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9년 09월 2019-09-01   4217

[특집] 질병은 병균이 만들고 차별은 사회가 만든다

특집_질병사회

질병은 병균이 만들고
차별은 사회가 만든다

글. 조한진희(반다)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저자

 

 

월간 참여사회 2019년 9월호 (통권 268호)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말이다. 덕담이나 안부로 나누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저 말 안에는 가시 같은 차별이 박혀 있다. 건강이 훼손된 상태로 질병과 함께 사는 사람을 배제하기 때문이다. 의학이 지금처럼 눈부시게 발달하기 이전에는 작은 건강 훼손도 곧 죽음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빈번했다. 그러나 지금 사회는 의학의 발달과 변화된 환경 속에서 질병과 함께 사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질병과 함께 살아야 하는 이들이 ‘저런 말’을 들으면 어떨까. 건강은 잃었지만 계속 되는 생 위에 놓여 있으며, 모든 것을 잃지는 않기 위해 혹은 ‘정상’에 가까운 삶을 지켜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가 저런 말을 한 번씩 만난다. 힘이 빠진다. 아프다. 마치 당신의 삶은 질병으로 인해 실패했으니, 좌절 속에서 살아가야만 한다는 선고 같다. 실제 건강 중심 사회는 질병과 함께 사는 사람들을 자주 좌절과 절망으로 밀쳐낸다.  

 

불이익을 당할까봐 질병을 숨기는 사람들 

우리 사회의 흔한 질병 중 하나인, 결핵과 함께 사는 삶을 조금 자세히 살펴보자. 알다시피 결핵은 호흡기 감염성 질환이다. 그러나 결핵균에 감염 됐다고 모든 사람에게서 결핵이 발병하는 건 아니다. 결핵 감염자중 5~10%만 발병하고, 대부분 ‘잠복 결핵’ 형태를 유지한다. 잠복 결핵 상태에서는 타인에게 결핵균을 감염시키지 않는다. 의사가 감염성이 없다고 해서 직장생활을 계속하려고 했지만, 직장 동료들이 대화나 식사는 물론 악수하는 것도 꺼려한다. 자신을 ‘결핵균’ 취급하는 현실에, 어쩔 수 없이 사직을 한다. 재취업도 어렵다. 오죽하면 결핵예방법은 ‘비전염성 결핵환자에 대한 취업제한을 금지한다’고 명시까지 해뒀다. 이런 환자들의 하소연은 환우회 카페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결국 환자들은 해고당할까봐, 취업을 못할까봐, 사회생활에서 소외될까봐 질병을 숨긴다. 

 

이런 현실이 낳은 결과는 무엇일까. 결핵은 약물 치료를 꾸준히 하면 완치되는 질병이지만, 실제로 한국에서 질병 사망률 10위가 결핵이고, OECD 국가 중 한국의 결핵 환자발생률은 1위다. 물론 질병 차별만이 이 숫자들의 원인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결핵은 가난한 후진국 사람들의 병이라는 조롱, ‘비감염성 결핵’이라는 진단에도 불구하고 편견을 신뢰하는 문화는 환자의 온전한 치료와 삶을 적극적으로 방해한다. 위에서 보았듯 비감염성 결핵환자의 삶에서, 직장이나 관계 등 거의 모든 것을 잃게 만드는 범인은 결핵균이 아니다. 의사의 과학적 판단이 아니라, 자신의 편견에 근거해 차별을 실천하는 태도다. 

 

일상과 언어에 스며든 질병 차별

“난독증 있냐”, “지랄병 도졌냐”, “암 걸리겠다” 같은 ‘농담’에도 가시 같은 차별이 박혀있다. 한국처럼 학벌이나 스펙이 중요한 사회에서 난독증은 삶에 큰 걸림돌이 되는 질병이다. ‘난독증 있냐’는 농담은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유행이라는 ‘(장)애자냐!’는 농담과 무엇이 같고 다를까. 뇌전증간질은 한국 사회에서 역사적으로 낙인이 깊은 질병이다. 뇌전증 증세 중 하나인 발작을 희화화 하는 ‘지랄병’이라는 말은 또 어떤가. 그리고 죽음이나 재발 위협과 싸우고 있는 암환자들은 ‘암 걸리겠다’는 말을 들을 때, 어떤 감정을 겪을까. 질병을 조롱하고 소외시키는 ‘농담’들 속에서 난독증, 뇌전증, 암 환자들의 인권은 머물 공간이 없다.

 

이외에도 자궁암이나 유방암 같은 여성질환을 섹슈얼리티와 결합시켜, 자궁암은 섹스를 많이 해서 걸리고 유방암은 남자에게 사랑 받지 못해 걸린다는 식의 말도 돌아다닌다. 암에 걸린 것은 잘못 살아서 천형을 받은 거라는 수천 년 전 종교 경전에나 나올 법한 말들이 아직도 힘을 얻기도 한다. 혹은 ‘아픈 사람 같지 않게 긍정적’이라는 칭찬도 사실 따지고 보면, 아픈 사람은 부정적인 존재라는 전제를 수용해야 긍정할 수 있는 칭찬이다. 마치 ‘의리 있네, 여자 같지 않다’는 식의 말을 칭찬으로 수용하기 위해서는 여자는 의리 없는 존재라는 전제를 수용해야 하는 것과 같다. 원래 차별이란 명시적으로 차별을 의도하거나 목표로 삼지 않아도 발생한다. 그리고 차별 표현 수위가 낮다고 해악이 낮은 것도 아니다. 

 

월간 참여사회 2019년 9월호 (통권 268호)

환자들은 아파도 해고당할까봐, 취업을 못할까봐, 사회생활에서 소외될까봐 질병을 숨긴다

 

우리 사회 질병차별에 대한 인식 수준은 어디까지 와 있나 

사실 질병을 둘러싼 우리 사회 차별을 말하자면, 그것만으로 한 권의 책을 쓸 만큼 다양하고 방대하다. 그럼에도 질병 차별은 우리 사회에서 아직 제대로 논의된바 없다. 국가인권위원회에 접수된 차별 진정 현황을 살펴보면, 병력medical history에 따른 차별은 1.3%에 불과하다. 반면 장애차별 진정은 50.5%에 달한다. 이는 한국의 여러 차별 중 장애차별이 가장 심각하다는 뜻일까? 물론 한국 사회에서 장애차별이 뿌리 깊은 것은 사실이나, 차별 진정 비율이 곧 실제로 더 심각한 차별을 의미한다고 보긴 어렵다. 그보다는 한국 사회에서 2001년 장애인 이동권 투쟁을 시작으로 진취적으로 전진해온 장애인 운동으로 인해, 장애인 권리 의식이 어느 때 보다 향상되고 적극적으로 발화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반면 질병을 둘러싼 차별은 당사자에게 조차 그게 차별이라는 인식이 낮은 경우가 많다. 앞서 본 결핵 사례의 경우 당사자들조차 취업 제한이 억울하지만, 자신이 고용주라도 건강한 사람을 고용할 것이라는 말을 자조적으로 나눈다. ‘말’은 그렇게 하더라도 부당하다고 진정이라도 하고 작은 저항이라도 해봐야 할 것 같다. 하지만 그런 변화를 추동할 힘이 질병 당사자들에게 결집되기에는 쉽지 않아 보인다. 이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질병을 개인의 책임으로 귀속시키는 ‘질병의 개인화’와 환자들에게 깊게 내면화된 자책감 문화와 연결되어 있으리라 짐작한다. 

 

질병, 아파서가 아니라 차별 때문에 고통스럽다

어쨌거나 한국 사회의 다양한 인권의식 성장 속에서, 우리는 아직 질병과 관련한 차별을 함께 성찰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질병은 빈곤, 고용, 주거, 지역 등에 민감하게 영향 받으며 발병한다. 투병 과정은 의료, 돌봄, 경제 등의 다양한 필요가 발생하는 복합적 장이다. 동시에 질병이란 다양한 사회의 차별이 투사되는 장이기도 하다. 빈곤차별, 성차별, 성소수자차별 등 사회에 깊숙한 불평등이 고스란히 질병에 걸린 개인의 몸에 투사된다. 그래서 ‘가난한 후진국 병’ 결핵, ‘문란한 여자들의 병’ 자궁암, ‘게이들의 암’ 에이즈 같은 수식어가 붙는다.

 

질병은 통증을 유발하거나 생명을 위협하기 때문에 고통스럽다. 그러나 질병이 곧 불행인 것은 아니다. 아픈 몸도 아픈 대로 나름의 역할을 주고받으며 평등하게 살아 갈 수 있는 사회라면, 개인에게 질병은 삶의 한 변곡점으로 수용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우리 사회 아픈 몸들은 생의학적 고통 뿐 아니라, 질병을 차별하는 문화 때문에 절망으로 떠밀려 간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라는 말이 온전한 질병 예방의미로 쓰이려면, 질병 차별이 없는 사회여야 가능하다. 질병은 세포에 존재하지만, 차별은 사회가 만든다. 질병을 차별하는 사회가 변하면, 질병과 함께 살아가는 이의 고통이 변하고, 고통이 변하면 몸이 변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건강을 잃어도 모든 것을 잃지 않는 사회다.  

 

국가인권위원회 「2018 국가인권위원회 통계」(2019) 인용



 

 

특집. 질병사회 2019년 9월호 월간참여사회 

1. 질병은 언제부터 질병이 되었나? 황상익

2. 질병은 병균이 만들고 차별은 사회가 만든다 조한진희

3. 질병장사 : 건강과 질병의 상품화에 대하여  변혜진

4. 한국의 바이오산업과 신약의 환상  정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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