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20년 03월 2020-03-01   1378

[듣자]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베토벤 <고별> 소나타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베토벤 <고별> 소나타

 

사람 사이의 우정은 때로 고귀한 예술로 승화되기도 한다. 베토벤(1770~1827)의 <고별(Les Adieux)> 소나타에는 베토벤과 루돌프 대공(1788~1831)의 애틋한 우정이 아로새겨 있다. 

 

1809년 5월,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대가 빈(Wien)을 유린했다. 베토벤의 후원자였던 루돌프 대공은 급히 피신해야 했다. 루돌프 대공은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의 동생으로, 나폴레옹에게 구체제 대표로 낙인찍힌 인물이었다. 베토벤은 열렬한 공화주의자였지만, 나폴레옹에 대한 환상을 접은 지 오래였다. 혁명의 꿈은 사라지고, 유럽은 탐욕스런 권력자들의 싸움터가 됐다. 나폴레옹의 전쟁은 무고한 젊은이들의 목숨을 앗아갈 뿐이었다. 베토벤은 루돌프 대공이 빈을 떠나기 직전 피아노 소나타 한 곡을 작곡하여 그에게 헌정했다. 그 곡이 바로 <고별> 소나타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Eb장조 <고별>

피아노 아르투어 루빈슈타인

이 음악을 듣고 싶다면? 

유튜브에서 Beethoven Adieux Rubinstein을 검색하세요 

 

 

신분과 나이를 뛰어넘은 그들의 우정 

베토벤은 이 곡을 그에게 바치면서 악보 표지에 “1809년 5월 4일 빈에서, 존경하는 루돌프 대공의 떠남에 즈음하여”라고 적었고 1악장 첫 부분, 세 개의 하강하는 음표 위에는 “안녕(Lebewohl)”이라고 써 넣었다. 느린 서주는 루돌프 대공과 헤어지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 하는 안타까움을 노래한다. 이 작별의 동기는 1악장에서 되풀이되며, 힘찬 알레그로는 베토벤의 애틋한 마음을 듬뿍 느끼게 해 준다.   

 

2악장은 ‘부재(Abwesenheit)’, 루돌프 대공이 떠난 뒤의 허전한 마음을 상상하며 작곡한 걸까? 42마디의 짧은 악장인데, 악상이 고르지 않아서 불안한 느낌이다. 루돌프 대공이 떠난 뒤 빈은 프랑스군의 폭격으로 쑥대밭이 됐다. 포성 속에서 ‘교향곡의 아버지’ 하이든(Haydn)이 세상을 떠났고, 베토벤을 따뜻하게 보살펴 준 에르도디Erdödy 부인의 집마저 파괴됐다. 베토벤에게는 루돌프 대공의 부재도 마음 아팠을 것이다. 2악장이 무척 짧은 것은 헤어짐의 나날이 길지 않기를 바란 베토벤의 마음 같다. 

 

3악장의 부제는 ‘재회(Das Wiedersehen)’, ‘매우 빠르고 활기차게’라고 돼 있다. 기뻐서 환호하듯 울려 퍼지는 팡파르에 이어 밝고 투명한 빛이 현란하게 교차하며 가슴 벅찬 재회를 예찬한다. 이 피날레는 해방과 승리를 노래한 음악, 가령 <시벨리우스 교향곡 2번>의 피날레와 비슷한 느낌을 준다.   

 

루돌프 대공은 1809년부터 베토벤에게 피아노와 작곡을 배웠는데, 그 역시 음악성이 아주 뛰어났다고 한다. 프랑스 유명 바이올리니스트 피에르 로드(Pierre Rode)와 함께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10번을 초연한 뒤 다음과 같은 호평을 받은 기록이 남아있다. 

 

“피아노 파트가 바이올린보다 훨씬 훌륭했을 뿐 아니라 작품의 정신을 더 잘 소화해 더욱 풍부한 음악성을 보여주었다.” 

 

또한 루돌프 대공은 100통이 넘는 베토벤의 편지를 소중하게 보관했다. 1808년 프랑스의 위성국이었던 베스트팔렌 왕실이 베토벤을 초청하자, 루돌프 대공은 빈의 귀족들을 규합하여 베토벤에게 4천 굴덴gulden의 연금을 지급하기도 했다. 베토벤이 빈을 떠날 것을 우려하여 후원을 강화한 것이다. 그는 “생계의 걱정에서 해방된 사람만이 위대하고 숭고한 작품을 창조하며 오직 그 분야에 헌신할 수 있다”는 말을 몸소 실천했다.  

 

베토벤루돌프

<고별> 소나타에는 베토벤(왼쪽)과 루돌프 대공(오른쪽)의 애틋한 우정이 아로새겨 있다

 

‘안녕’은 영원한 헤어짐은 아니기에 

두 사람은 단순한 예술가와 후원자로 머물지 않고 깊은 우정을 나눴다. 베토벤은 1812년, ‘불멸의 연인’과 이뤄질 수 없는 사랑에 괴로워했는데, 이 무렵의 심경을 루돌프 대공에게만 솔직하게 털어 놓기도 했다. 

 

1812년, 테플리체에서 괴테와 함께 산책하던 베토벤이 루돌프 대공의 행렬과 마주친 일화가 전해진다. 괴테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길가에 도열하여 대공에게 고개를 숙였지만 베토벤은 모자를 꾹 눌러쓰고 뒷짐진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세속의 권력자인 루돌프 대공이 두 사람의 위대한 예술가에게 먼저 예의를 표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린 것이다. 루돌프 대공은 마차에서 내려 그들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신분을 뛰어넘은 두 사람의 우정을 잘 보여주는 일화다. 

 

베토벤은 루돌프 대공에게 <고별> 소나타뿐 아니라 피아노협주곡 <황제>, 피아노 트리오 <대공>, 피아노 소나타 <함머클라비어> 등 중요한 작품 11곡을 헌정해서 감사를 표했다. 

 

구스타프 말러 교향곡 9번 D장조 4악장 ‘아주 느리게’

지휘 레너드 번스타인 

연주 암스테르담 콘서트허바우 오케스트라

이 곡을 들으시려면? 

유튜브에서 Mahler Symphony 9 4th Bernstein을 검색하세요. 

 

 

한편 음악사의 긴 흐름은 생명체의 진화 과정처럼 보인다. 아름다운 우정이 새겨진 <고별> 소나타는 음악사에서 멀리 구스타프 말러(1860~1911)의 교향곡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말러는 열네 살 때 데뷔 연주회에서 베토벤의 <고별> 소나타를 연주했고, 훗날 자신의 마지막 작품이 될지도 모를 교향곡 9번 피날레에서 이 소나타의 첫 대목, 즉 ‘안녕’이라고 표시된 세 개의 하강하는 음표를 인용했다.(위 링크 00:28부터) 말러는 이 세상과 헤어질 것을 예감하며 안타까운 사랑으로 베토벤 <고별> 소나타를 기억한 것 같다. 

 

“안녕, 안녕, 사랑하는 이 세상이여, 사랑하는 사람들이여….”

 

※ <듣자> 이채훈의 ‘클래식 편’ 연재를 마칩니다. 2014년 1월호부터 2020년 3월호까지 총 45편의 클래식 음악을 소개해주신 이채훈 필자와 <듣자> ‘클래식 편’을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글. 이채훈 클래식 칼럼니스트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와 클래식 음악 다큐멘터리를 연출했다. 2012년 해직된 뒤 ‘진실의 힘 음악 여행’ 등 음악 강연으로 이 시대 마음 아픈 사람들을 위로하고 있다. 저서로는 『클래식, 마음을 어루만지다』, 『클래식 400년의 산책』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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