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4년 01월 2004-01-01   958

[특집]<2004년 한국사회, 참여만이 희망이다!> “참여정부에 시민이 참여할 수단이 없다”

참여정부, 멍석부터 깔아야


노무현 정부는 과거 권위주의적 통치에서 벗어나 시민이 참여하는 시스템을 통한 국정운영을 강조해 왔으나 시민참여 시스템에 대한 시민들의 평가는 실망뿐이다. 이에 참여연대는 시민참여 활성화와 시민견제수단 마련을 위한 제도개선 과제를 추진 중이다. 편집자 주

참여라는 말만큼 싱거운 말이 없다. 참여? 좋은 말인데 뭘 어쩌란 말인가?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은 거의 예외 없이 어려서부터 참여하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살았다. 새마을 운동에 참여해라, 사회정화 운동에 동참해라, 반상회에 참여해라, 방위성금 모금에 동참해라…. 그래서인가? 참여란 말 속에는 역설적이게도 계몽과 훈계의 냄새가 난다. ‘멸사봉공’식의 전체주의와 관료주의의 냄새가 나는 것이다. 때문에 참여는 ‘범생이’들의 전매특허쯤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무늬만 민주국가‘대한민국’

참여가 말의 참 뜻과는 달리 고리타분하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참여로 얻어지는 신명나고 통쾌한 경험, 실질적인 변화의 체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시민 스스로 만들어낸 참여의 경험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살펴보면 한국처럼 시민의 힘이 역동적으로 발휘되는 나라가 흔치 않을 정도다. 한국의 ‘유별난 시민’들은 87년 6월 항쟁, 2000년 낙선운동, 월드컵 붉은 악마, 촛불집회 같이 세계인들이 경탄해 마지않는 거대한 에너지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특히 인터넷의 보급 이후 이러한 역동성은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

그런데 이들 역동적인 시민참여의 대사건들은 하나 같이 ‘제도권의 밖’에서 ‘변화하지 않은 낡은 제도와 관행에 대한 도전’의 성격을 띠고 분출된 것이다. 독재에 반대해서, 변화하지 않는 낡은 부패정치의 독점구조에 맞서서, 미국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못 해온 냉전시대의 관행에 대항해서 터져 나온 대사건들인 것이다. 붉은 악마 현상을 두고도 우리나라에 제대로 된 시민축제문화가 없던 것에서 발현되었다고들 지적한다. 요컨대 참여를 말하면서도 참여를 허용하지 않는 현실세계의 구조에 대한 저항으로서 분출한 셈이다. 그러고 보면 한국사회는 참여와 자발성을 봉쇄하는 현실과 진정한 참여를 열망하는 시민의 욕구 사이의 갈등과 긴장이 아주 큰 사회라 할 수 있겠다. 성역과 기득권, 시민사회와 분리된 제도권이 엄존하는 관료적 사회. 대한민국은 민주국가의 이름은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썩 민주적인 국가라고 할 수 없다.

‘참여의 제도화’의 필요성이 여기서 도출된다. 권력기관들이 관료주의적 발상에 기초해서 시민들을 손쉽게 동원하기 위해 참여를 강요하는 것은 참여민주주의가 아니다. 행정편의주의일 뿐이다.

‘참여의 제도화’란 진정한 의미에서 시민사회와 국가기구의 협치(governance)를 정착시키는 것이다. 시민 앞에 자신을 공개하고, 시민의 참여에 의해 점검 받으며, 시민에 의해 평가받고 심판받는 역동적 시민참여나 이를 보장할 국가적 제도적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참여의 제도화이다. 이 점에서 참여민주주의는 정부나 기업, 정치인 등 권력자들에 대한 시민감시와 통제의 제도화라 할 수 있다.

이상한 발상 ‘참여정부’ NO, ‘반참여정부’ YES

많은 시민들이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이 되는 그 역동적 과정을 상상하면서, 집권 후에도 그런 종류의 쌍방향 참여민주주의가 싹트기를 기대했었다.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 스스로가 강조한 대로 참여가 제도화되고 시스템이 되어서, 명실상부한 ‘토론공화국’이 만들어지기를 진심으로 원했다.

그러나 1년이 지난 지금 참여정부는 그 이름에 값하는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취임 초 청와대에 국민참여 수석실을 신설하고 참여의 제도화 방안을 모색하겠다고 했지만 정부에 여러 가지 과거와 비슷한 위원회들이 신설되는 것 외에 이렇다할 방안이 제시되지 않고 있다. 정치제도개혁, 지방자치제도개혁, 사법개혁, 반부패개혁, 행정절차개혁, 교육개혁 등의 이름으로 정부 각 부처와 청와대 실행팀에서 추진하는 산발적 제도정비 노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참여정부에 걸맞은 일관된 비전 속에서 제기되지 못하고 있고, 그나마 각각 추진되는 것들도 이러저러한 현실에 부딪혀 흐지부지 되고 있는 실정이다. 심지어 ‘참여정부’라는 슬로건 자체를 의심케 하는 반 참여적인 사례도 적지 않다. 군민 95%이상이 반대하는 원전수거물센터 건설을 군수가 독단적으로 결정했는데 참여정부는 군수의 그릇된 선택을 배타적으로 옹호한 부안사태, 우리 자녀들의 신상정보가 시디(CD)로 구워져 전국에 배포되는 것에서 학부모의 의사를 묻지 않은 네이스(NEIS)파동에서 우리는 참여민주와는 배치되는 노무현 정부의 독단을 발견할 수 있다. 국민 60%가 반대하는 국익의 이름으로 추진하는 정부의 이라크 파병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참여정부에 시민이 참여할 수단이 없다? 있다!”

참여민주주의는 민원 채널을 다양화하거나 정부에 이러저러한 위원회와 자문기구를 여럿 설치하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시민참여의 제도화’는 각 국가 사회영역에서 시민의 직접적 참여와 의견개진을 불가피한 조건으로 하는 운영시스템을 마련하고, 정치.경제.사회적 권력의 남용과 부정부패에 대한 시민의 감시와 견제를 가능케 하는 제도적 수단을 마련하는 일이다. 또 시민들이 제반 입법, 사법, 행정과정에 직접 참여하는 기회를 확대하고, 정책의 입안.결정.시행.평가의 사전과 사후에 시민적 감시와 통제가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의 일상을 돌아보자. 우리의 일상은 주로 ‘생계와 여가’, 혹은 ‘생산과 소비’의 연속으로 단순화 할 수 있지만, 그 속에서 우리들은 매우 복잡한 사회적 관계를 맺고 있다. ‘나’는 유권자, 납세자, 소비자, 노동자, 여성, 주민, 학부모 등 다양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이 각각의 ‘나’가 그에 합당한 자기 권리를 제대로 찾아나가고 있는가, 그것을 실현할 제도적 공간을 보장받고 있느냐가 바로 참여민주주의 또는 참여시스템의 핵심문제이다.

유권자의 참여로 정치 투명성 높여야

우선 정치를 바꿀 수 있도록 유권자에게 힘을 주어야 한다. 지역감정에 기반을 둔 부패정치의 독점구조에 맞설 수 있도록 유권자 심판과 참여 수단을 대폭 확대해야 하고 정당 활동과 의정 활동의 투명성을 높여야 한다. 우선 낙천낙선운동에 대한 규제를 대폭 완화함으로써 유권자 정치참여운동의 자유를 확대해야 한다. 이래야 선거가 후보자들의 잔치가 아닌 유권자들의 잔치가 될 수 있다. 또 후보선출 과정에서부터 함량미달의 정치인들을 배제시킬 시민참여수단이 필요하다. 국민참여 방식을 포함한 상향식 후보선출이 가능하도록 정당구조를 개혁하는 것이 그것이다. 불법대선자금 조달이 정치인의 능력을 평가하는 우선적 기준이 되는 조건 하에서 정치개혁은 공염불에 불과하다. 깨끗한 정치문화를 만들기 위한 전제로서 정치자금 입출금에 대해 완전한 공개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제도를 바꾸고, 유권자에 의한 소액다수 정치자금 후원제도가 정착되기 위한 정치자금법 개정이 이뤄져야 한다.

시민의 직접참여를 보장해야

참여의 본령은 풀뿌리 민주주의에 있다. 지방분권과 함께 이를 견제할 주민참여제도가 확대되어야 한다. 노무현 정부 들어 중앙집권화를 개선할 대안으로 분권과 자치가 강조되고 있다.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다. 그러나 지방으로 권력을 분산하는 것과 아울러 분권화된 공동체 내에서의 참여민주주의를 통해 지방권력이 통제되도록 하는 일이 시급하다. 지금의 지방자치에는 주민소환, 주민투표와 같은 핵심적인 주민참여제도들이 도입되어 있지 않다. 예를 들어 부안에 원전수거물센터를 유치하는 것을 독단적으로 결정한 부안군수에 대해 부안주민들이 주민소환이나 주민투표를 통해 반대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주민감사청구제도나 주민발의제도도 지나치게 까다로운 요건 때문에 실효성이 낮은 실정이다. 보완이 필수적이다.

“인심은 곳간에서, 참여는 정보로부터”

국민 또는 주민들이 정책결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많은 정보에 쉽고, 빠르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자유롭고 개방적인 정보의 유통은 참여민주주의의 필수적 전제 조건이자 정책결정 과정의 투명성과 책임성을 높이기 위한 토대이다. 따라서 정책결정과정의 투명성과 책임성을 확보하기 위한 제도가 강화되어야 한다. 현행 국민들이 이용하기 어려워 사실상 ‘정보 비공개법’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 정보공개법부터 대폭 개정해야 하며. 정보공개의 원천정보인 국가기록물 역시 생산.관리 등도 체계적으로 관리되도록 관련 제도와 법을 정비해야 한다. 인심은 곳간에서 나온다면 참여는 정보에서 나온다.

나라 곳간을 지키는 시민들

‘정부 돈은 눈먼 돈’이라는 의식과 관행을 없애기 위해 예산낭비에 대한 시민통제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일단 팔고나면 그만’이라는 기업의 그릇된 상혼에 대한 소비자들의 문제제기 수단도 필요하다. 납세자 및 소비자로서 자구수단을 보장하기 위한 제도의 도입이 그것이다. 국가와 지방차지단체의 예산낭비를 사전에 막고, 낭비된 예산을 환수하기 위해 납세자인 시민이 직접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예산낭비방지납세자소송제도’, 소비자로서 집단적인 피해를 더욱 쉽고 실질적으로 보상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집단소송제’ 도입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보자. 만약 당신이 군납비리로 국가예산이 수 백 억이 낭비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정부조사기관에 진정하거나 언론에 직접 알리는 길이 있다. 그러나 이들이 당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진실을 밝히려는 당신의 노력은 허사가 될 수도 있다. 납세자소송제도는 이런 경우, 제보자가 직접 예산낭비환수 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하자는 제도이다.

올바른 참여사회의 길이란

사법 분야의 탈성역화도 시급하다. 사법 분야 그 자체가 매우 중요한 공공서비스임에도 불구하고 권위주의와 엄숙주의의 베일에 가린 채 시민 위에 군림하는 것이 당연시되어 온 것이다. 그러다 보니 사법의 관료화 경향이 점차 심해지고 있고, 전관예우와 같은 고질적인 병폐들이 개선되지 않고 있다. 배심제.참심제, 재정신청제도와 검찰심사회 제도 등 사법부와 검찰의 재판권과 기소권 행사에 대한 시민참여 견제수단의 도입이 필수적이다.

이 외에도 각 분야에 도입되어야 할 시민참여제도는 무궁무진하다. 교육 분야에서의 자치와 참여, 여성의 참여, 장애인 등 사회적 소수자의 참여를 보장하는 것도 필수적이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견제와 균형이라고 한다. 참여민주주의란 다양한 시민 권리행사 수단들로 그물코처럼 촘촘히 짜여진 권력에 대한 시민감시, 시민견제의 네트워크라 할 수 있다. 시민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빅브라더’가 관료적 통제사회의 상징이라면, 시민에게 권력의 일거수일투족이 공개되고 그 행사과정에 시민의 목소리가 반영되도록 시민이 ‘빅브라더’가 되는 사회. 우리가 꿈꾸는 참여사회다.

이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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