건설에 가장 돈을 많이 내서 쓰게 되었다고 한다. 친일파 윤덕영이 건축했던 프랑스형식의 대저택은 1975년까지도 존재했으나 도로 건설과 화재로 철거되었다. 다만 윤덕영이 딸의 집으로 건축했던 한옥과 일식, 서구양식이 결합한 집을 현재 화가 박노수가 소유했었다.

 

친일파 윤덕영의 집터는 현재 서촌의 20% 이상(옥인동의 50%) 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대저택이었다. 후손인 윤평섭 씨가 당시의 증언을 바탕으로 제작한 도면을 보면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다. 

 

윤평섭

1940년대 윤덕영 저택 ⓒ윤평섭 

 

윤덕영

사친일파 윤덕영은 옥인동당의 절반을 매입해서 송석원 터에 벽수산장이라는 대저택을 꾸몄다.

 

대저택

옥인동 윤덕영의 대저택 ⓒ김영상(서울 육백년)

 

소통의 공간, 통인시장과 마을 정자

시장은 옛 우리말로 ‘저자’라고 한다. 삼국시대부터 시(市), 시사(市肆), 장시(場市) 등의 용어로 기록되었고 시장이라는 말은 사용되지 않았으나 19세기 말 개항기부터 ‘시장’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고 널리 사용되면서 오늘날 ‘시장’이라는 말로 자리 잡았다.

 

시장은 사람들이 모여서 갖가지 물건을 사고파는 공간으로 일상에서 매우 중요한 생활 부대이다. 흔히들 ‘재래시장’이라고 폄하하는데, 이는 현대의 대형쇼핑몰과 백화점이 등장하며 만들어진 전통에 대한 부정적인 의미다. 오히려 요즈음은 백화점이나 대형 마트도 매장 안에서 왁자지껄 호객 행위를 하는데 이는 전통시장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는 것이라고 본다.

 

시장의 핵심 기능은 유통과 교환이다. 그 대상은 물자에 국한되지 않는다. 시장은 한 날 한 장소에 사람들이 모이므로 여기에서 인적 교환과 정보 교환이 이루어진다. 그것은 각자가 가지고 있던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이와 같은 소통으로 인해 새로운 인간관계가 형성되기도 한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므로 장터는 언제든지 축제의 장소로도 이용된다. 또한 씨름대회, 윷놀이 등과 같은 이벤트가 열리기도 한다.

 

서촌의 ‘통인시장’은 언제 개장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구전(口傳)으로 전해오기로는 17세기 서촌에 형성된 양반과 중인들이 생활부식과 의료제인 한약을 매매하면서 형성된 상설시장이라는 설이 가장 있다. 일반적으로 장은 3, 5, 7일을 기준으로 서지만 한양에는 육의전과 같은 시전이 연중 개설되었다. 육의전까지 갈 수 없는 틈새를 이용해서 통인시장이 형성된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 초기는 한양에 인구가 증가하며 성내 여러 곳에 매일장이 형성되었는데 관철동과 장교 일대인 장통방(현재 청계천 입구)에 큰 시장이 형성되었고 도성 내 문 인근에는 장이 형성되었는데 통인시장 인근에는 4소문의 하나인 창의문이 있어 세검정, 구기동, 고양군 일대에서 도성으로 진입하는 통로이기에 시장이 존재했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조선 시대 장의 점포는 지붕만 있고 벽이 없는 긴 집(場屋,장옥)에 자리를 잡고 물건을 팔기도 하며 공터나 길가에 자리를 잡고 파는 영세 노점상이 있었다. 세는 한 달에 한 번 내는 장옥세와 매 장마다 걷는 노점세가 있었는데 노점세가 더 비쌌다.

 

통인시장은 현재 장옥 형태에서 각 점포마다 독립공간에 매장이 존재하는데 이는 근대 이후 개인주택과 점포들이 들어섰기 때문이지만 긴 통로를 이용해 시장이 형성된 것은 전통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전통시장은 현대의 대형마트나 백화점처럼 기계적이거나 형식적이지 않다. 기본적으로 사람과 사람이 나누는 감정이 있다. 이를 소통이라고 말하며, 인위적이지 않다. 시장에는 사람이 모이고 거래가 있고, 흥정이 있다. 돈은 벌지만 매정하게 벌지는 않는다. 서양에도 시장은 있다. 그러나 그들은 앉아서 음식을 사먹거나 나누지 않는다. 나눔이 있다는 것도 서양시장과 우리 시장이 다른 점이다. 시장은 일방적인 상품의 거래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 나눈다는 차원에서 본다면 소통의 인간미가 있는 곳이다. 

 


① 조선 말기 관료의 최고 직계, 현재 기준으로 장차관급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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