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9년 06월 2019-05-30   1695

[특집] 투쟁에서 경쟁으로 달려온 86세대의 학형에게

특집_안녕, 86세대

투쟁에서 경쟁으로 달려온
86세대의 학형에게

글. 조형근 한림대 일본학연구소 HK교수

월간 참여사회 2019년 6월호 (통권 266호)

학형, 하고 당신을 불러봅니다. 불편하실지도 모르겠네요. 학생운동권 용어에다 심지어 남성 중심적 어휘니까요. 그 시절의 영광과 부채를 모두 떠올리려고 학형이라는 다소 어색한 호칭을 씁니다. 저는 학형의 삶을 모릅니다. 잘 나가는 유력인사인지, 아니면 명퇴하고 치킨집을 몇 번 말아먹은 서민인지 모릅니다. 그래도 세상은 우리를 폭력적으로 한데 묶어 86세대라고 부릅니다. 80년대를 살거나 죽어간 수많은 힘 약한 삶의 결들을 학생운동권 엘리트들의 영웅서사로 축소해버린 이 어휘에, 우리 세대는 맞서 싸우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편승하기도 했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그 업보로 천형처럼 이 말을 쓰겠습니다. 

 

그래서 제 편지에서 86세대라는 말은 그 시대와 지금 사이에 가로 놓인 수많은 땀과 눈물이 거세된 앙상한 단어입니다. 학형이 살아온 고달픈 삶의 얼룩들은 사라지고, 마치 당신이 화려한 학생운동 투쟁경력 위에 잘 나가는 정치인, 고위관료, 대기업 임원, 전문직이기나 한 것처럼 가정하고 편지를 씁니다. 불편해도 참아주시길.  

 

학형도 86세대에 대한 요즘의 비판 때문에 생각이 많겠지요. 세상은 어느새 우리를 기득권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한국사회의 수많은 모순들을 우리 탓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특히 젊은이들이 우리 세대를 그렇게 혐오한다고 합니다. 기가 막히지요. 

 

물론 젊은이에게 희망 없는 세상이라는 건 우리도 압니다. 단군 이래 최고의 스펙을 쌓아도 대학 졸업 후 취직할 곳이 마땅치 않은 세상입니다. 운 좋은 일부를 제외하면 연애도, 결혼도 쉽게 꿈꿀 수 없는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고단한 원룸의 솔로 비정규직의 삶이 정규적인 삶이 되어버렸습니다. 나도 학형도 젊은이들의 삶이 안타깝습니다.

 

세상을 이따위로 만든 것은 재벌과 수구보수 정치언론세력들이라고 우리는 확신합니다. 그런데 청년들은 우리에게 돌을 던지네요. 이것이야말로 기득권자들의 음모가 아닐까요? 재벌과 독재의 후예들은 청년의 눈앞에 보이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들은 한국사회의 지배구조에 속하니까요. 반면 우리 세대는 그들과 직접 마주치는 꽤 높은 상급자, 심지어 인사권자이거나, 정책 결정 라인에 있거나, 저처럼 성적을 매기는 사람들입니다. 힘이 있긴 합니다만, 사실은 보잘것없지요. 기업 임원이 높아 보이지만 언제든 잘릴 수 있는 파리목숨 월급쟁이일 뿐입니다. 고위공무원단 소속이면 고위직인 건 맞지만, 정권의 기조를 거스를 힘 따위는 없습니다. 교수가 권력자처럼 보이지만, 잡무에 논문 압박에, 학교 등쌀에 얼마나 고달픈 인생인지요. 우리는 갑처럼 보이는 을들입니다. 

 

그러니까 진짜 힘은 재벌, 수구보수세력에게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아직도 이들이 지배하는 세상을 바꾸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분노는 대개 보이지 않는 ‘구조’보다는 보이는 ‘사람’에게로 향하는 법인가 봅니다. 청년들의 분노가 진짜 기득권이 아니라 우리 세대에게 향하는 데는 이런 사정이 있겠지요. 더욱 가열차게 재벌개혁, 수구보수세력의 궤멸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쓰다 보니 진짜 이렇게 믿어버리고 싶어질 정도로 막 설득력이 넘칩니다. 하지만 이게 진실의 전부는 아닐 겁니다. 학형과 저 사이에는 이야기해야 할 몇 조각의 불편한 진실들이 더 있습니다. 

 

86세대는 젊은 시절엔 민주화에 기여했고, 정치에 진출해서는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와 민주세력 재집권의 한 축을 담당했습니다. IMF로 박살 난 한국경제계에서 벤처 신화와 정보화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한류 창출에도 일익을 담당했습니다. 

 

우리 세대는 기성체제에 투항하지도, 그렇다고 투쟁하지도 않았습니다. 대신 경쟁했습니다. 새로운 가치를 내세우기보다는 그들보다 더 가치있고 유능하다는 걸 입증하려 애썼습니다. 86세대는 누구보다 재벌체제를 증오합니다만, 그건 재벌체제가 반시장적 특권 체제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86세대는 한국 역사상 최초로 자유경쟁시장의 진정한 찬미자가 된 세대입니다. 

 

86세대는 착취를 증오하고 노동과 사람이 소중하다고 믿었습니다. 이 믿음은 어느새 ‘인적 자본’의 경쟁력 강화에 대한 신념으로 바뀌어갔습니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를 거치면서 사람의 경쟁력에 대한 투자가 국가전략이 되었습니다. 대학에서는 이 무렵부터 상대평가 의무화, 학사관리 엄정화, 등재지 제도 도입, 논문업적 계량화 등 대학경쟁력 강화 정책과 담론이 뿌리내렸고, 이윽고 대학의 뿌리가 뽑히기 시작했습니다. 

 

86세대는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고 노래했습니다. 이어서 “산업화엔 뒤졌지만, 정보화엔 앞서가자”고 외쳤습니다. 투쟁에서 앞섰듯이 경쟁에서도 앞서고 싶어 했습니다. 한미 FTA협상 문제로 들끓던 무렵, 많은 86세대들이 “그럼 경쟁하지 말자는 거냐?”며 반대자들을 쇄국주의자로 몰아붙였습니다. 

 

86세대가 젊은 날 꿈꾸던 시대정신은 결국 ‘사람 사는 세상’이었지요. 그 꿈은 어느덧 ‘경쟁력 있는 사람 사는 세상’으로 바뀌어갔습니다. 물론 86세대답게 모두 함께 경쟁력을 키우자고 외쳤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경쟁력에 올인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86세대는 그냥 기성세대가 된 것이 아닙니다. 한국사회의 개발독재체제를 지금의 신자유주의 무한경쟁체제로 바꾸고 합리화하는 데 협력한, 심지어 선도한 지배체제의 일부입니다. 지금의 청년 세대는 86세대가 만들어간 세상에서 태어나 자란 이들입니다. 유모차를 떠나던 순간부터 우리가 경쟁에 내몰고, 다수를 경쟁에서 탈락시킨 세대이기도 합니다. 재벌과 투쟁이 아니라 경쟁하면서, 재벌과 함께 이런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86세대가 지배체제의 일부가 되었음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우리 세대의 가장 큰 문제는 이미 기득권자임에도 좀체 그것을 인정하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정권에 맞서 촛불을 들었다고 체제에 저항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이끄는 조직에서 촛불을 든 약자에게 취하는 태도가 그것을 결정합니다. 

 

지배체제의 일부로서 최소한의 책임감을 갖자는 말입니다. 데모도 못하는 놈들이라며 청년 세대를 비난하기 전에, 왜 그들을 투쟁보다는 경쟁으로 내몰았는지 반성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재벌과 독재의 후예세력을 방패 삼아 우리의 허물을 가리기 전에, 우리가 탈락시킨 청년 세대들, 나와의 경쟁에서 탈진한 동 세대의 벗들과 무엇을 나눌지, 세금과 연금을 얼마나 더 낼지 고민해야 한다는 자책이기도 합니다. 알고 보면 나도 서민이라며 쏙 빠지고 재벌만 탓해서는 세상과 화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도 개혁의 대상입니다. 

 

학형에게 책임지지 못할 말, 정치적으로는 무력한 말을 해버렸습니다. 그래도 학형이 공감해주면 좋겠습니다. 이대로 그냥 또 한 번의 기득권으로 역사에 기록되기에 그 무렵의 아스팔트는 몹시 뜨거웠고, 밀실은 아득히 어두웠습니다. 그때 염원하던 사람 사는 세상의 꿈을 지금의 현실에 비춰 보자고 굳이 학형이라는 호칭으로 당신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내게 힘이 생기면 세상을 바꾸리라고 다짐하던, 광장과 공장을 떠나 도서관으로 향하던 그 어느 새벽의 시린 결심을 같이 떠올려 보자고 말을 걸었습니다. 제 말이 준 상처가 몹시 미안합니다.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특집. 안녕, 86세대 2019년 6월호 월간참여사회 

1. ‘386세대’와 ‘86세대’의 차이 김선기

2. ‘86세대’에 새겨진 굴절의 역사 박세길

3. 386세대, ‘불안한 중산층’과 ‘세대불평등의 기득권자’ 사이에서 김형준

4. 투쟁에서 경쟁으로 달려온 86세대의 학형에게 조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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