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1년 11월 2001-11-29   801

생명,평화 그리고 나눔의 삼위일체

환경,평화운동가 오영숙 데레사 수녀

폭염에 절은 회화나무가 하루의 피곤을 머리에 이고 몸을 움츠리던 어스름 저녁, 누하동 환경연합 앞뜰은 새만금갯벌살리기 일일호프로 시끌벅적했다. 백합조개 익는 냄새와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한 앞뜰에 멀리 한 사람이 보인다. 여러 사람들과 바쁘게 인사하고 총총히 사라지는 사람. 수경 스님은 그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저이가 참 대단한 사람이여. 암인데 그래도 저렇게 열심히 햐. 참, 보기 드문 수녀여.”

지난 9월 11일 뉴욕 세계무역센터가 비행기테러로 폭삭 주저앉고, 10월 8일 아프간에 대한 미국의 보복전쟁이 시작됐을 때 전국의 756개 시민사회단체들은 반전평화캠페인을 벌였다.

‘테러는 싫다, 전쟁도 싫다, 우리는 평화가 좋다!’

찬찬히 살펴보니 맨 앞줄에 그가 서 있다. 깡마른 체구에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는 성직자. 부활하는 예수를 둘러싼 후광처럼 그의 주변에서도 은은한 빛이 퍼진다. 단박에 눈에 띄는 그는 오영숙 데레사 수녀(50세, 천주교여자수도회장상연합회 대표·사랑의 씨튼 수녀회)다.

가을햇살이 따사로이 어깨를 감싸던 오후, 성북동 심우장(만해 한용운의 유택) 길을 걷고 있었다. 한국판 비버리 힐스라 불리는 부자동네 성북동에도 가난한 이들이 고단한 몸을 뉠만한 게딱지같은 집들이 있었다. 참새 짹짹거리는 소리, 산들바람과 나뭇잎의 가벼운 떨림… 가파른 계단을 오르니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파란 하늘이 가깝게 서 있다.

서울시 성북구 성북2동 226-5 마가렛의 집.

“이곳은 성북2동의 초등학생과 중학생을 위한 공부방입니다. 인성교육과 학습능력 향상을 위한 교육내용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대문에 걸린 8절지 만한 화이트보드엔 또박또박 작은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그 글귀들 앞으로 작은 개미골목에 삐죽 고개를 내민 은행나무와 감나무, 작은 꽃밭은 이 집을 찾는 손님들과 첫 번째로 인사하는 절친한 이웃사촌이다.

평범한 수도자가 환경운동가로

공부방엔 대여섯 살짜리 아이들이 재잘거리고 있다. 가난한 성북동 아이들을 위한 공부방, 마가렛의 집. 자원봉사 교사들과 함께 꾸려 가는 이곳에선 초등부와 중등부 아이들에게 국어와 수학, 영어회화 그리고 피아노 등의 특별활동을 가르친다. 오 수녀가 이곳에서 아이들과 함께 지지고 볶고 살아온 세월은 3년. 책상 밑에 들어가서 공부하기 싫다고 떼쓰던 아이들이 걸상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는 모습만 봐도 가슴이 뿌듯하다.

“그런데 요즘은 공부방이 완전히 부업이 됐어요. 깔깔깔. 새만금살리기운동 때문에…. 내가 완전히 전도사가 돼 가지고 전국 어디든 불러만 주면 가요. 의식을 바꾸는 일을 하는 것이니까 당연히 해야지요.”

아픈 사람답지 않은 경쾌한 말투였다. 아무리 아파도 새만금에 생명을 주는 일이라면 마다하지 않겠다는 자신감 있는 태도를 보였다. 그런 그에 대해 언젠가 문규현 신부가 이런 말을 했다.

“아프던 사람이 새만금살리기운동하면서 병이 다 나은 것 같다니까요. 그래서 내가 보기에 오 수녀님은 새만금살리기운동을 더 열심히 해야 할 것 같아. 하하하.”

새만금생명평화연대 종교인 삼총사 문규현·수경·오영숙. 이 트로이카는 새만금살리기운동을 기화로 생명 평화 인권의 중요성을 전국에 알리고 있다. 무엇보다 평범한 수도자였던 오영숙 수녀가 환경운동가로 변신한 까닭에 대해 교회 안은 물론 교회 밖에서도 관심이 많다.

“제가 암환자였어요. 수술 받고 항암치료 하는 동안 참 고통스러웠습니다. 어떠한 냄새도 맡지 못하고, 책도 못 보고, 음악은 물론 일체의 소리도 듣고 싶지 않고…. 작은 안나의 집에서 그렇게 1년을 쉬었어요. 그러던 때 장상연합회 33차 총회가 있었고, 현장체험으로 제가 바다를 선택했어요. 아프기도 했고 좀 쉬고 싶었거든요. 제 고향이 부산이라 아마도 바다가 그리웠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새만금에 갔는데 거기서 문규현 신부님과 신형록 씨(새만금갯벌살리기부안사람들 사무처장)를 만난 거예요. 새만금의 실상을 알게 된 거죠. 환경문제에 대해 무식한 제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어요. 5000년∼8000년이 지나야 생성되는 갯벌을 쓸모없는 땅이라 치부하며 약 1조 원이 넘는 돈을 쏟아부어 담수호를 만들고, 또 간척한 땅에는 쌀이 남아도는 판에 농경지를 조성하겠다니… 그런 졸속행정에 분노가 치밀더군요. 어떻게 그다지도 미래를 계산하지 못하는 걸까… 참으로 답답했습니다. 당장 눈앞의 이익만 보는 인간의 탐욕이 결국엔 우리 전부를 죽이게 될텐데…. 암담했어요. 그래서 하루라도 먼저 이 운동에 동참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새만금살리기생명평화연대에서 주관하는 모든 행사에 빠지지 않고 참여했고 가능한 한 주변 수도자들의 동참을 이끌어내려 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렸던 ‘새만금 갯벌을 살립시다 SOS’ 피켓을 들고 시위하던 수녀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때도 모두 오 수녀가 장상연합회 차원에서 동원한 거란다.

“수녀님들이 수도자로서 사회 참여할 수 있는 부분은 한정적이에요. 개인이 결정해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거든요. 새만금살리기운동도 장상연합회 차원에서 결정하고 움직이니까 저도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이죠. 이렇게 수녀님들이 길거리로 나오니까 비판하는 사람들도 많아요. 수녀가 기도나 하지 웬 사회 참여냐고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어요. 하지만 신앙생활은 세상의 구원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 땅을 바로 하느님의 나라로 만들지 못하면 우리는 평생 억울하고 핍박받으며 살다가 죽게 될지도 몰라요. 살아 있는 사람들의 한을 풀어주는 게 우리 수도자들의 몫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알고 있는 고민과 문제를 절실히 기도할 때 오히려 그게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거라고 믿어요.”

전쟁은 무수한 생명을 죽이는 잔인한 행위다

홍길동 같은 사람. 수녀원에서 오 수녀에게 붙인 별명이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분노에 민감하고 정의롭지 못하면 큰소리를 내서라도 기필코 그 문제를 풀어내고야마는 다혈질. 오 수녀는 자신의 성격을 이렇게 표현했다. 암이라는 게 항상 재발가능성이 있지만 그걸 생각하면 아무것도 못하기 때문에 아예 잊고 산단다. 힘에 겨워 성북동 집을 오르내릴 때가 제일 속상하고, 펄펄 뛰어 계단을 오르내리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난 행복해’를 외친다는 그. 오 수녀는 살아 있는 날까지 하느님의 도구로 쓰이다 어느 날 부름을 받으면 그때 조용히 그곳으로 가면 된다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날마다 눈을 떠 성무일도를 바칠 수 있음에 행복하고 감사하다고.

그런 그가 최근엔 ‘반전평화운동’에 팔을 걷고 나섰다. 전쟁은 모든 생명을 죽이고 파괴하는 것이므로 어떻게 해서든 무고한 생명을 죽이는 일에 반대하고 나서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저는 1951년생이에요. 어머니가 절 임신한 채로 월남하셨어요. 산비탈에서 굴러 떨어져 복숭아뼈를 다쳤는데 용케도 제가 죽지 않았어요. 그래서 수녀님들은 절더러 정신적, 신체적 장애 없이 태어난 것도 주님의 은총이라고 말씀하세요. 저는 어릴 때부터 전쟁의 참혹함에 대해 듣고 자랐어요. 전쟁은 그 당장의, 그 후대의, 그 후대의 후대에까지 큰 아픔을 줍니다. 가족이 파괴되고 나라가 파괴되고 분열되는 거예요. 전쟁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 한을 계속 가슴에 품고 살지 않겠어요? 생각만 해도 아찔합니다. 전쟁은 무수한 생명을 죽이는 잔인한 행위입니다. 그리고 전쟁은 사람을 무감각하게 합니다. 한국전쟁 때 사람이 죽어 가는 것을 본 사람들은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만큼 사람을 메마르게 하는 거죠. 저는 이번 전쟁으로 미국이 후회할 일이 생길 거라고 봐요. 형식적으로는 미국이 이번 전쟁에서 이길지라도 내면적으로는 질 거예요. 그 이유는 아직까지도 미국이 왜 테러를 당했는지 모르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에요. 그 점을 미국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럼 지금과 같은 방식의 전쟁은 하지 않을 거라고 봅니다.”

탐욕과 이기를 버려야

그에게는 생내적으로 전쟁에 대한 공포가 있다.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을 격은 후로 더 심화됐다. 5·18광주민중항쟁은 아직도 그의 가슴 한켠에 분노로 남아 이글거린다. 1978년 수녀원에 입회한 그가 지원기와 청원기를 지나 수련기를 보낼 때의 일이었다.

“5월 17일 수녀원 행사가 있어서 시내에 빵을 사러 나갔어요. 그런데 분위기가 이상하더군요. 매캐한 냄새가 났던 걸로 봐서 사태가 심각해지고 있는 것 같았어요. 나중에 보니 완전히 전쟁상태였던 거예요. 서울로 전화도 안 되고 통신이 완전 두절됐던 거예요. 그때 수녀원에서 우리들은 모두 비상사태라고 생각하면서 한 방에서 자고, 쌀을 볶아 놓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어요. 헤어지면 어디서 만날 것인지 약속까지 했다니까요. 무엇보다 너무 화가 났던 건 텔레비전에 시민군이 돌 던지는 것만 나오고 정부군이 총칼을 휘두르는 건 나오지 않았어요. 한 남자가 우연히 창밖을 바라보다 총에 맞아 죽었다거나 임신부가 칼에 찔려 죽었다는 얘기가 나오는 판에 텔레비전에서는 시민군이 폭도라는 말만 나오는 거예요. 그때 우연찮게도 어머니가 편찮으셔서 부산에 갔는데 가족조차 제 말을 믿지 않았어요. 광주의 실상을 말했더니 우리 오빠는 수녀인 절더러 거짓말한다고 화를 내는 거예요. 그만큼 정보가 봉쇄됐던 거죠. 그로부터 몇 년 뒤에야 독일언론을 통해 비디오와 사진이 돌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나서 그때의 실상이 알려지기 시작했죠. 너무나 끔찍했던 기억입니다.”

그런데도 그 주범들이 외눈 하나 깜짝 안 하는 걸 보면 참으로 놀랍다고 오 수녀는 말한다. 그는 5·18 당시 정권을 찬탈하기 위해 일으킨 잔인한 살인행위에 대해 별 문제의식 없는 그때의 주범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분을 삭일 수 없다고 토로했다. 무엇보다 여전히 매스컴에 나와 자신들의 정치적 소견을 밝힐 때는 정말 아연실색할 정도라는 것.

“권력에 대한 인간의 아집은 한계가 없는 것 같아요. 전쟁을 일으키는 자들은 권력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할 수 있는 잔인함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을 한 사람에 대해 응당한 대가를 치르도록 하지 못한 우리 역사도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친일부터 독재까지 과거사에 대한 정리가 안 되니까 늘 우리의 정치경제는 도돌이표예요. 그러니까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기업윤리도 없고, 정상적으로 돈을 벌지 않은 사람들이 승승장구하니 사회적 신뢰가 무너지고…. 과거로부터 이어진 잘못된 뿌리가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고 생각해요.”

어차피 죽을 때는 빈손으로 가는 법. 오 수녀는 이기심에서 나오는 탐욕에 연연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자기만 잘 살려 한다고 잘 살아지는 것도 아니고, 모두가 잘 살아야 더불어 나도 잘 살 수 있게 된다는 진리에 눈을 떴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이번 아프간에 대한 보복전쟁도 미국이 진정한 의미의 강대국이라면 그냥 두어도 쓰러져 죽을 것 같은 약소국을 희생양으로 삼아 무차별 폭격을 퍼부어서는 안 되는 것이며 이 역시 미국이 탐욕에 눈이 먼 나머지 진정한 의미에서의 강대국 역할을 까맣게 잊은 것이라고 일갈했다. 더 늦기 전에 미국이 세상을 살리는데 기여한다면 세계평화는 어느덧 우리 앞에 와 있지 않겠느냐고 되물었다.

생명과 평화의 존귀함은 그가 살면서 일상 속에 새겨 넣는 화두다. 강의준비를 위해 참고했던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교회나 절 그리고 성당에 나가는 이유는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 였다고 한다. 그만큼 우리에게 ‘평화’라는 화두는 절박한 모양이라며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 절박한 평화를 얻기 위해 우리는 지금 무얼 하고 있는가, 그가 던진 화두다. 오히려 갈등과 분쟁으로 스스로 평화의 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국가와 국가 간의 경쟁과 이기심이 첨예화되면서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미사일과 총부리를 겨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발상이 평화를 깨뜨리고 있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소박하지만 그는 우리 일상생활에서부터 항구적인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개개인이 자발적인 노력을 펼쳐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야 하느님의 선(善)이 모두에게 전달될 것이라고 했다.

대화와 행동을 통해 공부방 아이들의 삶 속으로 평화의 기운이 저절로 퍼지는 것처럼 우리의 삶에도 자연스럽게 평화가 스며들었으면 좋겠다는 말도 곁들였다.

우리에게 평화를 주는 사도

1978년 처음 수도자의 길을 선택하고, 1987년 종신 서원한 그는 지금까지 살면서 ‘그리스도의 평화’를 잊은 적이 없단다. 전남 광주 학운동본당에서, 강진 성요섭여종고에서, 나바위성지에서, 부천소명여중고에서 그와 만난 사람들은 언제나 온화한 그를 ‘평화의 사도’로 기억하지 않을까.

그가 던진 마지막 당부다.

“가진 것 많은 자, 배운 것 많은 자들은 그것이 자기에게 주어진 특혜라는 걸 알고 자기들만을 위해 그걸 쓰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나눌 수 있는 만큼 함께 나눴으면 해요. 정당하게 벌어 가질 수 있는 재산이 얼마나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부 학식 명예 권력을 가난한 이들과 함께 나눠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 내 가족만 잘 사는 사회가 되지 말고 모두가 공평히 잘 살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이 땅에는 너무 가난한 사람들이 없는 사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적어도 인간의 존엄은 유지하고 살 수 있는 형편은 됐으면 해요. 서로 생각하는 마음, 친절한 마음이 사람들의 표정으로 전달되고 그것이 곳곳에 스미어 부드러운 사회가 됐으면 해요.”

세상사람들이 가슴에 담고 매일 저녁 묵상을 통해 생각해봐야 할 것들을 쉽고 명쾌하게 정리해주는 그는 가을에 만난 ‘거룩한 성자’였다.

인터뷰가 끝나자 몇 개의 보따리를 싸들고 새만금살리기에 대한 강연을 하러 제천으로 떠난다는 그는 주변에서 언제든지 쉽게 만날 수 있는 편안한 사람이다. 명동성당에서 농성하는 노동자들을 위해 밥을 하듯이 공부방 아이들을 만나고, 공부방 아이들을 만나듯이 새만금살리기 생명평화운동을 하는, 그는 결코 특별하지 않은 우리들의 선한 이웃이다.

“아, 누가 고추씨 뿌려놓은 걸 비둘기들이 쪼아먹는구나. 와, 이 얼마나 즐거운 외출인가. 제천에 가서 날 기다리는 조카를 만나야지.”

잠시나마 서울을 떠나는 것에 대해 기꺼워하는 동료 김영애 수녀에게 “누굴 만나, 안돼!” 하며 핀잔을 주던 오 수녀는 삼선교까지 내려오는 동안 김 수녀와 함께 토닥토닥 말장난을 했다. 가까이에는 주변사람들 그리고 멀리는 인류에게 생명과 평화를 건네기 위해 신발이 닳도록 뛰는 오 수녀. 헌신과 희생을 존재의 이유로 삼고 생명과 평화 나눔의 삼위일체를 위해 사는 그를 위해 세속의 영욕에 빠져 사는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가을의 길목에서 한편의 시를 선사해본다.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낮은 곳으로

자꾸 내려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 줄 것이 많다는 듯이

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눠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가을엽서’ 안도현

장윤선(참여사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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