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9년 01-02월 2019-01-03   2382

[만남]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 김형숙 회원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김형숙 회원

월간 참여사회 2019년 1-2월 합본호 

 

어느 날, 간호사 스테이션. 간호사 한 명이 밑도 끝도 없이 “우리가 사채업자보다 더 무서운 것 같아요.”하고 내뱉었다. 주변에 있던 간호사들은 무슨 말인지 묻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뭐, 맘대로 죽을 수는 있나?” “여기 있다 보면 죽는 게 제일 어려운 것 같아요.”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도시에서 죽는다는 것』 170쪽

잠을 설쳤다. 워낙에 늦게 자는 타입이지만 요 며칠은 정도가 심했다. 이게 다 그녀 때문이다. 밤마다 『도시에서 죽는다는 것』을 읽었다. 그렇게 몇 번의 새벽을 맞았다. 꿈자리는 뒤숭숭했고, 나의 영혼은 계속 ‘죽음’ 주위를 서성였다. 

 

영혼이 따뜻했던 나날들

서울역사 안의 한 카페. 일 때문에 강원도에서 하루를 머물고 왔다는 그녀와 마주 앉았다. 인터뷰를 하기 전 기차 시간부터 묻는다. 그녀는 다시 천안행 기차를 타야 했고, 나는 마음이 바빴다. 책에 고향 이야기가 무척 많더군요.

“경남 거창이 고향인데 가난한 산골 마을이었지만 규모는 꽤 컸어요. 거기서 동네 언니, 오빠, 동생들 20여 명이 함께 소를 몰고 산과 들로 놀러 다녔죠. 인생에서 최고로 완벽한 순간을 꼽으라면 이 기억일 거예요. 동네사람들끼리 서로 돕고 의지하고, 닥나무로 종이도 함께 만들고. 고향은 언제나 제게 이상향의 원형 같은 곳이죠.”

 

그 이상향의 세계에서는 이런 일이 벌어진다. 각자 소를 몰고 산으로 들어간 아이들이 감자산곶을 준비한다. 개울가 모래밭에 땅을 파 아궁이를 만들고 나뭇가지를 모아 불을 피운 후 감자를 익히는 것을 말한다. 아이들은 시간과 품이 많이 드는 이 일에 매달리다 소는 까맣게 잊는다. 횃불을 든 어른들이 산 어귀에 나타날 때쯤 이미 소들은 먼저 집으로 돌아가고 없다. 그러나 그녀만큼이나 모험심이 강하고 거칠었던 그녀 집의 암소는 늘 산 깊숙이 들어가 버렸다. 저녁도 굶은 채 그녀는 집 앞 동산에서 밤이 늦도록 뒷산을 올려다보며 소의 귀환을 기다린다. 고향을 향한 그녀의 애끓는 그리움은 그 시절 소를 기다리던 어린 소녀의 눈빛을 많이도 닮았다. 

 

“어렸을 때는 시도 쓰고 나름 문학소녀였어요. 글을 계속 쓰고 싶긴 했는데 상황이 그렇게 되진 않았죠. 산골의 가난한 집안의 셋째 딸이니까 대학에 갈 수 있을 거란 생각도 못 했고요. 근데 제가 공부는 잘했거든요. 학비가 싸고 취직이 잘 된다는 소리에 별생각 없이 간호학과를 선택했고 대학에 못 보낸다던 부모님도 서울대라고 하니까 첫 등록금을 내주셨죠.”

 

그렇게 그녀는 고향을 떠나 도시로 왔다. 그러나 양지바른 곳이면 어디나 무덤이 있는 그 땅에 그녀는 자신의 일부를 남겨 놓은 듯했다. 무덤가의 푹신한 잔디밭에서 걸음마를 배우고 묏등에서 미끄럼을 타며 자라난 존재는 도시의 삶에 온전히 녹아들지 못했고, 제가 살던 굴을 향해 머리를 놓는 여우처럼 몸과 마음이 아플 때면 고향 마을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그리곤 할아버지, 할머니의 무덤가에 하염없이 앉아 스스로를 돌보았다. 

 

인생의 지향점이 ‘삶의 내용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 마을의 그것과 더 가까워지는 것’이라 말하는 그녀가, 시샘이 날 정도로 부러웠다. 

 

“예전엔 참 좋은 직장이었죠”

간호사라고 하면 ‘태움’이란 단어부터 떠오르는데 실제는 어떤가요?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힘들어진 것은 2000년 이후부터예요. 병원이나 의료기관들이 영리화 되는 과정과 관련 있죠. 결국은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이 ‘태우는’ 거예요. 감당 못할 시스템 속에 사람을 그냥 집어넣는 거죠.”

 

환자의 소변량은 시간마다 체크하면서 정작 간호사 자신은 8시간 내내 화장실에 가지 못하는 현실. 어떤 간호사는 환자의 식사 보조를 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환자 밥을 먹는 경우까지 있다고 했다.  

“옛날엔 심장내과 중환자실 같은 경우는 신규 간호사는 아예 받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제가 나오기 직전의 중환자실은 주말이면 신규 간호사 4명 데리고 일해야 하는 경우도 흔하게 있었죠. 그때는 뭐 제정신이 아니죠. 사고 날까봐 발 동동 구르고….”

 

그녀는 말했다, 예전에는 이렇게까지 엉망이진 않았다고. 

“사실 저는 간호사로서 일했던 시절에 대해 굉장히 좋은 기억이 많아요. 중환자실이 유독 힘들긴 해도 그런 일을 함께 겪어내며 싹트는 끈끈함이나 팀워크 같은 게 있거든요. 시간이 조금이라도 남으면 자발적으로 환자들 목욕도 시키고 그러면서 간호사들이 서로에 대한 존경심이나 신뢰를 가지고 있었고 자신의 일에 대해 자부심도 컸죠.”

 

얼떨결에 간호학과에 입학한 그녀는 스스로가 간호사로서 준비된 사람이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장에서 일하며, 존경심이 생길 정도로 환자에게 헌신하는 동료 간호사들을 보면서 할 만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옛날엔 우리끼리 이런 얘기도 많이 했어요. ‘우린 참 좋은 직장에서 일하는 거 같아, 사람들 도와주면서 돈도 벌잖아.’”

 

그러나 그녀가 19년이나 근무했던 중환자실은 한 치의 실수도 허용하지 않는, 긴장도가 무척 높은 곳이었다. 병원을 그만둔 후 다른 직장에 다닐 땐 오히려 그 느슨함에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지금 그녀는 현장을 떠나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20년 가까이 헌신했던 일터를 떠난 이유가 궁금했다. 

 

“근무 환경이 개선될 여지가 조금이나마 있었다면 다른 선택을 했을 수도 있겠죠. 신규 간호사가 두어 명만 들어와도 중환자실 전체가 힘들다고 했는데 저희 중환자실엔 신규가 아홉 명이나 들어왔어요. 책임 간호사인 저는 그들의 교육까지 책임져야 했고, 사고가 날 위험은 계속 커지고. 어느 날, 이제는 한계를 벗어났다고 느꼈어요. 그 상황 자체가 너무 무서웠죠.”

그러나 스스로에게 자긍심이 들 만큼 좋았던 그 일을 그만둔 이유는, 또 있다. 

 

당신의 죽음에 ‘당신’은 없다

“환자가 좋아져서 나가든 죽어서 나가든 간호사들이 그 상황에 집중할 겨를이 없는 거예요. 컨베이어벨트처럼 환자들이 끝없이 밀려오니까 그저 머릿속엔 다음 환자, 다음 일에 대한 생각만 있는 거죠. 환자하고 교감하며 자신이 하는 일에 뿌듯함을 느끼고, 환자가 임종을 맞는 순간엔 미안한 것들이 있으면 사과도 하고, ‘잘 가시라.’ 예를 갖춘 인사도 할 수 있는 인간적인 시간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질 못했어요.”

 

그러나 병원이라는 공간이 가진 불가능성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멀쩡하게 사회생활을 하던 사람도 병원에, 중환자실에 입원하는 순간 ‘보호자’가 필요한 존재로 전락한다. 의료행위를 둘러싼 의사결정 과정에서 제외되며 정확한 상태를 본인에게 알리지 않는 경우도 많다. 상황이 악화되면 연명치료를 둘러싼 어렵고 복잡한 일들이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전개된다. 그리고 마지막엔 온갖 줄을 매달고 각종 의료기기에 둘러싸인 채 죽음을 맞는다. 그곳엔 따뜻한 이별의 인사나 마지막 당부 같은 것 대신, 환자의 입을 틀어막고 있는 인공기도와 주삿바늘에 짓물러버린 피부, 무의미한 심폐소생술에 상처 난 가슴만이 있을 뿐이다.

 

장례식장 침대로 옮기기 위해 아이를 안고 있던 나는 갑자기 마음을 바꿨다. “그냥 안고 가실래요?”, “그래도 되나요?” 그간 금지하는 것들이 많은 병원의 규칙과 절차에 익숙했을 아이 엄마가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나는 처참한 심정이다. ‘우리가 그랬나요? 그렇게까지?’하고 묻고 싶었다. 

 『도시에서 죽는다는 것』 137쪽 

 

양지바른 곳이면 어디나 무덤이 있는 땅에서 나고 자란, 무덤가의 푹신한 잔디밭에서 걸음마를 배우고 묏등에서 미끄럼을 타며 성장한 그녀는 이런 현실을 견디기 힘들었다. 그녀가 고향에서 배운 그 따뜻하고 예의 바른 ‘죽음’을 어떻게든 이 삭막한 도시에 되돌려 놓아야 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나 연명치료 중단 같은 것도 중요하긴 한데 어찌 보면 부수적이에요. 결국 누구나 치료를 할 수 없는 상황이 온 후 죽음을 맞고, 그 상황에서 인간의 존엄을 지닌 채 죽으려면 호스피스 같은 완화의료가 필수적이죠. 죽음 직전 겪어야 할 고통이 적절히 관리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다시 병원에 갈 테니까.”

 

2017년부터 ‘가정호스피스’ 제도가 시범사업으로 실시되긴 했으나 활성화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일단 가정호스피스 기관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사업이 제도화 되는 과정에서 오히려 기존에 있던 가정호스피스 전문기관들이 살아남기 힘든 시스템이 만들어졌다고, 그녀는 설명했다. 

“이게 의료 영역만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가정호스피스가 가능하려면 사회적 간병제도가 동시에 같이 가야 하는 거고. 가족이 집에서 환자를 직접 간병해야 하는 상황이면 환자가 마지막 정리하는 걸 도울 수도 없고 가족들도 제대로 된 이별을 준비할 여유가 없으니까요.”

 

많은 이들이 사는 게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그러나 삶뿐만이 아니다. 현실은 나의 죽음마저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세상이, 엉망진창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생의 끝을 향해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생이 끝날 때까지 살아가야 한다.  

 

다시, 고향의 기억 속으로 

그녀가 쓴 『도시에서 죽는다는 것』은 이 세상을 향해 ‘생의 마지막을 폭력 속에서 보내게 한 책임’을 묻는 책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기꺼이 나눠서 지려고 한다. 병원을 그만두고 생명윤리에 관한 공부를 계속한 것도, 학생들에게 의료적 지식뿐만 아니라 다른 이의 삶을 이해하는 것의 중요성을 가르치는 것도 모두 그 때문이다. 

 

어린 시절에 본 죽음들은 달랐다. 죽음은 늘 사람들과 함께 하는 일상에서 찾아왔고, 사람들과 함께 하는 임종은 외로움도 고통도 덜해 보였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맞은 죽음일지라도 장례과정이 열려 있었다. 상주들은 온몸으로 애도하며 죽은 이와 작별하고, 그 힘으로 다시 살아내는 것 같았다. 어린아이들까지 포함된 구경꾼들도 그렇게 죽음과 삶을 배우며 강해졌을 것이다. 

『도시에서 죽는다는 것』 36쪽

“어릴 적 제가 고향에서 보았던 그런 인간다운 죽음이 가능한 세상, 그런 관계를 도시 안에서 만들고 정책도 세워나가야죠. 내 주변 사람에게 좋은 이웃이 되어주고, 내가 필요할 때는 또 도움을 받고, 일이 있으면 서로 들여다봐주고. 조금 거리가 있는 공동체여도 괜찮고, 그럼 되지 않을까 싶어요.” 

 

소가 돌아오길 기다리다 소녀는 잠이 든다. 꿈결에서 어른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거 참 희한타, 밤이면 귀신이 소를 불러내린다 카디 그 말이 사실인갑소. 지도 온 산이 컴컴해지고 무서붕께 묏등으로 찾아든 기라.” 소가 돌아왔다는 말에 온몸의 긴장이 풀린 소녀는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꿈속에서 익숙한 풍경 하나를 만난다. 깊은 숲속 공터, 반듯한 무덤 두 장이 나란히 환한 달빛을 받고 있다. 사라졌던 소녀의 암소가 그 무덤에 길게 기대고 누워 목을 비벼대며 한가롭게 되새김질을 하고 있었다. 참으로 따듯하고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우리의 죽음은, 그녀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 마을의 그것과 더 가까워져야 한다.

 

월간참여사회 2019년 1-2월 합본호(통권 262호)

 


글. 호모아줌마데스

두 딸을 키우고 있는 애 엄마. 2009년 참여연대 회원 가입과 동시에 자원활동 시작. 아카데미 느티나무에서 ‘백인보’라는 코너에 비정규적으로 인터뷰 글을 쓰고 있음. 특기사항 : 합기도 빨간띠.

사진. 이한나 미디어홍보팀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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