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4년 02월 2004-02-01   1194

[회원마당]<회원한마당 돌아보기> 신영복선생 초청강연 – 존재론에서 관계론으로

‘여럿이 함께’라면 합리적인 목적 가능하다

2003년 12월 23일 참여연대 2층 강당은 미처 감당하지 못한 수명의 회원을 문밖으로 토해 냈지만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려는 열린 귀와 눈은 강당 안으로 빈틈을 찾기에 여념이 없다.

강의는 동양고전과 자신의 인생경험을 기초로 한 25개의 텍스트로 구성되었으며 각 텍스트가 서로의 징검다리가 되어 우리를 개울 건너편으로 안내하고 있다. 텍스트별로 신영복 선생님의 인간, 사회, 역사에 대한 깊은 통찰을 들여다본다.

『오래된 미래』는 ‘고전 독법’의 의미를 담고 있다.

불확실한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오래된 고전으로부터 교훈을 찾아 미래를 모색하자.

‘산지박(山地剝) 괘(掛)’는 가장 어려운 상황을 표현한다.

세상의 다양한 이치를 64가지로 분류한 통계서인 ‘주역’ 중 가장 어려운 상황인 ‘산이 붕괴하는’괘를 작금의 현실과 비유하며 이 어려움을 헤쳐 개울을 건너는 방법을 모색하려 한다.

樊遲問仁 子曰 愛人 問知 子曰 知人 – 顔淵

번지문인 자왈 애인 문지 자왈 지인 – 안연

논어의 ‘연어’편 중, 공자가 ‘인(仁)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 하고, 지(知)는 사람을 아는 것’이라는 얘기를 통해 인간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회는 인간에 대한 통찰이 없는 무지한 사회로, 상품만이 가치의 척도인 자본주의 사회의 폐단(소비가 없는 상품의 소유자는 무가치함)을 지적한다.

상품사회에서는 인간의 정체성이 소멸한다(자본론)

쌀 한 가마 = 구두 한 켤레라는 등가 형태에 맞게 쓸모가 있나, 팔모가 있느냐에 따라서만 상품의 가치가 평가되며 쌀에 대한 평가는 구두의 도움을 빌어 상대적으로 나타난다. 이는 인간도 하나의 상품이 되어버린 현대사회에서 인간성을 위협한다.

子夏問曰 巧笑?兮 美目 盼兮 素以爲絢兮 何謂也

자하문왈 교소천혜 미목 반혜 소이위현혜 하위야

子曰 繪事後素 曰 禮後乎 子曰 起予者 商也 始可與言詩已矣 – 八佾

자왈 회사후소 왈 례후호 자왈 기여자 상야 시가여언시이의 – 팔일

회사후소(繪事後素)는 ‘그림 그리는 일은 흰 바탕(素)이 있는 이후에 한다는 뜻’으로 본질이 있는 연후에 꾸밈이 있어야 함을 지적하는데 그 본질(素와 禮)은 인간관계이지 디자인과 같이 변화하는 상품과의 관계가 아니다.

상품사회는 인간관계를 황폐화 한다

臣聞之胡?曰 王坐於堂上 有牽牛而過堂下者

신문지호흘왈 왕좌어당상 유견우이과당하자

王見之曰 牛何之 對曰 將以 ?鍾 王曰 舍之 吾不忍其퇵?若 無罪而就死地

왕견지왈 우하지 대왈 장이 흔종 왕왈 사지 오불인기곡속약 무죄이취사지

對曰 然則??鐘與 曰 何 可?也 以羊易之 – 不識有諸, 梁惠王 上

대왈 연칙폐흔종여 왈 하 가폐야 이양역지 – 불식유제, 양혜왕 상

요약하면 제사에 제물로 바치려는 소가 끌려가는 것을 본 선왕이 이를 불쌍히 여겨 제물을 양으로 바꾸라 했다는 얘기가 사실인지를 묻는 맹자의 말이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참지 못하는 마음인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이 담긴 내용을 통해 측은함을 여기는 마음에 앞서 직접 ‘본다’라는 핵심을 지적하며 보고(見), 만나고(友), 서로 안다(知)는 것, 즉 관계의 중요성을 얘기한다. 여기서 두 가지의 에피소드를 말씀해 주셨는데 지하철 안에서 앉아있던 승객이 일어나 빈자리에 앉으려는데 옆 자리에 앉아 있던 학생이 자신의 자리에 친구를 앉히기 위해 그 빈자리로 옮겨 앉아 매우 난감해 하셨다는 얘기와 복역 중에 어머니가 위독하셔서 잠시 귀휴하고 돌아오던 날 접견 대기실에서 아이를 업은 채 목 놓아 우는 아내를 보았는데 그 모습이 힘들어하는 가장의 모습을 볼 때마다 생각이 난다고 하셨다.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이 있을 때 ‘관계’가 존재하게 된다.

子曰 孟之反 不伐 奔而殿 將入門 策其馬曰 非敢後也 馬不進也 – 雍也

자왈 맹지반 부벌 분이전 장입문 책기마왈 비감후야 마불진야 – 옹야

‘패전하여 도망할 때 ‘맹지반’은 돌아서 적과 싸우다 성문을 들어설 때 말을 채찍질하며 말하기를 뒤에서 싸우려 한 것이 아니라 말이 나아가지 않아서였다’는 말처럼 겸손과 겸양이 충만해야 진정한 사회가 형성되며 위선과 허위, 겸손과 겸양의 대립은 인간관계가 없는 사회에서나 의미가 있다고 지적한다.

大國之攻小國 大家之亂小家 强之劫弱 衆之暴寡 詐之謀愚 貴之傲賤

대국지공소국 대가지란소가 강지겁약 중지폭과 사지모우 귀지오천

此天下之害也-墨子, 兼愛

차천하지해야 – 묵자

겸애대국이 소국을 공격하고 대가가 소가를 어지럽히고 강자가 약자를 겁탈하고 다수가 소수를 억압하고 간사한 자가 어리석은 자를 속이고 높은 사람이 천한 사람을 업신여긴다. 이것이 천하의 ‘害之大者(해지대자)’이다.

至殺人也 罪益厚於竊其桃李 殺一人謂之不義

지살인야 죄익후어절기도리 살일인위지불의

今至大爲攻國 則弗知非 從而譽之謂之義(

금지대위공국 칙불지비 종이예지위지의)

此可謂知( 義與不義之別乎? – 묵자, 비공

차가위지 의여불의지별호? – 묵자, 비공

사람을 죽이면 복숭아를 훔친 것보다 죄가 크고 그것을 불의라 하지만 나라를 공격하는 전쟁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불의임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예찬한다. 어찌 이를 의와 불의를 구별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근대사회는 존재론적 패러다임이다

존재론은 자본의 자기증식의 논리이다. 근대사는 존재론의 전개과정으로 대내적으로는 독점을, 대외적으로는 제국주의 역사를 전개하였다. 자기와 타자와의 관계를 보지 못하게 하는 ‘상품과 화폐’는 우리가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을 가질 수 없게 하는 기본적인 구조이다.

자본주의 200년은 ‘빅 5’ 해결에 실패하였다

인류의 5대 공적(公敵)인 빈곤(貧困), 무지(無知), 질병(疾病), 오염(汚染), 부패(腐敗) 중 어느 것도 해결하지 못했다. 자본주의의 역사가 풍요의 역사였다는 환상을 청산해야 한다.

子曰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 – 論語, 子路

자왈 군자화이부동 소인동이부화 – 논어, 자로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서로 공존하며 결코 지배하거나 흡수하려고 하지 않으며, 소인은 지배하고 흡수하려고 하며 다양성을 인정하고 공존하려 하지 않는다. 여기서 ‘和(화)’는 관계론적 의미에서의 공존을 ‘同(동)’은 존재론적 의미에서의 흡수를 뜻한다.

한국사회는 작은 톱니바퀴다

한국사회는 정치적 주체성, 경제적 자립성 문화적 자존이 결여된 사회이다. 세계경제질서의 중하위에 종속된 작은 톱니바퀴이다.

존재론에서 관계론으로

지배적인 위상을 가지려고 하는 근대사회의 존재론적 구조에서 자신에 대한 성찰과 타자에 대에 관용하는 관계론적 구조로의 전환이 필요한 시기이다. 사람을 항상 중간에 놓고 보자. 존재론적 사회는 모든 변화의 시작이 외부에서 오며 모든 판단력의 기초는 자기결여를 보충하려는 콤플렉스이다.

주역의 地天泰卦(지천태괘)

지천태가 최상의 괘인 이유는 땅의 기운은 아래로 내려오고 하늘의 기운은 위로 올라가기 때문에 위에 있는 ‘지(地)’와 아래 있는 ‘천(天)’이 서로 만나는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서도(書道)의 관계론

한 획, 한 자, 한 행의 잘못은 다른 획, 자, 행이 채워줌으로 완성되는 서도는 서로가 서로에게 한껏 기대고 있는 글씨가 된다. 우리 세상살이도 글자처럼 서로가 서로를 돕는 관계가 지속되어 있으면 좋겠다.

실천적 관계론으로서의 연대(連帶)

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 – 老子 8장

상선약수 수선리만물이부쟁 처중인지소악 고기어도 – 노자 8장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으며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하기 때문에 도에 가깝다. 여기서 물은 우리들 민초이며 물이 승리할 수 있는 방법은 바다를 이루는 ‘낮은 곳으로의 연대'(下方連帶)이다. 참여연대도 지식인으로만 이루어진 조직이 아닌 개개의 회원이 의지를 실천하는 조직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노동현장이 유일한 수탈현장은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상품 가치는 교환가치이며 실현된 것만이 가치다. 그러하기에 공장에서만 착취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미취업자처럼 착취당할 수 없는 처지에 있는 사람의 문제도 고려해야 한다. 하방연대는 이를 담아내야 한다.

연대의 조건 – 신뢰집단의 건설

子貢問政 子曰 足食 足兵 民信之矣 – 論語, 顔淵

자공문정 자왈 족식 족병 민신지의 – 논어, 안연

정치란 무엇입니까? 식량을 충분히 하고 병력을 충분히 하며 백성들로 하여금 신뢰하게 하는 것이다.

신뢰의 기초는 일차적으로 주민들과 정치적 목표를 공유하는 정치적 민주주의에 있다

신뢰집단은 계급적 이해관계(계급관계가 아님)인 정치목적이 공유되어야 한다. 또한 제도의 의해서 보다 사람(들의 관계)에 의해서 신뢰집단이 건설되어야 한다.

신뢰의 조건-엄정한 자기관리

觀於海者難爲水 流水之爲物也 不盈科不行 君子之志於道也 不成章不達

관어해자난위수 류수지위물야 부영과부행 군자지지어도야 부성장부달

– 맹자, 盡心上

– 맹자. 진심상

관어해자 난위수(觀於海者難爲水)는 바다를 본 사람은 물에 대하여 이야기하기를 어려워 한다는, 불영과부행(不盈科不行)은 물이 흐르다 구덩이를 만나면 그 구덩이를 다 채운 다음에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불성장부달(不成章不達)은 전체를 아우르는 경지여야 한다는 의미로 하방연대하기에 앞서 이를 거울삼아 집단이 신뢰하는 개개인의 자기 관리가 필요하다.

주관주의 배격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 論語, 爲政

학이부사칙망 사이부학칙태 – 논어, 爲政

이론적 사고에만 의존하고 실천적 경험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어둡고, 실천적 경험에만 의존하고 이론적 사고가 없으면 위험하다.

이론은 ‘좌경적’으로 실천은 ‘우경적’으로

현실과 인간에 대한 이해를 현실화해야 한다. 기회주의와 모험주의를 배격해야 한다. 인간의 보수적 성향을 수긍하고 사회의 완강한 보수적 구조를 인정한 위에 변혁운동의 간고성(艱苦性), 장기성(長期性), 굴곡성(屈曲性)을 예상해야 한다.

따뜻한 가슴으로 관계해야 한다

징역살이 중에 수감생들과 관계가 좋지 않은 교도관의 부탁에도 ‘마음이 불편해서 건성으로 만들지 못 하겠다’는 스승의 얘기처럼 무언가가 제자리에 놓여 있지 않은 것을 보고 머리로 이걸 어떻게 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기 전에 먼저 가슴으로 불편을 느껴야 한다. 가슴이 불편하지 않게 양심에 따라 운동은 시작되고 지탱되어야 한다. 양심적 동기에서 참여한 사람들은 그 길을 바꾸지 않는다. 양심은 이웃에 대한 관심이며 애정이다.

‘미완성’이 주역 64괘의 마지막 괘이다

“여우가 강을 건너는데 강을 거의 다 건넜을 때 그만 꼬리를 적셨다. 이로울 바가 없다”는 괘로 미완성을 의미한다. 사물의 모든 운동은 미완성이 기본적이고 일반적인 형태이므로 미완성은 지금까지의 과정을 반성하는 새로운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매사에서 완성하지 말고 미완성하려는 생각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존재론으로부터 관계론으로”를 말씀하신 선생님의 강의는 두 시간이 넘게 진행되었고, 질의응답 시간에 옥살이에서 얻은 것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귀휴(歸休) 나왔을 때 수의를 입고 호텔에서 친구를 만날 만큼 ‘성분개조’를 했다고 자부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내 정서적인 모습은 여전히 그대로라 변하지 못한 것 같다”는 겸손과 “오랜 옥살이로 기술공이 다 되었다”는 자랑을 깊은 웃음에 담았다. 감옥 생활 20년은 “나의 대학 생활”이라는 말씀을 끝으로 긴 여운을 남기는 강의가 마무리되었고 백여 명이 훌쩍 넘는 회원들은 어떤 인상을 훔쳐 갔을까? ‘여럿이 함께’라면 합리적인 목적을 도출할 수 있다는 말씀처럼 우린 아마 이 각박한 세상을 변하게 할 험난한 길도 즐거울 ‘관계’하나씩을 가슴에 묻었을 것이다.

한규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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