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3년 03월 2003-02-25   2423

고이화 : 1932년 제주해녀항일운동 참가자

‘작살 들구 싸웠어, 일본놈하고’


1931-32년 당시는 관제조합의 횡포가 극에 달해 있던 때였다. 일제가 만든 관제해녀조합은 해녀들이 체취한 해산물에 터무니없는 가격을 매겼다. 조합비, 입어료, 수수료 등 각종 명목으로 금품도 갈취했다. 제주해녀항일운동은 견디다 못해 터져 나온 생존의 몸부림이었다. 편집자주

춥다.

겨울이라 더 그렇다. 제주라지만, 그래도 겨울을 이기기는 어렵다. 바닷바람이 거세다. 막을 방패막이가 없다. 연두막 동산은 특히 그랬다. 항쟁 기념탑이 서 있는 곳, 동산엔 칼날 같은 바람이 들이쳤다. 이 바람을 맞으며 해녀 1000여 명이 모였다. 이젠 전설이 된 일이다. 물질하던 차림새 그대로 바람을 맞았다. 그들은 분노를 끄집어내고 있었다. 오래된, 삭혀만 왔던 분노였다. 1932년 1월. 그 날도 겨울이었고, 이렇게 추웠다.

1931∼32년 당시는 관제조합의 횡포가 극에 달해 있던 때였다. 일제가 만든 관제해녀조합은 해녀들이 채취한 해산물에 터무니없는 가격을 매겼다. 조합비, 입어료, 수수료 등 각종 명목으로 금품도 갈취했다. 제주해녀항일운동은 견디다 못해 터져 나온 생존의 몸부림이었다. 총 238차례의 시위에 연인원 1만7130명이 참여한 항쟁은 국내 최대 여성항일운동이었다. 벌써 70여 년이 지났다. 시간은 사람들을 하나둘 데려갔고, 이제 3명만을 남겨 두었다.

“난 제주도 말밖에 못해”

북제주군 하도리, 현무암 돌담집에서 만난 할머니의 첫 마디였다. 무슨 뜻인지는 곧 알 수 있었다. 할머니의 토종 제주말을 ‘육지부 젊은이’는 알아듣질 못했다. 심한 자괴감이 몰려 왔다. 인터뷰 후 녹음한 내용을 수 차례 반복해 들어도 소용없었다. 결국 60대의 주민 한 분을 소개받아 한 문장 한 문장 통역(?)을 부탁해야 했다. 인터뷰 도중에도 그저 듣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고개만 끄덕이면서, 할머니 눈에 가끔 맺히는 물방울만을 주시하면서.

고이화 할머니. 올해 88세다. 생존자 3명 중 한 명으로 항쟁 당시 16세 소녀였다.

“내 이름이 이화인디, 밸루(별명)는 ‘펑대기’라 펑대기. 상인들 앞에서 생북을 트는디(따는데) 내가 어려도 몸이 이렇게 크니까 펑대기라고 불렀어. 옛날엔 여덟 설(살), 아홉 설만 되믄 바당(바다)에 데리고 가 물질을 시켰다구. 내가 네차(넷째) 똘(딸)이라. 우리 어머니 마흔 넷에 낳은 망냉이라. 망냉이니까 철분시 몰랑(철부지처럼) 했지. 어머니 아버지가 옛날에 웡이자랑웡이자랑(아기를 달랠 때, 잠재울 때 하는 소리) 하믄서 나를 막 너무 사랑했다구. 그렇게 어렵게 자랐지만 아홉 설(살)이 돼도 두랑창(똑 부러지게 이야기를 못하는) 해 가지고 천지분별을 못 했어. 나난(나는) 아홉 설부터 물질을 시작했어. 그 나이에 지금 겉으면 십몇 만원인디, 아 그런 생북을 터가지고는 그걸 판 돈이면 우리 집 7월 제사 걱정 없이 지낼 수 있겠다고 좋아한 거여. 열 설 난 아이가 2월에 생북을 터서 7월 제사에 보태니까 칭찬을 받기도 했구. 그렇게 생북을 트면서 해녀가 됐단 말이야. 그때는 얼마나 어렵게 살았는지.”

체격이 아주 좋았다. 그만큼 목소리에도 기운이 넘쳤다. 타고난 신체를 갖는다는 것, 항상 도움만 되는 건 아니다. 항쟁 도중 할머니가 죽을 고비를 넘긴 것도 쉽게 눈에 띄는 체격 조건 때문이었으니까.

“나가 26년을 일본놈들 밑에서 해녀질 했어”

이른 봄 고향 산천 부모 형제 이별하고 / 온 가족 생명줄을 등에다 지고 / 파도 세고 무서운 바당으로 돈벌이 간다 (<해녀노래> 3절, 강관순 작사)

제주도 해안지역에서 여자는 곧 해녀였고, 해녀는 곧 여자였다. 바다가 없으면 살지 못했고, 살려면 물질을 해야 했다. 1890년대 초부터는 경남을 시작으로 육지 원정물질도 나갔다. 조금이라도 더 벌기 위해서였다. 일본이 선진기술을 이용, 제주 어장을 싹쓸이해 버려 해산물이 급감한 것도 이유였다. 강원도, 황해도, 함경도 등 국내 뿐 아니라, 일본 대마도, 중국 청도, 소련 블라디보스토크에까지 원정물질은 이어졌다. 1930년대 출가해녀는 제주해녀의 절반인 4000명을 넘었다. 고이화 할머니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원산, 청진, 대마도, 백령도 등 바다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갔다.

“열다섯 나난(나던 해는) 해녀질을 워낙 잘 해 노니까 거제도 가서 물질을 했는디, 그래도 어머니 아버지 너무 보구 싶어서 5월에 되돌아갔구. 스물 넷에 대마도 갈 적에는 임신을 하구 있었어. 임신을 하구서두 여기저기 잘 댕기구 생북(전복)도 잘 트는디(따는데), 신랑이 이젠 해녀질 하지 말래. 내가 노래 가지구(놀래 가지구) 난 물질하러 안 보내 주믄 집 나가분다 그랬다니까. 그래 정월 열아흐랫날 대마도 가서 물에 들어가 보니까 엉덩이(큰 바위 밑)에 생북이 두랑두랑(주렁주렁) 붙어 있드만. 근디 그노무 시키 대마도 생북은 사람만 보믄 노라나(놀라서 도망가). 발발발 거리믄서. 그래 손으로 막 튼 거라. 그러다가 무신가에 쏘여가 죽을 뻔하기도 했구.”

타지 생활이 쉬울 리 없다. 여성이 살갗을 드러내고 일한다며 멸시하는 건 다반사였다. 제주출신이라 더 했다. 일본에서는 물론이고 조선 본토에서도 ‘제주년’, ‘보작이년’이라며 차별했다. 여기에 업자들의 수탈이 더해져 출가해녀들을 한층 더 괴롭혔다. 해녀들을 모집하는 일본인 업자들은 모집 시 해녀들에게 빌려준 돈에 고리의 이자를 붙였다. 나중에는 눈덩이처럼 불어난 돈을 갚지 못해 귀향조차 못하는 해녀들도 많았다. 저울 눈금을 속이거나, 수익금을 제대로 분배하지도 않았다. 해녀들이 번 돈의 6할을 선주가 착복했기 때문에, 나머지 4할을 6∼7명의 해녀들이 나눠 가져야 했다.

“열여섯 나난 일본 북해도 사람들이 충남서 물질 할 해녀들을 모집했어. 나가 26년을 일본놈들 밑에서 해녀질을 했어. 봉사를 한 거지. 그때게는(그때에는) 일본놈들이 해녀들을 많이도 안 쓰고, 한 배에 여섯 정도썩 쓰는디 내가 물질을 원체 잘 해 노니까 여섯 사람 하는 물질을 내가 혼자 다 했어. 열여덟부터는 대마도를 갔는데, 거기서도 해녀질을 잘 하니까 이번에는 일본 어민들이 날 싫어해서 죽일려고 해. 물질한 걸 망사리 채 빼앗아가기도 하구. 그래도 아무 말도 하질 못 해요. 그땐 일본 세상이라 노니까.”

이런 상황에서 제주도 해녀어업조합이 탄생했다. 1920년이었다. 해녀들의 권익을 보호한다는 것이 설립 목적이었다. 그러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20년대 중반부터 제주도사(현 제주도지사)가 조합장을 겸임하기 시작한 것이다. 도사가 일본인이었기에 조합의 어용화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조합은 해녀의 권익보호 기관이 아니라, 이중 수탈 기관으로 전락했다. 해녀들이 채취한 해산물을 공동판매 하지 않고, 특정 상인을 지정해 독점판매권을 부여했다. 심지어 바다 속에서 아직 채취하지도 않은 해산물에 대해서도 판매권을 지정했는데, 가격은 시가의 절반 수준이었다. 조합비는 물론이고, 거간 사례비, 선주 임금까지 해녀 수입에서 공제했다. 사정이 이래도 조합에 가입하지 않을 자유는 없었다.

“그때겐(그때엔) 생북을 잡아도 돈 한푼 주동(한푼밖에 안 주고) 일본놈들이 가져가구, 이제 고동을 잡아도 일본 공장에 가져가서 간스메(통조림) 맹글구. 내가 열 여섯 때까지 잡은 것을 일본놈 공장에 다 희사를 한 셈치라(셈이라). 일본놈들한테 다 피뽈린 거라.”

“선생님들이 일본놈들 상대로 싸우라고 가르쳤지”

반감이 점점 고조됐다. 일은 성산포에서 터졌다. 조합서기와 상인들이 결탁해 시가의 절반에 불과했던 우뭇가사리의 근당 지정가격 20전을 18전으로 끌어내린 것이다. 경찰은 항의하는 해녀측 대표 4인을 검거, 29일의 구류에 처했다. 항의 격문을 배포한 청년들도 검거됐다. 1930년에 일어난 이 사건은 농민회 해녀회 등이 관제조합에 반발, 조직화하는 계기가 됐다. 그리고 1년 후, 사건이 다시 터졌다. 조합이 구좌면 하도리산 감태를 한 일본인이 시가의 4할 가격으로 매수할 수 있도록 조치한 것이다. 당시 감태는 제주해녀들의 중요한 소득원이었던 만큼 분노도 컸다.

참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반복되는 조합의 기만에 31년 6월부터는 직접 투쟁에 들어가기로 결의했다. 목표는 관제조합 분쇄였다. 1931년 12월 20일 하도리 해녀들은 제주읍의 조합사무소 점거농성을 계획했다. 10일치 양식도 준비했다. 경찰을 피하기 위해 육로 대신 해로를 택할 만큼 해녀들은 용의주도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폭풍 때문이었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해녀들은 세화리 장날을 주목했다. 해를 넘긴 1932년 1월 7일, 하도리 해녀 300여 명은 호미와 비창을 들고 세화리 장터에 도착했다. 수천 군중 앞에서 집회를 열고 조합본부를 향해 행진했다. 당황한 해녀조합 지부장이자 구좌면 면장이 달려나왔다. 책임지고 해결해 주겠다는 그의 약속에 해녀들은 일단 해산한다.

해녀들의 시위가 치밀하게 전개된 배경에는 지역 청년들의 지원이 있었다. 사회주의를 바탕으로 민족해방운동을 하던 이들 청년들은 조선공산당 제주 조직인 ‘제주 야체이카’ 멤버들이었다. 제4차 조선공산당 사건의 여파로 29년 8월 노출된 제주 야체이카는 경찰의 검거를 피해 구좌, 대정, 한림 등을 중심으로 지하로 잠적했다. 구좌에서도 이들은 ‘혁우동맹’을 조직, 농민운동과 청년운동에 힘을 쏟았다. 특히 이들은 야학을 통해 해녀들을 교육했는데, 해녀항쟁의 주역이었던 부춘화, 부덕량, 김옥련이 바로 이들의 제자였다. 해녀들을 상대로 한 교사들의 교육은 당시 고이화 할머니가 살고 있던 우도에서도 이루어졌다.

“일본놈들이 우리를 조그만히 여기니까, 우리 해녀들 뒤에서 선생님들이 일본놈들 상대로 싸우라고 했어. 그렇게 안 하믄 항상 우리가 일본 사람들한티 당하니깐 이것을 고쳐야 하겠다고. 핵교 선생님들만으로는 일본놈들 하고 싸울 힘이 없으니까 이제 해녀들이 서시해서(싸움을 걸어서) 같이 싸움을 해야 우리 대한민국을 살릴 수 있다 이래 한 거지.”

“일주일 동안 학교 운동장서 항일운동 연습했어”

면장은 1월 7일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조합은 대신 해녀들을 무시하듯 해산물을 지정판매 하겠다고 공고했다. 판매일인 12일은 조합장인 다구치 제주도사가 구좌면을 순시하는 날이기도 했다. 해녀들은 이 기회에 도사에게 직접 요구조건을 전달하기로 했다. 호미, 작살, 비창을 들고 해녀복장을 한 1000여 명의 해녀들이 노래를 부르며 세화리 장터로 몰려들었다.

“배운 것 없는 우리 해녀 가는 곳마다 / 저놈들의 착취기관 설치해 놓고 / 우리들의 피와 땀을 착취해 간다 / 가이없는 우리 해녀 어디로 갈까.” (<해녀노래> 4절)

제주해녀항일운동이 절정으로 치닫는 순간이었다. 순식간에 제주도사의 자동차를 포위했다. 경찰들이 칼을 휘두르며 위협했지만 해녀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형세가 험악해지자 결국 다구치 도사는 해녀들의 요구조건을 수용하겠다고 약속했다. 요구조건엔 ‘일체의 지정판매 절대 반대’ ‘미성년과 40세 이상 해녀조합비 면제’ ‘도사의 조합장 겸직 반대’ ‘일본 상인 배척’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해녀들은 만세를 불렀다. 이긴 것이다.

그러나 승리는 쉽게 주어지지 않았다. 고등계 형사와 경찰들이 보복을 가해왔다. 1월 23일 해녀항쟁을 지도했던 주동자들을 체포, 호송하기 시작했다. 해녀들과 동민들 1500여 명이 이 소식을 접하고 자동차를 습격, 검속자 탈환을 시도했다. 궁지에 몰린 경찰들은 주재소 지붕에 올라가 발포하는가 하면, 전남경찰부에 병력 증원을 요청했다. 이 과정에서 중심 인물들의 옷에는 붉은 물을 뿌려두었다가 이를 표식으로 재검거에 나서기도 했다. 이후 곳곳에서 검거저지 및 체포자 석방요구 시위가 산발적으로 전개되다가 27일을 기점으로 해녀들의 저항도 진정된다. 100여 명이 체포된 상태였다.

주동자 체포에 나선 경찰들은 이후 우도에 피신한 사람들에게까지 검거망을 좁혀 갔다. 이때 우도 해녀들이 저지하고 나섰다. 고이화 할머니가 항쟁에 참여한 것도 이때였다. 몸과 맘에 지워지지 않는 끔찍한 상흔을 얻은 것도.

“열여섯 나난(되던 해) 음력 3월인데 그때 국민학교 운동장에서 옷 벗어 놓구 빤쓰만 입구, 물적삼 입구, 쪼끄만 눈 안경 씨구 항일운동을 연습하느라구 왔다갔다 했어. 거기다 비창 들구, 호미 들구, 작살 들구, 태왁 매구 보름 동안을 훈련한 거라. 그렇게 훈련을 해 가지구 3월 나니까 어느 날인지 선생님들은 다 고바불구(숨어 버리고) 하도서도 아홉 명 남자들이 다 고바부렀어. 우리 해녀들만 270명이 풍선 10척에 나눠 타고 종달리 모래사장 순북이왓(순북이 풀밭)에 가서 비창, 호미 들구, 작살 들구 아잤으니까(앉았으니까) 3월이라도 우때기(윗옷)를 벗어 노니까 빡빡 떨어가지구 너무 추웠어.

그러다가 일본 경찰들 한 300명이 차를 타고 오랑(와서) 이놈들이 위협할라구 헛총을 빵빵 쏘니까 우리가 겁이 나서 다 자빠졌어. 근데 내가 열여섯이었지마는 덩치가 제일 크고 눈에 쉽게 띄니까 그놈들한테 얻어맞았어. 일본놈이 가죽채찍으로 확 후려치믄서…. 우리 어머닌 내가 죽었시까부난(죽었을까봐) 시껍했는디, 날 우도로 데려다가 검은 쇠똥을 맞은 디다가 울려부니까(뜨겁게 데워서 찜질하니까) 겨우 살았지.”

항쟁 결과 제주전역으로 항일운동이 확산됐고, 제주도사에게 제시한 12개 요구조건 중 9개가 받아들여지는 등 실질적인 성과를 얻어내기도 했다. 반면 할머니의 몸에 남은 채찍자국 만큼이나 항쟁의 후유증도 컸다. 12명의 청년들이 실형을 받았고, 김옥련 등 시위를 주도한 해녀 3명은 6개월 후 미결수로 나오기까지 극심한 고문에 시달려야 했다. 이 일로 노출된 제주 야체이카도 결국 와해되고 만다.

그 후 70년 세월이 흘렀다. 제주해녀항일운동은 제주에서 일제시대 최대여성항일운동, 역사상 최대 어민쟁의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제주 밖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보훈처는 항쟁 중심인물들에 대한 두 차례의 독립유공자 신청을 모두 거절했다. 사회주의자들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들은 석방 후에도 감시를 피해 외지로 떠돌아야 했고, 가족들은 연좌제에 시달려야 했다. 국가는 벙어리가 되기를 강요했고, 기억을 깊이 묻으라 했다. 시간이 지나도 달라진 건 없다. 올해도 기념사업회는 세 번째 독립유공자 신청을 시도한다. 사회주의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3명은 빼고서.

고이화 할머니에게도 시간은 계속 흘렀다. 물질도 계속했고, 스물두 살엔 결혼도 했다. 그러다 48년 4·3을 맞는다. 시동생 중 한 명이 사회주의 활동을 하다 입산하는 바람에 시집 식구 6명이 죽임을 당했다. 할머니에겐 겪어내야 할, 살아내야 할 역사가 아직도 많이 남았던 것이다.

“4·3 때 아방도 화병으로 죽었지”

“우리 아방(남편)도 그 화병으로 죽었어. 나가 서른, 아방이 서른 하나였다구. 음력 4월 초사흘날 막 아파가지구 피가 바각바각 나오든디 아방이 다른 소리는 허지 않구 ‘이제 내가 죽어불거들랑 당신이 의지할 사람일랑 아무도 없으니까 아이들을 고아원에다가 맡기고, 남편을 정해 가’래(재혼하래). 아, 그 소리를 들으니까 기가 맥혀. 아이구 내가 죽어두 이 애기들 키워야지. 애기들 일부러 못 먹이는 것도 아니구, 애기들한티 공격들어도(원망들어도) 좋다, 그렇게 마음을 먹었어. 그래 아기들을 무럭무럭 키와내 하나는 대학교까지 시키구, 둘은 고등과 시키구, 둘은 중학교만 시켰어. 근디 애기들은 그것이 아니라. 애기들이 날 공격할 때게(나를 원망할 때) ‘어머니 물질 잘 핸(해서) 우리가 벌어먹고 산 것이 아니다. 우리 할아버지 번 돈으로 먹고살았지’ 이래. 이거 기막힌 말이라. 이 말이 제일 가슴 아프다니까. 나가 돈을 일부러 못 번 것이 아닌데.”

서른 살에 7남매의 엄마가 됐다. 가난했다. 언제나 그랬다. 가난해서 파래밥, 조밥을 먹으며 자랐다. 가난해서 아홉 살부터 물질을 했고, 가난해서 열다섯 살부터 원정물질을 나갔다. 할머니에게 ‘가난’은 아직도 눈가에 물기를 번지게 하는 단어다. 가난하게 살아서라기보다, 어린자식들의 원망을 담은 단어라 그렇다.

“요새 테레비 보니까 무신 국회놈들 이 도둑놈들, 어쩌구저쩌구 싸움만 하믄서 4·3사건 때 죽은 사람들 보상금 하나도 안 주는데 무슨 이유 따문이냐. 내가 지금 팔심여덟인데 4·3 보상금 나오믄 애기들한티 ‘이제 보상금 나왔으니까 이거 받으라’ 하고 주고 죽었이믄 내가 한이 없겄네.”

할머니는 ‘대상군’이다. 해녀 중의 해녀인 ‘상군’, 상군 중에서도 으뜸 상군이 대상군이다. 가난했지만 지금껏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살았다. 요즘도 ‘너무 착한 며느리’ 눈을 피해 당근밭에서 일한다. 가끔씩 물질도 하고 있다. 할머니는 바다가 제일 좋다고 한다. 지긋지긋할 법도 한 그 바다가 말이다. 끝까지 ‘육지부 젊은이’는 말귀를 못 알아듣고 있었다.

“신랑쾅은(과는) 사랑을 안 해도 바당(바다)쾅은 사랑을 해야 했어. 아, 신랑이구 뭐이구 바당에 가서 생북 트는 맛이 질이라. 또 나난 해녀들 하구 장난을 잘쳐. 그러니까 신랑 생각이 안 나. 바당 가서 장난치는 것이 제일 재밌어. 신랑이 ‘이 바당 가시나’ 해도, 난 신랑 바당당하고 우리 해녀들하고 있으믄 제일 좋지, 다른 거 좋은 거 하나도 없다구. 그렇게 내가 이 세상을 지내왔는디.

이문영 본지 객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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