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2년 07월 2012-07-06   4264

[역사] 인간으로 돌아오지 못한 그들, 전공투

인간으로 돌아오지 못한 그들, 전공투

김정인 춘천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연대를 구해 고립을 두려워 않고

힘 미치지 못해 쓰러지는 것은 개의치 않지만
힘 다하지 않고 꺾이는 것은 거부한다.”

1968_02

일본 도쿄대 야스다 강당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대학권력과 국가권력에 저항하다 1969년 1월 19일에 체포된 어느 학생이 남긴 낙서다. 전학생공동투쟁(이하 전공투)이 꿈꾼 세상은 고립에 기반한 연대, 즉 바리케이드 안의 해방구였다.

바리케이드 안 해방구
68혁명과 스튜던트 파워가 세계를 휩쓸던 그 시절, 일본 학생운동의 권력에 대한 저항의 열기 역시 그들이 던지는 신무기인 화염병만큼 뜨거웠다. 도쿄대 야스다 강당에서의 바리케이드 봉쇄가 무너지자, 연대와 공감의 불길이 일본 전국을 휩쓸어 70여 개 대학이 바리케이드 봉쇄에 가담했다. 그 중심에 전공투가 있었다.

전공투는 당파가 있든 없든, 학생이든 연구자든, 개인이든 조직이든, 일체의 서열을 무시한 채 결성된 조직이었다. 도쿄대 전공투의 경우, 주체적으로 학생운동에 참가한 개인들이 자유분방하게 만들어낸 조직이었다. 그 중 하나인 도쿄대 조교助敎 공투는 결성 당시 첫째, 개인의 주체적 결의에 의해서만 참가한다, 둘째, 지도부는 만들지 않으며 모든 문제는 전원 토의에 상정한다, 셋째, 주체적 참가율이 낮아질 경우엔 조직의 유지를 자기 목적으로 삼아 매달리지 않는다, 등을 결의했다. 즉 전공투는 직접민주주의에 근거한 조직 운영을 원칙으로 하며 지도부를 갖지 않고 참가자 스스로 주체적인 결의에 따라 책임감을 갖고 투쟁하기 모인 대중적 전투조직이었다.


자기 부정을 시도하다

전공투는 직접 민주주의의 실현과 함께 치열한 사상투쟁을 전개했다. 사상투쟁의 요체는 신분으로서 학생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즉, 자기 부정이었다!

“시위에서 돌아오면 평화로운 연구실이 있어 연구에 전념할 수 있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기만이다. 연구실과 가두시위 사이의 균열은 양자를 왕복해도 메울 수 없다. 철저한 비판적 원리에 기초하여 자신의 일상적 존재를 검증하고 보편적인 인식에 서려고 노력하는 것, 그렇게 해서 얻어진 인식에 따라 사회에 기생하고 노동자 계급에 적대적인 자신을 부정하고 그것으로부터 사회적 변혁을 실천해야 한다.”

이러한 반反대학운동은 ‘적敵’의 주요 거점인 대학을 해체하는 동시에 노동자와의 결합을 지향했다. 도쿄대생에게 도쿄대는 일본 지성의 중심이 아니라, 근대 일본 건설의 참모본부였고, 베트남과 제3세계를 침략하는 미 제국주의의 하위 관료 양성소로 해체의 대상이었으며 그들에게 자기 부정은 자신의 특권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했다.

 


연대 없는 고립의 최후

그 시절, 많은 학생들이 ‘산이라도 옮길 수 있다’는 신념으로 투쟁했다. 인간다움에 대한 갈망과 해방에 대한 희망이 둑이 무너지듯 넘쳤다. 하지만, 시간은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공중에서 헬리콥터로 최루탄과 가스총을 쏘아대는 국가권력의 무자비한 탄압 앞에 서서히 무기력해지기 시작했다.

1969년 9월 3일 전국전공투 결성대회가 개최되었다. 그들은 각 대학에서의 투쟁 승리와 함께 반전파 노동자와 연대하고, 베트남 민중 해방 투쟁의 승리를 위해 전 아시아 민중과 연대할 것을 결의했다. 그런데, 그날 대회장에서 환호를 받으며 처음 모습을 드러낸 적군파赤軍派는 이전의 전공투와는 다른 길을 선택했다. ‘봉기관철, 전쟁 승리’를 구호로 무장 시가전을 전개하는 빨치산이 되겠다는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부정한다는 것은 곧 광인의 길을 걷는 것’이라는 어느 전공투 학생의 예측은 그대로 맞았다. 전공투는 곧 실체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고, 비록 진다고 해도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싸움이 있다는 걸 받아들인 사람들은 도시를 떠나 산으로 올라갔다.

고립은 곧 민주주의의 붕괴를 의미했다. 고립된 그들은 이제 자기 확인을 위해 일끝마다 적敵을 만들고 드디어 반항할 힘을 가지지 않는 자를 집단적으로 공격하는 공범 의식으로 결속하기 시작했다. 또한, 고립은 ‘우치게바’라 불리는 내부 폭력을 확산시켰다. 전국전공투가 1971년에 해체된 뒤 적군파赤軍派와 혁명좌파가 함께 결성한 연합적군이 산에서 군사훈련을 하면서 공산주의 인간형에 다다르지 못했다고 지목된 12명을 우치게바로 살해한 사건이 1972년 2월에 발각되어 일본인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고립된 집단 속의 개인은 각자가 완벽한 혁명가여야 한다는 강박증이 부른 비극이었다. 이렇게 혁명가만을 필요로 하면서 인간으로 결코 살아남기 어려운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린 전공투의 시대는 결국 막을 내렸다.


최근 우리 정치판에서 불거지고 있는 사건들의 주역은 공교롭게도 대부분 80~90년대 학생운동 출신이다. 그들의 학생운동 경험이 ‘지금 여기’ 정치 문화 속에서 제대로의 역할을 하고 있는지 우려스럽다. 그들의 말과 행보에서 여전히 20대 그 시절에 머물러 있는 학생운동 판의 전사 혹은 투사의 모습을 발견하며 흠칫 놀라는 일이 잦다. 그래서인지 학생운동의 궤적은 크게 다르지만, 일본 전공투의 문화와 정서를 좇으면서 자꾸 그들의 어제와 오늘을 떠올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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