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0년 07월 2010-07-01   1375

최성각의 독서잡설-역사에서 독재는 ‘한순간의 오차’일 뿐이다


역사에서 독재는 ‘한순간의 오차’일 뿐이다



최성각
작가, 풀꽃평화연구소장







중등시절 세계사 시간에 칼빈을 배울 때 우리는 루터도 같이 배웠다. 교과서에는 둘 다 위대한 종교개혁가들로 적혀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을 만난 이후, 내게 칼빈은 카스텔리오라는 ‘빛의 사람’ 건너편에 있던 냉혹한 권력가이자 ‘어둠의 인물’로 화인처럼 박히고 말았다. 중등 세계사 교과서는 어떤 세계사적 인물이 어둠의 사람인지 밝음의 사람인지 자세히 밝히고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오늘의 우리 현실을 비추고 있는 두 인물

스테판 츠바이크가 쓴 이 책의 본래 제목은 『카스텔리오와 칼빈』이었다. 1936년에 이 책이 처음 출판되었을 때 스위스의 독일어권 사용지역에서는 강한 반발이 있었다고 한다. 마침 칼빈의 종교개혁 400주년과 겹쳤기 때문이었다. 독일은 유태인인 츠바이크가 쓴 이 책을 즉각 판매 금지시켰다. 다른 나라도 출판을 주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책이 담고 있는 칼빈에 대한 새로운 진실 때문이었다. 프랑스어판은 1944년에야 나왔고, 독일에서 이 책이 빛을 본 것은 1954년에야 가능했다. 이어서 영어판, 네덜란드어판이 곧 출판되었다.

한국어 출판은 1993년. 역자 오영옥은 카스텔리오의 관용사상에 의해 제네바에 설립된 에큐메니컬운동(교회일치운동)의 본부인 세계교회협의회에 근무하는 남편 때문에 카스텔리오라는 인물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내가 읽었던, 『폭력에 대항하는 양심』(현대사상사, 1993)이라는 직설적인 제목의 책은 절판되어버렸고, 최근(2009년)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안인희 옮김, 바오출판사)라는 세련된 제목으로 다시 출간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1993년판 『폭력에 대항하는 양심』으로 이 책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이 1998년 2월,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너무 많은 밑줄을 그으며 읽었고, 이번에 다시 읽는 며칠 동안 나는 그때보다 더 많은 밑줄을 그었기 때문이다.

이 책이 오늘의 우리 현실을 빼박듯 반영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읽는 내내 나는 자주 장탄식을 하곤 했다. 감동과 비탄, 현실에 대한 답답하고 지루한 절망감과 미래에 대한 가냘픈 희망이 난마처럼 얽혀 마음속을 휘저었다. 이 책을 읽고 있던 즈음, 공교롭고도 불행하게도 ‘이적利敵 시민단체인 참여연대’를 아예 폭파시켜 버리든가 북녘으로 날려버리고 말겠다는 노인들이 참여연대 건물 앞에서 연일 시위를 하고 있었다. 설렁탕을 누군가 사줬다는 걸 보아 이번에도 자발적 시위는 아니었다. 어떤 과격한 이는 옥상에 올라 참여연대를 손쉽게 파괴할 틈을 찾았고, 어떤 경박한 이는 사람의 뺨을 때리기도 했다. 이 슬프면서도 안타까운 일은 “도대체 참여연대 사람들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르겠다”는 총리의 폭언 이후에 벌어진 일들이었다. ‘731부대’도 모르고 대학총장까지 지낸 그의 교양수준으로 볼 때 그런 피아구분의 폭언이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긴 했지만, 총리 폭언의 파장은 서글픈 시대착오적인 희극으로 전개되었다.



인간의 자유를 옹호했던 츠바이크의 전기물

스테판 츠바이크는 본디 소설가다. 우리나라에 가장 널리 알려진 그의 소설은 아마도 『모르는 여인으로부터의 편지』(고려원, 1991년)일 것이다. 내게는 단기 4292년도판  『感情의 混亂』(양문문고 49번)이 있다. 동성애를 다룬 소설인데, 곰팡이가 슬어 자주 햇볕에 말리곤 하는 문고판이다. 츠바이크는 당시 유럽에서 소설가로도 인기절정이었지만, 저명한 전기작가라는 사실도 빠뜨릴 수 없다. 『천재와 광기』(예하, 1993)를 비롯해 국내에도 그의 번역물은 대단히 많다. 그의 소설은 낭만적 심리소설에 가깝고, 치밀한 고증과 친절한 문체를 동반한 그의 전기물은 소설보다 더 흥미진진하다. 그는 에라스무스나 마리 앙뚜와네뜨 같은 역사의 주역들도 다뤘지만, 프랑스혁명 시절의 파리 경찰청장 요셉 푸우쉐 같은 기이한 인물도 전기에 담았다. 그의 글은 쉽게 읽히면서도 깊은 여운이 남는다. 그의 자유정신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 친일 인사들이 일본이 쉽게 망할 것 같지 않아 친일했다고 말하며 수壽를 다 누렸던 것과는 달리 츠바이크는 히틀러가 뒤덮을 세계에 대한 한 자유인으로서의 우려와 절망감 때문에 망명지 브라질에서 어느 날 아내와 같이 음독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카스텔리오와 칼빈』은 16세기를 살았던 두 인물의 전기이건만 소설과 같은 구성으로전개된다. 우선 서론이 있다. 사실 서론에 이 책의 내용이 다 담겨있다. 서론의 앞 문장은 스위스 바젤에 보존되어 있는 세바스찬 카스텔리오라는 인물이 쓴 한 편의 문서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 문서는 칼빈이라는 광신적인 절대자에게 저항하는 ‘투쟁서’인데, 제목이 『코끼리에 대적하는 한 마리의 파리』였다. 카스텔리오는 칼빈을 코끼리에, 자신을 한 마리 파리로 생각했다. 그런데도 감히 파리가 죽을 줄 알면서도 코끼리에 저항한 것이다.

칼빈도 가톨릭의 박해를 피해 스위스 제네바로 굴러온 이방인이었지만 먼저 활약했던 우직하고 영웅적인 혁명가 파렐의 절대적인 도움에 의해 제네바 도시 전체를 장악한 절대권력자가 되어 있었다. 그는 관청과 시참사회Magistrat, 종교국, 대학, 법정, 국가재정과 도덕률, 성직자의 교육, 포리와 감옥, 출판물이나 사람들의 귓속말, 심지어 가정의 식탁 메뉴, 성생활지침까지 모두 장악하고 있었다. 제네바 시민들은 중세 가톨릭도 고약했지만, 가톨릭에서 자신들을 벗어나게 한 영적 독재자도 참으로 고약하다는 것을 느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불만을 표하면 즉각 ‘이단’으로 몰리고, 교수형, 참수형, 그리고 가톨릭에서 그러했듯이 화형을 시켜버리기 때문이었다. 제네바에는 단지 하나의 진리만이 허용되었는데, 그 진리는 오로지 칼빈에게서만 나왔다.




칼빈의 독선으로 적막의 도시가 된 제네바

국가나 종교의 무오류성은 곧 칼빈의 무오류성이었다. 술이 취해 칼빈을 욕한 식자공은 불에 달군 쇠로 혀가 뚫렸고, 칼빈을 위선자라고 말했던 쟈크 그뤼에라는 자는 고문 끝에 처형되었다. 지속적인 감시와 가차없는 테러는 사람들의 자아(자존감)를 죽이고, 저항을 부질없는 짓으로 여기는 무기력증을 초래한다. 역사는 대개 긴 무기력의 시간과 짧은 저항의 순간으로 채워져 있기 일쑤다. 아주 가끔씩 아름다운 저항이 일어나긴 하지만, 대부분의 인간들은 권력자들의 입맛에 맞게 순치되어 불쌍하고 애처롭게 자신의 삶이 바보의 삶인지도 모르고 살다가 사라지는 게 사실이다. 우리가 2009년 초여름, 참여연대 앞에 타율에 의해 모인 노인들에 대해 ‘정중한 연민의 감정’을 감추지 못하는 이유도 거기 있다.

인류역사상 칼빈이 통치하던 제네바만큼 완벽한 독재정치도 흔치 않았다. 그래서 발자크도 말했다. “칼빈의 광적인 비관용성은 로베스피에르의 정치적 편협성보다 도덕적으로 더 배타적이었고 무자비한 것”이었다고. 칼빈이 절대권력을 휘두르는 동안 한때는 자유롭고 쾌활하고 밝았던 제네바가 어떻게 변했는지를 만나는 대목은 참으로 끔찍스러웠다. 얼룩덜룩한 옷들은 사라졌고, 도시의 색채는 광택을 잃었고, 종탑의 종소리도 사라지고, 거리에서는 경쾌한 노래소리가 사라졌다. 칼빈의 교회처럼 모든 집들은 황량하고 장식이 없는 집으로 바뀌어갔다. 여관집에도 바이올린 소리가 사라졌고 바이올린 소리가 사라지니 춤도 사라졌다. 헛간 마당에서 즐겁게 볼링 굴리던 소리도 멈춰졌으며, 상아뼈로 만든 주사위가 가볍게 책상 위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도 사라진 것이다.

세상에, 이런 적막강산이 지옥이 아니고 어디가 지옥일까? 제네바에서 사라진 것들이 바로 삶의 핵심 내용들이건만, 자신의 금욕적 교리만이 진리라고 여긴 칼빈은 제네바에서 인간의 삶을 깡그리 지워버린 것이다. 지울 수 없는 것을 지우려 했다는 점에서 칼빈은 무모한 모험가였다. 지워서는 절대 안 되는 삶의 풍요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카스텔리오는 당대 현실에서는 무참하게 깨졌지만, 긴 시간으로 볼 때에는 사후 승리자였다. 그렇지만 사후 승리자란 찬사는 얼마나 쓸쓸하고 덧없는가? 그런데도 역사는 종종 당대의 실패와 승리를 계산하지 않는 희귀한 신념의 인간들을 반드시 기억하곤 한다. 그런 인간들은 애당초 거칠고 조악한 세속적 잣대 너머의 인간들인데, 그들이 끝내 포기하지 않았던 것들은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가장 귀한 것들, 즉 사랑의 중요성과 자기존엄성의 확대이곤 했다.
 
칼빈은 음악을 혐오했다. 인간의 성애性愛도 하찮게 여기고 심지어 증오했다. 그는 검은 옷만 입었다. 그는 미소와 유머를 경멸하고 두려워했다. 어디선가 보던 인물이다. 누구일까? 움베르또 에코가 『장미의 이름으로』(이동진 옮김, 우신사, 1986)에서 창조했던 눈먼 노인 호르게가 아니고 누구란 말인가? 사람들의 웃는 능력이 두려워 살인도 불사했던 수도사 호르게의 역사적 현현顯現이 바로 16세기 제네바의 영적 절대자 칼빈이었던 것이다.



삶의 기본을 지키려고 했던 카스텔리오

이에 반해 카스텔리오는 쾌락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칼빈과는 정반대의 인물이었다. 그는 음악을 사랑했고,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계의 아름답고 눈부신 빛깔에 경탄했고, 인간의 성애를 중요시했고, 미소와 유머를 인간능력의 극치로 생각했다. 내 의견이 중요하다면 남의 의견도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며, 인간은 부족하고 실수투성이의 불완전한 존재이므로 무엇보다도 ‘관용의 정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며, 하나님은 숨 막히는 금기를 즐기는 분이 아니라 사랑을 강조했던 존재라고 역설했다. ‘하나님’을 만약 ‘덕’이나 ‘인(어짊)’으로 고쳐 읽기만 한다면 카스텔리오는 온화하면서도 유쾌한 공자를 닮았고, 에코의 소설로 빗대 말한다면, 유머를 즐겼으며 ‘합리적 의문’을 중지하지 않았던 윌리엄 수사를 닮은 인물이었다.

카스텔리오와 칼빈의 대결은 어쩌면 숙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위대한 인문주의자 카스텔리오는 칼빈의 박해를 피해 바젤로 몸을 옮긴 뒤, 고된 육체노동으로 연명하면서 칼빈과의 정면대결을 피했다. 칼빈이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는 누구든지 죽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카스텔리오는 성서번역이라는 자신의 사명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다. 세르베트가 칼빈에 의해 화형을 당하기 전까지의 일이다. 횡설수설하면서 다소 경박하고 난해한 성품의 신학자였던 세르베트가 삼위일체설을 부인하고, 칼빈의 교리(예정설)에 찬동하지 않자 이견을 용납하지 못하는 메마른 칼빈은 세르베트를 고문하고, 마침내 화형에 처한다. 칼빈은 점잖게 말해 불관용의 화신이었지만, 옹졸하고 비겁했으며, 다른 견해를 가진 자들을 이단으로 몰아 죽이는 방법에서는 절대권력자들이 예외없이 그러하듯이 간교하기조차 했다. 역사가 기본은 2백년이 지난 뒤, “카톨릭 종교재판 장작더미에 던져진 수천 명보다 세르베트 한 사람의 희생에 나는 더 깊은 동요를 받았다”고 고백한다. 볼테르는 “세르베트의 처형은 종교개혁 내에서 일어난 첫 번째 종교살인”이었으며, “나아가 종교개혁의 근본이념을 분명히 거부한 최초의 행위였다”고 비판한다. 루터조차 “단연코 나는 사형선고를 바라지 않는다”고 말하며, “이단자들은 결코 외압으로 억누르거나 진압되어서는 안 되고 단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극복되어야 한다”고 밝힌다. 칼빈의 세르베트 처형이 당시 유럽세계에 얼마나 큰 충격적인 사건이었는지 느낄 수 있다.

뒤늦게 바젤대학에 자리를 잡은 카스텔리오는 오랫동안의 침묵을 깨고 칼빈의 살인에 대해 정면으로 비판하기 시작한다. 칼빈은 당시 유럽 최고의 지성이었던 카스텔리오를 늘 두려워했다. 칼빈은 자신과 정반대의 인품과 학식, 열린 신앙심을 가진 카스텔리오와 한 종교인이나 지식인으로서 글이나 맞장 토론으로 임한 게 아니라 음해를 통한 완전제거를 획책했다. 개라고 부르며 장작 도적으로도 몰고, 사탄의 후원자이며 동시에 악마 그 자체라고도 몰았지만, 용기는 없지만 최소한의 바른 판단은 할 줄 알던 세상은 암묵적으로 카스텔리오 편이었다. 칼빈은 숱한 음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카스텔리오에게서 단 한 가지의 오점도 찾아내지 못했다. 명백한 칼빈의 패배건만,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대화를 거절한 칼빈은 지상에서 카스텔리오를 영원히 제거하려는 계획을 포기하지 않고 갖가지 음모를 진행시켰다. 카스텔리오는 칼빈이라는 난공불락의 잔인한 살인마가 끼친 치명적인 과중압력과 칼빈에게 인간적인 위엄과 지식인으로서의 품위를 다해 대항하다가 겹친 과로로 인해 1563년 12월, 48세의 나이로 병사한다. 마침내 마음의 평화를 찾은(?) 칼빈은 카스텔리오가 병사한 뒤에도 잠시 더 제네바를 죽음의 도시로 지배하지만, 역사는 칼빈이 기획했던 잔혹한 신정정치神政政治에 넌더리를 내게 된다. 후일, 칼빈 정통주의에 대항하는 길고도 긴 투쟁에서 지식인들은 관용의 사상이 담긴 카스텔리오의 책을 손에 들고 저항했다.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지만, 칼빈 이후, 2백년 동안 제네바는 세계적 명성에 값하는 화가나 음악가 등 예술가를 단 한 명도 배출해내지 못했다. 예술은 적막에서 가능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제네바가 칼빈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것은 순수한 제네바 시민 장 자크 루소가 탄생한 이후였다. 널리 알려져 있듯 루소가 평생 기울인 일은 인간성 말살에 대한 저항이었다.



우리는 더한 고통도 이겨냈다

인간의 사상은 교회와 나쁜 전통의 속박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카스텔리오의 사상은 데카르타나 스피노자를 거쳐 근대이념의 기초로 부활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불관용의 장소였던 제네바는 후일 유럽에서 관용의 은신처가 되었다. 때로 빠른 판단을 유보하는 듯이 보이는 역사는 후일 분명하게 카스텔리오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스테판 츠바이크가 말한다. “독재정치란 인류역사라는 방대한 계획 속에서 단지 한 순간의 오차임을 의미하는데, 인간들의 삶의 리듬을 억지로 막으려고 하면 실제로는 잠간의 후퇴에 더 강력한 추진력을 몰고 오게 하는 법이다”라고. 츠바이크는 또한 “자유를 가장 신성한 인간의 자산으로 여기지 않고, 당연한 관습으로 여길 때 그 자유를 유린하는 비밀스러운 의지가 고개를 쳐든다”는 무서운 경고도 잊지 않고 있다.

그나저나, 츠바이크가 카스텔리오의 비극적 삶에 빛을 부여하면서 확신에 차서 말했던 ‘한 순간의 오차’는 2010년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일까? 그럴 것이라는 믿음이 없다면 어떻게 이 고약한 시절을 견딜까. 독재정치가 만약 역사에 가끔 돌출하는 한 순간의 오차에 불과하다면 희망을 품고 어떻게든 싸우고, 견뎌내야 한다. 더 혹독한 시절도 우리는 견디고 이겨내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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