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3년 01월 2002-12-30   488

“전세계 미선과 효순”을 위해 촛불을 들자

미선이 효순이 사건에 제가 처음부터 큰 관심을 가졌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7월 31일 이후로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이날 열린 미선이와 효순이의 49재에 참석하려고 서울 시청 앞으로 나갔지만 예상보다 적은 사람들이 대한문 앞을 메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날도 역시 흐렸습니다. 후원금 2만 원을 넣고 쓸쓸히 영정을 바라보았죠.

그리고 궤도차량에 탔던 미군 병사에게 무죄판결이 내려졌습니다. 제 메신저에 등록된 사람들도 굉장히 분노하고 있었습니다.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그 날은 새벽 6시에 이 글을 올리고서야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죽은 이의 영혼은 반딧불이 된다고 합니다. 광화문을 우리의 영혼으로 채웁시다. 광화문에서 미선이 효순이와 함께 수 천 수 만의 반딧불이 됩시다. 검은 옷을 입고 촛불을 준비해 주십시오. 누가 묻거든, 억울하게 죽은 우리 누이를 위로하러 간다고 말씀해 주십시오. 저 혼자라도 시작하겠습니다. 이번 주, 다음주, 그 다음 주, 광화문을 우리의 촛불로 가득 채웁시다. 평화로 미국의 폭력을 꺼버립시다.”

제안일 뿐이었고, 저 혼자서라도 나가서 불을 밝히고 싶었습니다. 다음날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컴퓨터를 켰더니 이 글은 인터넷을 돌고 돌아 제가 운영하는 사이트에 와 있더군요. 수많은 사람들이 미선이 효순이를 위해 “이 정도는 할 수 있다”는 공감대를 민주적으로 형성해 나가는 모습이었습니다. 어떤 강제도 없이 말이죠.

드디어 11월 30일 오후 6시의 첫 촛불시위. 종각에서 광화문으로 걸어가면서 제 눈에 하나둘씩 늘어나는 반딧불들이 보였습니다. 반딧불이 만든 바다였습니다. 저는 어느새 울고 있었습니다. 첫날 우리들은 이른바 ‘광화문의 아테네’를 만들었습니다.

다음날 신부님들의 단식과 노숙농성이 시작됐고, 작은 촛불시위가 자발적으로 이어졌습니다. 드디어 12월 7일. 수 만 개의 촛불이 57년 만에 처음으로 미국 대사관 앞을 우리 땅으로 만들었습니다. 저는 시민들에게 ‘이라크의 미선이와 효순이’를 위해서도 같이 슬퍼하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호응해 주시더군요.

아니나 다를까 언론과 정치권의 ‘국민 가르치기와 편가르기’가 시작됐습니다. “주한미군 철수 주장만은 용납 못 한다” “보이지 않는 손이 조종하고 있다” “부시가 직접 사과를 했다”는 선동들이 대표적이죠. 그러나 광화문과 인터넷에서 민주주의를 실천해나가는 시민들은 이런 방해를 하나하나 극복해나갔습니다. 깃발 든 사람과 들지 않은 사람들과의 화해가 이루어졌고, 『조선일보』를 비롯한 언론에 매서운 비판을 가했습니다.

앞으로 촛불시위가 어떻게 될 것이지 많은 분들이물어 오곤 합니다. 그러나 제안자에 불과한 저로서는 광화문에 모인 대한민국의 주인들이 스스로 결정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저는 광화문에서 하나의 촛불이 수십 만의 촛불로 늘어나는 꿈을 꾸었을 뿐입니다. 모두가 하나 되어 그 꿈을 실현해 나가고 있는 지금, 또 하나의 커다란 꿈을 꿉니다.

바로 전쟁을 반대하는 전 세계 시민들과 함께 평화의 반딧불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작은 일이라도 시작하려 합니다. 해외 네티즌들에게 광화문 촛불시위의 참뜻을 알리는 일 말입니다. 자격이요? 그냥 한 사람의 네티즌으로서요.^^

김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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