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8년 11월 2018-11-01   910

[만남] 맑은 얼굴 하나 – 정경록 회원

맑은 얼굴 하나

정경록 회원 

 

월간 참여사회 2018년 11월호 (통권 260호)

 

인터뷰를 하러 가면 대부분 낯선 얼굴이 앉아 있다. 한 시간 남짓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온다. 컴퓨터를 켜고 자판을 꾹꾹 눌러가며 흰 여백 위에 한 사람을 그려낸다. 가끔 인터뷰가 크로키와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 짧은 시간 내 인물의 특징을 재빨리 포착해내야 하는 작업. 인터뷰와 크로키 모두 단순하고 요약적이며 그래서 최종적 판본이 되긴 어렵다. 어떤 대상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게 도와주는 것, 인터뷰는 완벽한 이미지를 구현해 내기 위한 밑그림일 뿐이다.  

그녀를 그리기 위해 단어들을 꼽아본다. 연필, 거북이빵, 목욕 바구니 그리고 맑은 얼굴 하나.

 

순진한 교회 언니 

그녀를 만나러 가기 위해 KTX 열차를 탔다. 기차가 멈춰선 곳은 천안역. 그녀는 이곳에서 천안돌봄사회서비스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상고를 졸업하고 무역회사에서 일한 게 첫 사회생활이었어요. 근데 일을 하다 보니 너무 재미가 없는 거예요. 일한 지 1년 된 저나 10년 된 직원이나 똑같은 일을 하고, 고민 끝에 늦은 나이에 다시 사회복지학 공부를 시작했죠.”

 

‘사회복지사=힘든 일’이라는 공식이 머릿속에 박혀 있는 나는 무식한 질문을 던진다. 왜요?

“착하게 살고 싶은 마음, 그게 다였어요. 그땐 순진한 신앙을 가진 청년들이 ‘나는 좋은 일 하면서 살 거야.’라는 단순한 생각으로 많이들 사회복지사가 되곤 했으니까.”

 

그럼 혹시 ‘교회 언니’였어요?

“하하하 네. 열심히 교회 다니는 언니. 어렸을 때 그냥 동네 교회에 갔는데 마침 굉장히 진보적인 곳이었어요. 그 선택이 두고두고 제 인생에 많은 영향을 미쳤죠.”

 

천안행 KTX를 타기 위해 서울역에 도착했을 때 한 무리의 개신교도들이 거대한 천막 아래서 찬송가를 부르고 있었다. 그 앞에 적힌 문구는 “동성애 박멸! 동성애 퇴치! 깨끗한 한국, 할렐루야!”다. 난 순진한 신앙을 가진 교회 언니에게 고자질하듯 이 일을 일러바쳤다. 

“지난 4월 자유한국당 도의원들이 ‘충남 인권조례’를 동성애를 옹호한다는 빌미로 폐지시켰거든요. 그때도 우리 교회는 반대 목소리를 냈어요.”

 

‘교회 언니’에서 시작된 수다는 개신교에 대한 씁쓸한 이야기로 이어졌다가 다시 사회복지의 복잡한 시스템에 관한 설명으로 흘러갔다. 

“행정기관의 공무원으로 사회복지 일을 하시는 분들이랑, 지역 복지관의 사회복지사들이랑, 자활센터의 사회복지사들은 좀 달라요. 공무원들은 수급자 탈락 등 관련된 민원들이 워낙 많으니까 힘들고요, 복지관은 정부 지원사업을 내려받아서 하다 보니 아무래도 틀에 박힌 일들이 많죠. 반면 자활센터는 좀 더 역동적이었어요. 일자리를 만들어내야 하니 업무 성격도 사회복지사보다는 시민사회운동이나 비즈니스 영역에 대해 많이 아는 이들에게 더 적합한 일들이었고, 끊임없이 새로운 일들이 주어졌죠. 평범한 복지관의 사회복지사로 일했다면 저도 지루했을 것 같은데, 자활센터의 일은 무척 재미있었어요.”

 

힘들었던 점을 이야기해 달라고 하자 그녀는 세상에 안 힘든 일이 어디 있느냐며, 힘든 만큼 보람 있었다고 말하고는 환히 웃었다. 

“처음 자활센터가 생길 때만 해도 한직이었어요. 그때 학생운동 했던 사람들이 자활센터에 많이 지원해서 왔는데 그들의 활동력 덕분에 사회복지사 조직 가운데 자활이 전국에서 가장 먼저 전국단위의 노조를 만들게 됐죠.”

 

그녀의 이력에 적혀 있던 직함 하나가 떠올랐다. ‘자활노조 충남지부장.’ 순진한 교회 언니와는 영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하고 있던 찰나 그녀의 부연설명이 이어졌다. 

“지들이 나서기엔 경력들도 그렇고 너무 세 보이니까 순진해 보이는 저를 앞세우고 뒤에서 조종을 한 거죠, 하하하.”

 

10년 만에 자활센터를 떠나다

“무역회사에 다닐 땐 월요일이면 출근하기 싫어 몸서리를 쳤죠. 근데 자활센터에서 일할 땐 단 한 번도 가기 싫다고 느낀 적이 없어요.”

 

10년 동안 자활센터에서 근무하며 그녀는 많은 일들을 해냈다. 다른 지역 공공근로사업을 적용해서 처음으로 천안에서 간병사업을 진행했다. 취약계층이 취약계층을 돌보는, 생산적 복지의 첫걸음이었다. 

“지역의 일자리가 없는 여성분들을 채용해서 돌봐줄 이가 없는 사람들에게 무료간병서비스를 제공하는 사업이었어요. 대전에서 처음 시작했는데 효과가 좋아서 전국으로 확대됐죠. 그 일을 제가 처음 맡았어요. 당시 ‘장기요양사업’을 준비하고 있던 정부는 계속해서 자활센터로 시범사업들을 내려보냈는데 그 대상이 노인, 장애인, 산모 이런 식으로 계속 달라졌고 그걸 받아서 하다 보니 늘 새로운 일을 하는 느낌이었죠.”

 

돌봄 사업은 사회 변화와 맞물려 계속 성장해 나갔다. 그러다 보니 자활센터의 한 부서가 감당하기엔 덩치가 너무 커졌다. 자활센터 시스템상 주민리더를 발굴하고 창업하게 해서 실무자들이 이 돌봄사업을 따로 가지고 나가서 독립채산제로 운영해야 했는데 마땅히 이 일을 맡아줄 이가 없었다.

“어떡해요, 저라도 책임을 져야죠. 그래서 그때 자활센터 그만두고 천안돌봄사회서비스센터를 만들게 됐어요.”

 

그녀가 센터를 세우고 대표로 일한 지도 9년이 다 되어간다. 그동안 천안돌봄사회서비스센터는 사회적기업 인증을 받았고 4대보험이 되는 정규직 직원만 해도 요양보호사, 산후도우미 등을 포함해 340명, 돌봄서비스를 이용하는 이들은 500여 명, 회원 70명, 돌봄과 관련된 사람이 1,000명에 육박한다.  

“외형은 주식회사인데 협동조합 방식을 차용해서 1인1표제로 운영을 하고 있어요. 언젠가는 저희도 사회적협동조합으로 바꾸려 생각하고 있는데 지금은 당장 인원이 너무 많고 또 신규 사업 때문에 대출을 받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사업실적이 필요해서 아직은 전환이 어려운 상황이에요.”

 

그녀의 경영철학은 단순하다. 그녀가 떠난 후에도 이 조직이 살아남는 것. 이를 위해 그녀는 지금도 끊임없이 업무들을 매뉴얼화 하고 있다. 

“센터를 만들면서 제 돈은 거의 안 들어갔어요. 그게 단점일 수도 있지만, 그랬기 때문에 수익에 욕심내지 않고 운영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설립 초기 돌봄노동자 선생님들이 30만 원씩 출자를 해주셨는데, 주식회사니까 이익이 생기면 그 선생님들께 배당해드리고 있어요.”  

근데 이 큰 사업체가 최근 적자를 내고 있다. 이유를 듣고 나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월간 참여사회 2018년 11월호 (통권 260호)

2008년 세워진 천안돌봄사회서비스센터는 현재 요양보호사, 산후도우미 등 정규직 직원 340명, 회원 70명, 돌봄서비스 이용자 500여 명에 육박하는 사회적기업으로 성장했다

 

시간 당 200원을 더 준다고?

“저희 센터뿐 아니라 전국이 다 똑같아요. ‘장애인활동서비스 수가’ 문제인데, 최저임금보다 조금 높거든요. 최저임금을 맞춰주면 실제론 정부에서 받는 수가보다 비용이 더 들어가요.”

이유는 간단하다. 일하는 이들에게 임금 외에도 퇴직금, 사회보험료, 연차수당 등을 지급해야 하기 때문이다. 노인, 요양보호사, 산후도우미, 간병 등 수가가 최저임금보다 높은 부분에서 난 수익으로 장애 부분의 손해를 메우고 있긴 하지만 적자 폭은 늘어나고 있다. 

 

“장애인들이 서비스를 받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많기 때문이에요. 노인들은 그래도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들이 좀 있는데 장애인은 스스로 할 수 없는 영역이 훨씬 많거든요. 그러니 장애인들이 써야 하는 시간이 많아서 이쪽 수가를 조금만 올려도 정부의 재정 부담이 많이 늘어나요. 근데 또 현장에선 최저임금을 맞춰야 하니까 수가를 현실에 맞게 올려 달라고 요구할 수밖에 없죠. 근데 정부는 성과가 중요하니까, 수가를 올리려면 혜택 받는 장애인 수도 같이 늘리라고 하거든요. 예산은 한정되어 있는데 장애인 수를 늘리면 결국 문제는 전혀 개선되지 않는 데도 말이죠.”

 

이런 상황에서도 천안돌봄사회서비스센터는 어떻게든 최저임금 수준을 맞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자존심이 있지, 우리가 돈 벌자고 하는 일도 아닌데.’라는 생각으로 다른 곳보다 시간당 단가를 200원 더 주고 있는 것이다. 나도 처음에는 200원 더 주는 게 뭐 그리 대단하지? 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저희 센터에서 제공하는 장애인활동서비스가 한 달에 3만 시간 정도예요. 여기에 200원을 곱하면 한 달에 6백만 원, 임금으로만 다른 센터보다 1년에 7천2백만 원 이상 더 지출하고 있는 거죠.”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주 52시간 근무제가 시행되면서 24시간 교대 근무하는 요양원의 노동자들처럼 현실적으로 중간에 휴게시간을 가질 수 없는 경우에 대한 마땅한 해결책은 없는 상태다. 

“정책의 방향성은 맞는데 세밀한 부분까지는 조정이 안 된 상태에서 시작됐다가 문제가 제기돼서 올해까지는 유예기간이에요. 돌봄노동자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들을 두고 어디서 어떻게 쉬겠어요? 쉬지 않으면 휴게시간에는 임금이 추가로 50% 더 나가야 하는데 수가는 최저임금을 줄 수 없게 책정해 놓고….”

 

이 모든 문제의 핵심은 사회복지에 들어가는 돈을 비용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보살핌이 필요한 사람에게 들어가는 자원은 비용이 아니라 ‘투자’다. 이유는 이어지는 그녀의 말 속에 들어있다. 

“돌봄은 서로 주고받는 것이에요. 내가 이 사람을 돌보긴 하지만 그 관계 안에서 나도 돌봄을 받는 거죠. 그건 일종의 마음의 돌봄이기도 하고, 적어도 세상은 나 혼자 사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죠. 그리고 언젠가는 우리 모두 누군가의 돌봄을 받아야 하니까. 언젠가는 우리 모두 이 안에서 다시 만날 사람들이니까.” 

 

그녀가 생각했던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 2008년 센터에서 목욕서비스 일을 하시던 분이 얼마 전 이용자로 찾아왔던 것이다. 

“실무자들하고 회의하다가 그분 이야기가 나왔는데 좀 울컥하더라고요. 우리와 함께 일하던 분들 모두 언젠가는 돌봄이 필요한 존재로 다시 우리를 찾아 올 텐데, 그렇다면 이곳이 계속 살아남아야 하고, 주간보호센터, 요양원 같은 시설서비스도 갖춰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일하는 분들 교육도 좀 더 까다롭게 하는 편이에요. 그래야 나중에 우리 모두 제대로 된 돌봄을 받을 테니까요.”

손에 잡히지도 않을 길이의 몽땅 연필 한 자루가 그녀의 손끝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다시 만날 사람들

인터뷰가 끝나자 그녀는 역까지 바래다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정작 차는 천안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빵집에 도착했다. 차안에서 그녀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뒷자리에 놓여 있는 목욕 바구니를 발견했다. 얼마 전 해군에 간 아들이 생각나 다시 수영을 시작했다던 그녀. 서른 살에 아이 하나만 달랑 등에 업고 천안에 내려왔다는 이야기, 먹고 살 길이 없어 공공근로를 신청했다던 이야기도 떠올랐다. 그리고 유독 한 문장이 귓가에 울렸다. 

“저도 그들도 어차피 또 만날 사람들인 거예요.”

 

그녀의 맑은 얼굴을 떠올리며 언젠가 우리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생각했다.   

차창 밖으로 우리에게 건넬 거북이빵을 들고 종종걸음을 치며 다가오는 그녀가 보였다.  

 

 

① 2000년 「기초생활보장법」이 생기면서 일자리를 얻지 못하는 취약계층의 자활을 돕기 위해 만들어짐

② 정부가 공공분야의 일자리를 마련하여 사회안전망 밖에 있는 저소득 근로자들에게 최소한의 생계를 보장해 주는 실업대책 사업


글. 호모아줌마데스

두 딸을 키우고 있는 애 엄마. 2007년 참여연대 회원 가입과 동시에 자원활동 시작. 아카데미 느티나무에서 ‘백인보’라는 코너에 비정규적으로 인터뷰 글을 쓰고 있음. 특기사항 : 합기도 빨간띠.

사진. 이한나 미디어홍보팀 간사 

녹취. 조연우 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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