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1년 10월 2001-10-01   1046

통일대축전에서 통일부장관 해임까지

통일운동에 던져진 고민

‘2001민족통일대축전’ 8.15 평양 행사를 둘러싼 최근의 논란은 생각할수록 착잡하다. 강정구 교수와 범민련 남쪽본부 관계자 등 7명을 감옥에 가둔, 매카시즘을 능가하는 수구세력의 광란…. 명백히 대북 화해협력정책에 대한 찬반 투표의 성격을 띤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 해임건의안 표결에서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찬성표를 던진 한나라당의 이른바 ‘개혁파 의원들’의 행동은 또 무엇인가. 그리고 ‘6.15 남북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민족공동행사 추진본부’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8.15평양 축전을 둘러싼 논란의 모든 책임을 수구세력과 보수언론에 떠넘긴 통일연대의 오불관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바닥 모를 절망이 가슴을 후벼판다.

사실 8.15 방북 대표단은 우에서 좌까지 이념의 폭이 넓은 337명으로 구성됐고, 이들의 방북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방북 대표단이 어렵사리 일궈낸 5개항의 공동보도문을 비롯한 각 계층·분야별 교류협력 합의·협의 내용은 논란의 와중에 국민의 관심권에서 저만치 밀려나버렸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8.15 평양축전을 둘러싼 격심한 논란은 한반도의 각 세력 사이에 얼마나 깊고 넓은 골이 가로놓여 있는지, 제도 통일과 사람 통일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지, 평화와 통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무엇을 고민하고 어떤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지, 참으로 많은 과제를 던져놓았다.

논란의 발단, 조국통일3대헌장기념탑 앞 행사

알다시피 북쪽은 시종일관 8.15행사 장소로 평양 통일거리 들머리에 새로 세워진 조국통일3대헌장기념탑 앞을 고수했다. ‘조국통일 3대헌장’은 ‘조국통일 3대원칙’(7.4남북공동성명의 자주·평화·민족대단결 원칙)과 전민족대단결 10대강령,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 등으로 이뤄진 것이다. 북쪽에서는 모두 김일성 전 주석이 제시한 통일방침으로 떠받들어지는 것으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97년 8월 4일 이른바 ‘8.15노작’에서 규정했다. 이 가운데 남과 북이 합의한 내용은 ‘조국통일 3대 원칙’ 하나뿐이다. 6?5공동선언 기념탑이라면 모를까, 보기에 따라선 남북공동행사를 치르기에는 지나치게 일방적인 장소라는 지적을 받을 만하다. 어쨌든 남쪽 추진본부는 실무협상 때부터 남쪽 여론을 들어 장소에 난색을 표시했지만, 북쪽은 끝내 ‘양보’하지 않았다.

사실 장소가 그렇게 큰 문제가 됐던 것은 남북 당국간 대화가 6개월째 끊긴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미국의 대북 정책 강경 선회라는 중대한 상황 변화가 있기는 했지만 남북대화를 일방적으로 중단한 북쪽의 태도에 대해 남쪽의 보수여론이 들끓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에 따른 상승기류를 타고 있던 지난해 10월 조선노동당 창건 55돌 기념행사 참관단 방북 승인 때보다 정부의 운신 폭이 좁아진 것은 불행한 일이었지만,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더군다나 지난해 10월은 조명록 북한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이 미국에 특사로 가 ‘북-미 공동 코뮈니케’를 만들어내어 북-미가 관계정상화를 위한 본격적 대화를 시작하던 때였다. 한마디로 지난해 10월과 올 8?5 즈음의 정세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달랐다.

시간은 다가오고…, 7대종단과 통일연대, 민화협으로 구성된 남쪽 추진본부는 행사를 이틀 앞둔 13일 고뇌에 찬 결단을 내렸다. 기념탑 앞 공동행사에 참가하겠다며 정부에 방북 승인을 신청한 것이다. 7대종단 대표들이 주도적인 구실을 했다. 그때 추진본부가 기자회견에서 밝힌 출사표는 한국의 통일운동가들이 오래도록 가슴에 새겨둘 만한 것이다.

“…우리는 3대헌장 기념탑 앞에서 민족공동의 행사를 치르는 것에 대한 국민과 우리 정부 당국의 우려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추진본부는 평양 행사의 성사가 남북관계 진전과 민간 교류협력 활성화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 아래, 대표단을 평양으로 파견하는 매우 어려운 결정을 내리게 됐음을 국민 여러분께 밝힙니다 … 민간 통일운동의 성숙함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바탕으로 우리 정부당국은 8.15민족통일대축전이 성사되도록 협력해주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 결정이 갖는 역사적 무게와 책임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8.15민족공동행사 이후 우리가 내린 결정의 성과와 한계를 깊이 성찰할 것이며…이 결정에 따르는 모든 책임은 전적으로 추진본부가 질 것입니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추진본부는 정부에 ‘기념탑 앞 행사에는 일체 참여하지 않는다’는 등의 내용이 담긴 각서-통일연대의 대표도 각서를 썼다-를 쓰고 8월 14일 오후 방북 승인을 받았다.

개·폐막식 참석 둘러싼 방북대표단의 혼선

8월 15일 오후 남쪽 대표단이 숙소인 평양 고려호텔에 도착했을 때 북쪽은 그날 오전에 마쳤어야 할 개막식을 미룬 채 남쪽 대표단의 참석을 강하게 종용했다. 대표단 집행부는 긴급 회의를 열어야 했다. ‘기념탑 앞 행사에는 일체 참석하지 않는다’는 우리 정부와의 약속, 그리고 북쪽의 행사 참석 종용 사이에서 ‘길’을 찾아야 했던 것이다. 회의는 길어졌고,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 사이 70∼80여 명이 기념탑 앞 개막식에 독자적으로 참석했다. 적극적으로 참석한 이도 있지만, 사정을 모르고 간 이도 적지 않았다. 사정이 어떻든 대표단 일부는 남쪽 정부와의 약속을 어긴 것이었고, 남쪽에서는 이 문제를 두고 논란이 일었다. 평양의 대표단원들 사이에도 집행부의 결정을 기다리지 않고 개별적으로 움직인 일부의 행동에 대한 평가를 놓고 내분이 일어났다.

16일 저녁 폐막식 행사 때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지만, 남과 북은 ‘편의적 해석’이 가능한 절묘한 절충점을 찾았다. 이때도 70여 명에 이르는 일부 대표단이 폐막식 행사장에 갔다. 그러나 북쪽은 남쪽 대표단의 도착을 기다리지 않고 폐막 선언을 했고, 곧 남쪽 대표단 일부가 행사장에 도착했다. 폐막식 행사에 참석한 것도, 참석하지 않은 것도 아닌 모호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그리고 남쪽 대표단 집행부는 문제의 기념탑 앞이 아닌, 기념탑으로 가는 통일거리 들머리(탑으로부터 2km 떨어져 있다)에서 폐막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북쪽 동포들을 대표단 전원이 환영하기로 결정했다. 이렇게만 끝났어도 이후의 격심한 논란은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나중에 개·폐막식 행사 참석 문제로 구속된 대표단은 한 명도 없었다. 개·폐막식 행사를 둘러싼 논란에서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점은 법리공방보다는 약속에 대한 신의성실의 원칙, 그것의 파기에 따르는 책임 등과 관련된 것이다.

이른바 방명록 파문

사태는 엉뚱한 데서 터졌다. 통일연대 소속으로 대표단에 포함된 강정구 동국대 교수가 8월 17일 ‘만경대 생가’ 방문 때 방명록에 “만경대 정신 이어받아 통일위업 이룩하자”라고 쓴 사실이 다음날 일부 조간신문에 비중 있게 보도됐다. 남쪽의 수구세력과 보수·수구언론이 들고 일어났고, 결과적으로 그냥 가라앉을 수도 있었던 평양 행사를 둘러싼 논란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이후 ‘마녀사냥’이 시작됐다. 길게 얘기하고 싶지 않다. 사상의 자유를 적극적으로 보장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근본 토대이며 남북의 동질성 회복과 화해협력을 확대·강화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만은 지적하고 싶다. 8.15행사를 둘러싼 한국사회의 논란은 그 자체로 심각한 문제는 아니다. 의견의 차이는 어디에서나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그러한 의견의 차이가 대화와 논쟁을 통해 드러나는가, 아니면 한쪽 의견에 의한 다른 의견의 억압으로 나아가느냐이다. 문제는 갈등해소 방식이고, 민주주의는 당연히 대화·논쟁과 함께 한다.

어쨌든 강 교수는 8월 21일 귀국하자마자 공안당국에 체포돼 곧 구속됐다. 연방제 강령을 ‘6.15공동선언’ 이행으로 바꾼 범민련 남측 본부 관계자들도 범민련 3자 연대회의에 참석했고 사전에 북쪽과 ‘교신’했다는 빌미로 구속됐다. 역사의 시계바늘은 바야흐로 6.15남북공동선언 이전으로 돌아갈 참이었다.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 해임건의안 표결

논란은 정치권으로 옮겨가 집권 민주당과 한나라당, 자민련 사이에 생사를 건 싸움이 벌어졌다. 결과는 148대 119로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건의안이 통과되었다. 훗날 역사의 정당한 평가를 위해 몇 가지는 반드시 기록해 두고 싶다.먼저 9월 3일 열린 225회 2차국회 본회의에서 이재오 의원(한나라) 등 132인이 발의한 ‘국무위원 임동원 해임건의안’이 상정된 뒤 윤두환 한나라당 의원이 한 제안설명을 보자.

“6.15남북공동선언 이후 현정부는 대북정책을 독점한 채 국가부담을 가중시키는 양보 일변도의 대북지원을 지속하였고, 그러면서도 할 말도 제대로 못하고 끌려만 다닌 저자세 정책으로 일관해 대한민국의 안보와 주권을 농락당하게 만들었고, 국가경제에 심대한 부담을 안겨주었으며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극심한 위기상황에 빠뜨려 버렸습니다. 통일부 장관 임동원은 국정원장 재직시 북한의 김용순 비서 방문기간 중 수행비서 역할을 자임하는 등 국가안보를 지켜야 할 국정원을 북한의 하수인으로 전락시킨 바 있으며 북한 선박의 영해 및 북방한계선 침범 시에는 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위원장으로서 북한 선박의 계속적인 영해침범을 사실상 묵인하는 등 군의 사기와 목표를 저하시키고 국민의 안보의식에도 심대한 혼란을 초래한 바 있습니다.”

대한민국 국회의 공식기록으로 남을, 막말로 점철된 이 제안설명이 말하고 싶은 것은 과연 무엇일까. 굳이 해석이 필요할까.

또 하나는 한나라당의 이른바 ‘개혁파 의원 10인’(이부영 김원웅 김홍신 조정무 손태인 서상섭 김부겸 안영근 이성헌 김영춘)이 9월 3일 발표한 ‘입장’이다.

“…여러 동료의원들과 상의하는 과정에서 심각한 논란과 이견이 있었지만, 해임안에 대한 찬성 입장으로 의견을 함께 모았다는 것을 밝혀둡니다 …국민들은 화해와 협력의 기본 노선에는 동의하지만, 현정권의 정략적 접근 때문에 정책의 기조에 대해서까지 의혹과 불신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습니다….”

10인 의원이 ‘입장’에서 밝힌 “임동원 장관 해임건의안 관철이 남북한의 화해와 협력 그리고 공존보다는 냉전적 대결 기조를 강화시키고, 나아가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긴장고조, 군비경쟁 국면으로 치닫지 않을까라는 의구심이 국민들 속에 자리잡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라는 문구는 쓸데없는 것이다. 이부영 의원은 표결 찬성의 이유로 △개혁지향적 의원들간의 행동통일 필요성 △(해임건의안) 반대는 자칫 현정부의 대북정책상의 오류들까지도 옹호하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 등을 내세웠다. 과문한 탓인지 이것이 무슨 말인지 아직도 이해가 되질 않는다.

10년 쌓은 공덕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 있는 것이 통일운동이라는 말이 있다. 어떤 통일운동가는 “통일에 대한 의지가 강할수록, 절제하고 자제하는 의지도 높아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 겨레가, 남과 북이 처한 현실이 너무도 엄중하기 때문일 것이다. 통일운동이 전위운동이 아닌 대중운동일 수밖에 없고 시민들의 생활세계로 ‘하방(下放)’을 감행해야만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리하여 고민은 결국 ‘통일을 갈망한다’는 민간 통일운동에게로 돌아온다.

남아 있는 것들

추진본부는 귀환 뒤 기자회견 등 다양한 방식으로 ‘방명록 파문과 일부의 사려 깊지 못한 행동’, 그리고 그를 둘러싼 논란을 통일로 가는 긴 과정에서 한번은 겪을 수밖에 없는 ‘홍역’으로 규정하며 대국민 사과를 거듭했다. 이와 함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대처를 호소했다. 그러나 그것이 수구세력과 수구언론의 비이성적 ‘공격’으로 초래된 상황을 완전히 뒤집지는 못했다. 민간 통일운동은 안타깝게도 이번 사태로 말미암아 합법적인 공간에서 비약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놓쳤다. 어찌할 것인가. 멈출 수 없는 걸음이기에, 통일운동은 다시 출발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당연하게도 이번 사태에 대한 진지하고도 깊이 있는 평가와 자기 성찰이 절실하다.

이제훈 본지 편집위원 한겨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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