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9년 03월 2019-03-01   658

[특집] 같은 경험, 다른 기록

특집4_시민의 눈으로 본 3·1운동

같은 경험, 다른 기록

글. 홍종욱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

 

 

3·1운동, 현대의 탄생

제국주의 열강 사이의 모순이 폭발한 제1차 세계대전은 새로운 국제 질서의 도래를 재촉하는 계기가 되었다. 20세기를 냉전과 비식민화(decolonization)의 세기라고 할 때, 제1차 세계대전에 따른 사회주의 국가의 등장과 식민지제국 질서의 동요는 그야말로 ‘현대의 탄생’이라고 부를 만한 변화였다.

 

파리강화회의가 열린 1919년 봄에서 초여름까지 세계 각지에서 민족운동이 분출했다. 3·1운동의 발발 배경과 역사적 의의 역시 세계사적 맥락에서 살필 때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다. 3·1운동은 20세기 한반도 최대 사건이자 오늘날까지 우리 사회를 이끌어 온 다양한 주체를 낳았다는 점에서 한국 현대사의 기점이라고 부를 만하다.

 

두말할 것 없이 한국 현대사는 분단의 역사다. 3·1운동은 남과 북이 둘이 된 이유를 설명하는 기원이기도 하고 다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주는 기억이기도 하다. 노무현 정부 시절 기획된 ‘남북 역사용어 공동연구’의 마지막 항목은 바로 3·1운동이었다. 3·1운동은 함께 기억해온 우리 역사가 멈춘 곳이자 다시 시작되어야 할 곳이다.

 

북한 역사학계의 3·1운동 인식

북한 역사학의 근현대사 서술은 건국 초기에는 마르크스주의 유물 사관에 충실하였지만, 1960년 전후 민족적 주체성을 강조하는 변화를 보였고 1980년대 이후는 평양의 운동과 김일성 가계의 활약에 주목하였다. 이와 같은 흐름은 3·1운동 인식에서도 엿보이는데 몇몇 주요한 특징을 살펴보자.

 

첫째, 3·1운동을 끝으로 부르주아 민족운동 시기가 막을 내렸다고 평가한다. 갑신정변에서 시작된 부르주아 민족운동의 시대적 사명이 서서히 끝나가다 3·1운동에서 완전히 한계가 드러났다는 해석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해서는 ‘부르주아 민족주의의 몰락·쇠퇴의 반영’이라고 강하게 비판하였다.

 

둘째, 3·1운동의 발생과 전개에서 노동자, 농민의 역할을 강조한다. 운동 초기부터 민중이 적극적으로 폭력을 행사했다는 점에도 주목한다. 무엇보다 북한이 사용하는 ‘3·1 인민 봉기’라는 명칭은 이른바 민족대표로 상징되는 부르주아 민족주의자의 주도성을 부정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셋째, 국제적 영향 관계를 중시하였으나 어느 시점부터 관련 서술은 사라졌다. 초기에는 러시아 혁명의 승리와 세계적인 반제국주의 투쟁의 영향 아래 3·1운동이 일어났다고 서술하였다. 아울러 3·1운동이 5.4운동 발발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서면 국제적으로 영향을 받은 사실도 영향을 끼친 사실도 완전히 사라진다. 민족적 주체성에 대한 강조가 고립적인 역사서술로 이어진 셈이다. 

 

넷째, 평양에서 벌어진 시위를 중시하는 시각이 점차 강화되었고, 급기야 김일성 가계의 활약을 과장하는 서술이 등장하였다. 초기에는 ‘수도 서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등 서울이 운동의 중심이었다는 것을 인정하였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평양의 운동을 서울보다 중요하게 서술하였다. 이와 더불어 시위를 주도하고 또 적극적으로 참가한 인물로서 어린 김일성은 물론 아버지 김형직, 외삼촌 강진석 등이 중요하게 다뤄진다.

 

월간 참여사회 2019년 3월호 (통권 263호)

북한의 국정 역사교과서 『조선통사(중)』의 3·1운동 서술 부분

 

교차하는 남과 북의 기억

남북 정상이 3·1운동 100주년 기념행사를 공동으로 열자고 합의한 사실은 많은 이들을 들뜨게 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은 듯하다. 최근 북한의 거부 의사를 전한 언론 보도에서는 임시정부에 대한 평가가 다른 점이 원인이 아닐까 추측하였다.

 

한국에서는 3·1운동의 성과를 임시정부 수립으로 연결 짓는 시각이 주류다. 정부는 대통령 직속으로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두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위에서 살핀 바와 같이, 3·1운동으로 부르주아 민족운동 시기가 막을 내리고 노동자·농민의 사회주의 운동 특히 김일성이 이끄는 혁명운동이 등장한다는 역사상을 내세우는 북한은 임시정부에 매우 비판적이다. 3·1운동은 남북한 모두의 기원이지만 적어도 양측 정부가 기억하는 3·1운동 상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한국사회의 임시정부 평가는 줄곧 지금과 같았을까. 1960∼70년대를 거치면서 한국 학계에서는 이른바 민족대표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역할을 긍정하는 경향이 주류였지만, 1980년대 들어 젊은 학자들 가운데서 민족대표의 타협성을 비판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역시 여러 독립운동 단체 가운데 하나로 자리매김하는 연구가 등장하였다. 민주화 운동 열기 속에 이제껏 금기시되었던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을 복권함으로써 냉전적인 ‘반(半)국사적 시각’을 극복하려는 노력이었다. 오히려 오늘날에 이르러 사회주의와 북한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면서, 자칫 임시정부가 성역화되는 듯한 역사 인식의 보수화가 확대되고 있는 셈이다. 

 

한국이 탈냉전 이후의 문제에 부딪혀 있다면 북한은 아직 냉전에 갇혀 있다. 부르주아 민족운동이라는 평가, 평양의 운동에 대한 강조는 있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북한의 3·1운동 인식은 운동의 주도권 혹은 중심성 문제를 넘어 자칫 역사적, 지리적 상상력을 제한하고 있지 않은가 우려된다. 냉전이 가져온 ‘반국사적 관점’을 벗어나려는 노력이 북한 역사학계에도 요구된다.

 

월간 참여사회 2019년 3월호 (통권 263호)

1920년 열린 코민테른 대회. 군중 속에 태극기가 보인다

 

국가 정통성론을 넘어서

임시정부 수립일인 4월 11일을 임시공휴일로 제정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100주년을 맞아 그 어느 때보다도 임시정부를 기리는 분위기가 높은 가운데, 학계 일각에서는 ‘임정 법통론’으로 상징되는 국가 정통성론적 역사 인식을 경계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박근혜 정부 시절 국정교과서 추진과 건국절 제정에 반대하는 투쟁 과정에서 임시정부의 역사적 의의를 강조하다 보니 이른바 진보 학계도 국가 정통성이라는 함정에 빠졌다는 자기반성이다.

 

좌우 사이에 균형을 잡는 차원을 넘어서야 한다. 국가 정통성을 전제로 하고 그것을 어디에서 구할까 그저 위치를 조정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좁은 의미의 중앙 정치, 민족 정치에 갇히면 남북의 화해는 더욱 멀어진다. 여성, 학생, 농민, 노동자, 지방 사람, 외국 사람 등 다양한 주체의 다양한 욕망을 직시해야 한다. 물론 이들이 민중 혹은 민족의 이름으로 뭉치고 또 지식인이나 정치가가 그것을 표상하고 전유하는 행위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현상 역시 하나의 과정이고 노력일 뿐이다. 고착된 기억을 절대화하여 거기서 정통성을 찾으려는 시도는 반역사적이다.

 

임시정부와 김일성을 떠올린다면 남북은 너무 멀리 떨어진 것 같지만, 장마당? 사진을 보면 남인지 북인지 도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닮았다. 오늘도 남과 북 모두에서 다양한 주체가 삶을 영위하고 있다. 3·1운동은 우리의 기원이다. 권력과 외세가 강제하는 기억을 거부하고 서로의 삶을 보듬으면서 나름의 기억을 만들어 가고자 할 때, 3·1운동의 경험은 우리의 소중한 자산이다. 바로 이것이 시민의 눈으로 본 3·1운동의 의미일 것이다.   

 

 

 

특집. 시민의 눈으로 본 3·1운동 2019년 3월호 월간참여사회 

1. 보통사람들의 3·1운동 조한성

2. 유관순의 친구, 유관순의 동지 장영은

3. 법 앞에 불평등한 조선인 도면회

4. 같은 경험, 다른 기록 홍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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