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9년 06월 2019-05-30   17658

[환경] 동물원, 꼭 있어야 할까?

동물원,
꼭 있어야 할까?

동물 학대와 생명 멸시를 멈춰라

지난 2013년, 정부가 동물원을 폐지하겠다고 공식 선언한 나라가 있었다. 생태 선진국으로 널리 알려진 코스타리카가 그 주인공이다. 성공했을까? 아직까진 아니다. 동물원을 운영하는 민간법인이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결과는 정부의 패소였다. 이 법인의 동물원 운영권 계약은 2024년까지 다시 연장됐다. 하지만 국민들 사이에 동물원 폐지 여론이 높고 환경단체들의 압박도 계속되고 있다 하니, 이후 상황이 어떻게 펼쳐질지는 좀 더 지켜볼 일이다.

동물원 얘기를 꺼내는 이유는, 동물을 넘어 오늘날 ‘생명’이 처한 현주소를 생생하게 알려주는 생활 속 현장이 동물원이기 때문이다. 두루 알다시피, 애초 동물원은 왕족이나 귀족들이 자기들의 부, 권력, 명성 따위를 과시하려고 이국적인 동물을 수집해 가두고 전시하는 데서 시작됐다. 동물원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동물원에서는 사람을 전시한 적도 있었다. 오늘날 현대적 동물원의 모델이 된 것으로 평가받는 독일 함부르크의 하겐베크 동물원이 그랬다. 이 동물원은 초기 세계 곳곳의 토착 원주민들을 끌고 오는 것은 물론 이들의 동물, 천막, 살림살이, 사냥도구 같은 것까지 몽땅 가지고 와서 유럽 사람들에게 색다른 구경거리를 제공했다. 돈벌이를 위해서였다. 

이처럼 사람마저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취급했던 동물원의 초기 역사는 동물원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새삼 일깨워준다. 사람조차 이런 식으로 다루는 판국에 다른 동물은 얼마나 잔인하고 참혹히 대했겠는가. 물론 최근 들어서는 동물 본성을 최대한 존중하는 생태적 방향으로 동물원을 바꾸는 움직임이 일고 있긴 하다.

이를테면 미국 샌프란시스코 동물원의 동물 체험 방식은 조금 특이하다. 살아 있는 거북이를 만지는 게 아니라 죽은 거북이의 등딱지를 만지게 하고, 양의 경우도 수북이 모아놓은 양털을 만지게 하는 식이다. 프랑스 파리 동물원은 쇠창살로 만든 우리가 거의 없다. 최대한 동물 서식지와 비슷한 환경을 제공한다. 코끼리와 곰 같은 동물은 들이지 않는다. 이런 동물들은 본디 활동 영역이 넓기 때문이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이런 노력은 소중하고, 널리 퍼질수록 바람직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감금’과 ‘전시’라는 동물원의 본질이 사라지거나 바뀌는 건 아니다. 어쩌면, 이런 노력조차 본질적으로는 동물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인간의 죄책감을 ‘세탁’하려는 안간힘의 산물인지도 모른다. 

우리나라는 어떨까? 엉망진창이다. 우리나라에서 동물은 법적으로 ‘재물’, 곧 물건이다. 2018년 9월 기준으로 공식 등록된 동물원이 84곳에 이르지만, ‘허가제’가 아니라 누구나 동물원을 운영할 수 있는 ‘등록제’를 채택하고 있어서 기본적인 자격조차 갖추지 못한 곳이 수두룩하다. 동물 사육의 구체적인 기준도 없고, 사육 환경을 제대로 점검하는 절차와 의무도 없다. 그 와중에 동물을 직접 만져도 되는 ‘체험형 동물원’, 심지어 동물을 손님이 원하는 곳까지 데려가서 보여주는 ‘이동식 동물원’ 등과 같은 유사 동물원이 판을 친다. 최근에는 라쿤 등을 전시하는 ‘야생동물 카페’도 성행한다. 모두 동물의 본성에는 아무런 관심이나 배려도 없다. 끔찍한 동물 학대와 생명 멸시가 벌어지는 ‘고문실’인 동시에, 동물을 한낱 돈벌이 수단으로 여기는 상업시설일 뿐이다.

월간 참여사회 2019년 6월호 (통권 266호)

모든 동물은 각자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와 살아갈 목적이 있다

진정한 ‘인간다움’을 위하여

동물은 인간이 가진 것과 같은 삶의 빛, 삶의 이유를 가지고 있다. 동물 또한 사람과 마찬가지로 제대로, 온전히 살기를 원한다. 만약 고릴라에게 자기가 사는 곳의 토착식물 가운데 먹어도 되는 것과 먹으면 안 되는 것을 구별하게 한다면 어떻게 될까? 또 고릴라에게 자기가 사는 밀림의 날씨 변화를 예측하게 한다면 어떻게 될까? 틀림없이 인간보다 훨씬 우수한 능력을 발휘하리라. 고릴라는 고릴라로서 똑똑하다. 모든 동물이 다 그러하다. 공감 능력을 갖춘 동물도 얼마든지 있다.

자기 짝이나 가족이나 친구를 잃은 동물 가운데 어떤 것들은 무리에서 빠져나와 혼자 틀어박혀 있기도 하고, 며칠 동안 사체 옆에 머무르기도 한다. 어떤 동물은 슬픔이 극심한 나머지 먹지도 않고 짝짓기도 하지 않는다. 모든 동물은 각자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와 살아갈 목적이 있다. 나름의 존엄성과 행복하게 살고 싶은 욕구가 있다. 동물은 인간과 다른 존재라고? 그렇다. 하지만 그것이 동물이 생명체로서 누려야 할 자유와 삶의 기쁨을 부정당할 근거는 되지 못한다.

어떤 생명체를 열등하고 저급한 존재라고 단정하고 그에 따라 함부로 다뤄도 된다고 여기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고 잘못된 생각이다. 인류 역사에서 노예제 같은 신분제도를 오랫동안 유지하고 여성, 흑인, 장애인 등을 차별한 것도 이런 논리로 정당화하곤 했다. ‘살아 있음’ 자체를 소중히 여기는 곳에서는 사람의 가치도 고귀해진다. 동물이 생명 대접을 제대로 받는 것과 사람이 사람대접을 제대로 받는 것은 서로 긴밀하게 통한다. 우리 모두는 서로 연결되고 하나로 통합된 생명 공동체 속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마하트마 간디는 이렇게 말했다. “한 나라의 위대함과 도덕적 진보는 그 나라 사람들이 동물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독일은 2002년 헌법에 ‘동물 보호’를 국가의 책임이라고 규정했다. 더 일찍이 스위스는 1992년에 ‘동물의 존엄성’을 헌법에 명시했다. 남미의 에콰도르는 2008년 헌법에 자연의 생물이 영구적으로 생존하고 번식하고 진화할 권리를 가진다고 못 박았다. 나아가, 국가가 이에 따른 의무를 수행하지 않으면 해당 생물을 대리하여 시민이 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했다. 볼리비아에서는 2011년 자연을 법적 권리의 주체로 인정하는 ‘어머니지구법’을 새롭게 제정했다. 동물과 생명을 어떻게 대하느냐 하는 것은 오늘날 문명의 수준을 재는 또 하나의 중요한 잣대다. 

친근한 오락 시설? 아이들을 위한 교육 시설? 동물을 직접 만나는 자연 체험 시설? 동물원을 이렇게 간주하기엔 그 속에 갇혀 있는 생명들의 고통이 너무 크다. 진정한 ‘인간다움’은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의 고통에 공감하고 이를 줄이려는 노력에서 말미암지 않을까? 동물원, 꼭 있어야만 할까?  


글. 장성익 환경과생명연구소 소장 

녹색 잡지 <환경과생명>, <녹색평론> 등의 편집주간을 지냈다. 환경 분야를 비롯해 다양한 주제로 책 집필, 학술 연구, 출판 기획, 대중 강연 등의 활동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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