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4년 11월 2004-11-01   840

한국사회의 무풍지대, 누가 감히 재벌을 건드려?

얼마 전 5대 재벌의 부당 내부거래 고발사건에 대한 검찰의 무혐의 처분 발표는 한국 사회의 재벌이 사법의 치외법권임을 확인시켜주었다. 사법 뿐 아니라 국회, 언론 등 각 영역에서 무소불위한 재벌을 들여다 봤다. 편집자주

지난 아테네올림픽에서 우리는 많은 감동과 흥분을 맛봤다. 동시에 체조경기의 오심파동에서 안타까움과 실망감도 느껴야했다. 경기규칙을 적용할 심판관들이 제대로 규칙을 적용하지 않아서 열 받고, 그런 심판관을 감독해야 할 국제체조연맹 같은 상급기관이 보여준, ‘미국 편들기’로 귀결되는 모호한 태도에 불만을 가졌다. 그것은 ‘올림픽 정신’에 남긴 작은 생채기에 불과하다고 넘길 수도 있지만 불신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게 더 큰 문제다. 공정한 게임규칙 적용에 대한 믿음은 스포츠가 살아가기 위한 필수 영양소이기 때문이다.

강력한 한국 재벌, 공정한 룰에도 강한가

게임규칙을 적용하는 것은 스포츠에서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일상생활에서는 물론이거니와 경제영역이나 사법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권한을 많이 가졌거나 영향력이 큰 사람이나 집단에 대해 ‘게임의 규칙이 공정하게 적용되고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 예를 들어 일반인에 비해 권력자에게 법을 더 관대하게 적용하는 것은 아닌가하는 점은 사법정의를 판단하는데 핵심이다.

한국에서 재벌은 경제영역에서 절대강자일뿐만 아니라 정부정책을 결정하거나 사회적 유행을 선도하는 면에서 무시 못할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2002년 말 기준으로 재벌그룹이 차지하는 경제적 비중을 보면, 5대그룹(삼성, LG, SK, 현대자동차, 한진그룹)에 소속된 기업 중 증권거래소에 상장된 회사들(50개 사)의 주식의 시가총액은 상장회사 전체(683개 사)의 49%를 차지할 정도다. 정책의사결정을 내리는 것은 역시 ‘사람’이라는 점에서 재벌이 맺고 있는 인적네트워크도 영향력 발휘의 중요한 자원이다. 2001년 말 기준으로 보았을 때, 행정기관이나 언론계, 사법기관 등과 유사하게 30대 재벌그룹의 경영진의 49%가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출신으로 이들은 끈끈한 동류집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2004년 1월 참여사회연구소가 발표한 재벌의 혼맥도도 그들의 막강한 인적네트워크를 보여준 바 있다.

이처럼 무시할 수 없는 경제적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재벌은 인적네트워크 등 보충자원을 함께 사용하면서 특정한 사회정책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 뿐만 아니라, 자신들에게 불리한 정책이나 비판을 차단하거나 최소화시킨다. 이런 면에서 경기규칙을 직접 적용하는 사법기관뿐만 아니라 규칙의 준수나 적용여부를 감시하는 언론기관과 국회가 재벌에 대해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지는 주목할만한 일이다.

검찰은 6년 동안 모른 체하고 싶었다

지난 9월 24일 서울중앙지검은 참여연대가 5대 재벌그룹 임원 83명을 배임혐의로 고발한 사건의 결론을 발표했다. 고발장이 제출된 것이 98년 10월이었으니 만 6년 만에 내려진 셈인데, 그 내용은 고발된 83명 중 아무도 처벌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평소에도 검찰이 재벌 관련 사건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음을 알고 있기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83명 모두를 처벌하지 않기로 한 것은 가히 충격적이다. 더 놀라운 점은 검찰이내세우는 재벌그룹 임원들의 불기소 처분 논리가 대법원 판례조차 부정하는 오류를 범했다는 점이다.

검찰이 6년이나 이 사건을 지루하게 끈 자체가 검찰이 재벌문제를 건드리기 어려워한다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이 사건의 경우 참여연대가 고발한 내용인 재벌그룹에서 벌어진 부당내부거래의 사실관계는 국가기관인 공정거래위원회가 98년 8월에 수십 페이지에 달하는 공식 의결서로 공표한 사실들이다. 사실관계가 복잡하거나 사실파악에 시간이 걸릴 일도 전혀 아니다. 그리고 피고발인이 모두 83명이나 되어 대규모 사건으로 보이지만 사실상 그들의 행위는 거의 동일한 것으로 90년대 중반 모든 재벌그룹들이 우량 계열사가 부실계열사를 도와주기 위해 공통적으로 애용하던 부당 행위들이다. 따라서 고발인의 숫자가 많았을 뿐이지 사건처리나 법률적용 면에서는 지극히 단순한 사건이다.

그러나 검찰은 재벌개혁의 파고가 가라앉기를 기다리며 시간을 보낼만큼 보내버리고는 결국은 자신이 임원으로 근무하는 회사의 이익이 아니라 계열사의 이익을 올려주는 경영진의 행위가 정당했다고 결론을 맺었다.

개인적인 견해로는 과거 한국재벌의 관행이고 또 고발된 사람의 대다수가 재벌총수에 고용된 파리 목숨 같은 임원들이라는 점을 감안한다고 할지라도 검찰이 무혐의, 즉 처벌 대상 자체가 안 된다고 판단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백 보 양보하더라도 ‘피고발인 83명의 행위는 배임죄로 처벌할 수 있는 사안이지만 과거 우리 기업의 일반적인 관행이었다는 점에서 기소를 유예한다’며 과거를 용서하되 앞으로는 절대 봐주지 않겠다고 했다면 모를까, 아예 ‘처벌대상도 안 된다’고 한 것은 검찰이 재벌 중에서도 상위그룹이 포함된 이 사건을 얼마나 다루기 부담스러워했는지 극명히 보여준다.

재벌의 ‘명예’를 고려해서 해야 할 수사를 하지 않거나 법을 최대한 소극적으로 적용하려는 것은 지난 상반기에 있었던 불법정치자금 제공 기업인에 대한 검찰의 수사에서도 드러났다. 불법정치자금의 실제 주인인 재벌총수는 참고인 자격으로 불러보지도 않았고 서면조사도 하지 않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 또 대한생명을 인수한 한화그룹이 대한생명 인수 직전 회계분식을 했던 점을 금융감독위원회의 제재조치를 근거로 고발한 지 벌써 2년이나 지났지만 검찰이 여태 결론을 내리지 않고 있는 것도 그러하다.

기상천외한 발상의 면죄부 주는 대법원

재벌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이리저리 온갖 것을 다 생각해보고 결국은 손대지 않는 것은 법원도 엇비슷하다.

그 대표적인 것이 재벌그룹에서 벌어진 ‘편법적인 경영권 승계시도’에 대한 법원의 태도이다.

얼마 전 대법원은 삼성SDS가 그룹회장 아들 이재용 씨에게 주식관련 사채를 부당하게 낮은 가격에 배정한 것이 공정거래법 위반이라고 한 공정위 결정을 취소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재용 씨에게 부당 지원했다고 해서, 반드시 공정경쟁을 해친 것은 아니고 공정경쟁을 해쳤다는 점을 공정위가 입증해야 한다’는 것이 대법원 판결의 요지였다. 하지만 법원도 이 사건에서 ‘부의 세대간 이전’과 ‘경제력 집중우려’를 인정하고서도 공정위에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입증을 요구함으로써 결국은 면죄부를 준 것이다.

법원이 재벌문제를 건드리는데 얼마나 소극적인가는 올해 6월말에 내려진 대법원의 다른 판결에서도 드러났다. 대법원은 “불법적으로 발행된 주식관련 사채를 무효로 하기 위해서는 상법에 규정된 ‘발행 후 6개월 내 발행무효소송 제기’ 요건을 만족시켜야 할 뿐만 아니라 발행무효사유도 발행 후 6개월 내에 모두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참여연대의 ‘삼성전자 전환사채 발행무효소송’을 기각했다.

참여연대는 상법상의 6개월 내 소송제기 규정을 지키면서 ‘삼성전자 전환사채 발행무효소송’을 법원에 제출했다. 그런데 참여연대는 1심 재판이 끝날 즈음에 이사회라는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 회장의 아들인 이재용에게 전환사채를 발행했다고 하는 삼성전자 측의 주장이 거짓임을 발견했다. 그래서 2심부터는 이사회를 거치지 않은 것이므로 절차 면에서 중대한 결함이 있었다는 점을 발행무효 사유에 추가했다.

그런데 대법원은 참여연대가 추가한 발행무효 이유는 너무 늦게 말한 것이므로 검토대상조차 되지 않는다고 결정했다. 소송제기 시한을 정한 규정을 소송에서 다툴 모든 근거를 다 제시해야 하는 시한으로 확장시킨 대법원의 이 같은 설명은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기상천외한 것이었다. 이는 법원이 게임의 규칙을 재벌에 유리하게 적용하려고 오히려 규칙의 내용을 왜곡하고 규칙적용을 주저하는 것을 보여준 구체적인 사례였다.

국회에서도 상전, 언론도 눈감아

재벌의 게임규칙 준수나 게임규칙 적용여부를 감시하고 교정해야 할 국회와 언론도 제 역할을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런 사례는 재벌총수나 재벌기업과 직결되는 문제를 국정감사 때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것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지난 2000년 10월 국정감사에서 재벌총수들을 증인으로 채택하자는 요구가 높았지만 좌절된 적이 있었고, 1999년에도 편법상속을 둘러싸고 삼성 이건희 회장을 증인으로 부르려는 일부 국회의원의 시도가 좌절된 바 있다. 그나마 증인으로 선정된 다른 재벌관계자들도 해외출장을 핑계로 나오지 않았다.

이런 문제는 17대 국회의 국정감사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단병호 민주노동당 의원은 노동자 불법위치추적을 한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는 삼성SDI의 이순택 대표이사를 국감증인으로 강력히 요구했다. 그러나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의원들은 “정보통신을 이용한 불법위치추적 문제는 단병호 의원이 소속된 환경노동위가 아닌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 소관사항”이라느니, “노동탄압문제는 삼성SDI에서 큰 문제가 아니”라고 하면서 삼성SDI 대표이사의 증인채택을 끝내 거부했다. 금융지주회사법 등 금융관련 법률 저촉여부로 삼성에버랜드와 삼성카드 대표이사를 증인으로 출석시키려던 한나라당 고진화 의원의 시도도 다른 의원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증인출석문제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다. 피감기관에 자료는 실컷 요청해놓았지만 실제 국감이 벌어질 때에는 질의대상에 포함되지 않는 예도 많다고 한다. 재벌기업들이 자신의 문제를 거론할 국회의원이 누구인가를 사전에 파악한 후 실제 국감이 벌어질 때까지 집요하게 개별 의원을 괴롭히거나 회유, 설득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재벌문제를 잘 건드리지 못하는 것은 언론도 비슷하다. 삼성그룹과 관련되어 있는 노동자불법위치추적 문제는 한 방송사의 시사프로그램에 의해 처음으로 보도되었다. 하지만 이는 한겨레를 비롯한 일부 언론만이 후속보도하고 관심을 보일 뿐 대부분의 언론에서는 거의 다루어지지 않고 넘어갔다.

이런 문제를 지난 7월 KBS의 한 기자는 회사 인터넷사이트에 쓴 글에서 거론했다. “정부기관이 기밀유출 의혹을 조사한다면서 모 신문기자의 휴대전화 통화내역을 조사했다고 해서 언론계가 발칵 뒤집히고 거대 보수 언론사들을 필두로 당시 거대 야당까지 나서서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나섰던 데 반해 죽은 사람의 명의까지 이용해 가면서 불법위치추적행위를 한 사건에 대해 재벌기업이 연루되었다고 대다수 언론들이 침묵을 지켰다”는 것을 비판했다.

언론계에서 재벌은 광고영업과 직결되는 문제로, 비단 이 사례에만 그치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서 재벌은 이미 공정한 규칙적용과 쓴 소리를 스스로 차단할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재벌의 행위 하나 하나가 우리 사회에서 가지는 파급력이 크면 클수록 재벌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커져야만 하고 재벌이 ‘샛길’로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 공정하고도 엄격한 규칙의 적용과 쓴 소리가 중요해진다. 무소불위의 권력이 독재와 부패의 길로 빠지듯이 재벌이 무소불위의 권력과 역할을 차지할 때 국민생활 물론 사회정의도 불안해진다. 게임규칙을 적용하는 사법기관이나 언론, 국회는 이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재벌 측 변호사 주장인지 헷갈리는 검찰 발표 요약

검찰의 5대 재벌 부당내부거래 배임죄 무혐의 결정

추석연휴 직전인 지난 9월 23일 목요일, 검찰은 5대재벌 부당내부거래 배임죄 고발사건의 결론을 발표했다. 검찰은 기자들에게 실제 보도는 추석 연휴 이후로 해달라는 보도시기제한(엠바고)을 요청하면서까지 조심스럽게 발표하였는데, 그 내용은 검찰의 발표자료인지 재벌 측 변호사가 주장한 것인지 모호할 정도였다. 이 사건은 공정위에 의해 적발된 계열사간 부당내부거래에 대한 형사책임을 묻는 첫 사례였다는 점, 게다가 5대 재벌에 걸쳐 83명의 임원이 고발된 초대형 사건이라는 점에서 적지 않은 의미가 있었는데, 그 사건을 간단히 정리해 본다.

○ 고발내용 개요

– 고발일 : 1998년 10월 16일

– 고발인 : 참여연대 회원 3명

– 피고발인 : 5대재벌 임원 83명

– 검찰의 처리결과 : 서울중앙지검 조사부, 81명 무혐의, 1명 기소유예, 정몽헌(사망)은 ‘공소권없음’

○ 주요 고발대상 행위

– 삼성생명, 특정금전신탁을 이용하여 3개 계열사가 발행한 기업어음 낮은 이자율로 매입

– 삼성에버랜드, 계열사에 대여한 자금 미회수

– (주)대우, 계열사에 매각한 주식매각대금, 대여금 등 미회수

– LG화학 등, 계열사 발행 후순위채권 낮은 이자율에 매입

– LG반도체, 계열금융기관에 낮은 이자율로 자금 예탁

– 현대자동차 등, 계열사 발행 전환사채 불리한 조건으로 인수

– SK상사 등, 계열 증권사 발행 후순위채권 낮은 이자율로 매입

– SK건설 등, 자본잠식상태 부실계열사 유상증자에 참여

○ 검찰의 무혐의 결정근거에 대한 참여연대의 반박

▶ 배임은 소속회사에 대한 임무위배로 인한 손해발생과 그에 대한 인식을 요구하는데, 이번 사건에 있어서 그렇지 않으며, 지원금액을 모두 상환 받아 실 손해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검찰의 주장에 대해

검찰의 주장은 대법원 판례를 정면으로 거스른다. 손해발생 가능성 인식문제에 대해 대법원은 “배임죄에 있어서 배임의 범의는 본인에게 재산상의 손해가 발생하거나 발생할 염려가 있다는 인식과 자기 또는 제3자가 재산상의 이득을 얻는다는 인식이 있으면 족하고 본인에게 재산상의 손해를 가한다는 의사나 자기 또는 제3자에게 재산상의 이득을 얻게 하려는 목적은 요하지 아니하며, 이러한 인식은 미필적 인식으로도 족하다”고 판결하고 있다.

재벌그룹 임원이라는 사람들이 계열사 주식을 비싼 가격에 사들이고 대여금을 회수하지 않으면 재산상으로 손실이라는 점을 상상조차 못했다는 것을 믿을 수 있나? 오직 검찰만이 기업 측의 그런 말을 믿는 모양이다.

그리고 손해발생은 반드시 “현실적인 손해를 가한 경우뿐만 아니라 손해발생의 위험을 초래한 경우도 포함된다”는 대법원 판례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일단 손해의 위험성을 발생시킨 이상 사후에 담보를 취득하였거나 피해가 회복되었다 하여도 배임죄의 성립에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다”라는 대법원 판례도 검찰은 외면하고 있다.

도둑질을 하였는데 검찰과 경찰의 수사망이 좁혀지는 것을 감지하고 도둑질한 물건을 되돌려주었다고 검찰은 절도혐의가 없다고 할 것인가?

▶ 검찰이 자금난을 겪고 있는 계열사에 대한 상호출자 또는 상호지급보증관계에 있는 타 계열사의 일시지원으로 배임의 범의를 인정키 곤란하다고 하며, 특히 지원대상 기업의 도산이 가져올 더 큰 손해를 방지하기 위한 지원조치라는 기업 측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 점

지원 받은 기업들이 모두 도산할 절박한 상황에 처하지도 않았으며, 또 도산할 가능성이 있다손 치더라도 자금지원 여부에 대한 급박하고도 객관적인 필요성조사도 없이 단지 계열사 사정이 어렵다는 이유만으로 자기 회사의 이익을 포기하고 계열사를 지원하는 행위를 정상적인 경영상의 판단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이미 부실계열사에 지급 보증해 주거나 출자한 재벌계열회사의 주주나 임원을 배임죄로 기소하여 처벌한 사례도 여러 차례 있다.

금융감독기관도 재벌에겐 다르더라

삼성카드와 현대캐피탈에 대해 엄정한 법 집행 유보

재벌이라고 다 같은 재벌은 아니다. 5대 재벌과 6~30대 재벌과의 차이는 재벌과 중소기업의 차이보다 더 큰 정도이며, 1대 재벌인 삼성과 2~5대 재벌간의 간극도 무시 못할 정도이다. 그래서 사실 사법기관이나 국회에서 제대로 다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문제는 재벌문제 일반이라기보다는 상위 재벌, 그 중에서도 삼성그룹에 해당하는 문제가 많다.

게임의 규칙을 제대로 적용하지 않는 것은 사법기관만은 아니다. 금융시장을 감독하는 행정기구인 금융감독위원회도 마찬가지이다. 유사한 사례에서 금융감독기구가 작은 재벌은 게임규칙을 엄격히 적용하지만 제1대 재벌 삼성에는 그렇게 하지 못한 일이 지난 여름에 있었다.

지난 7월 금융감독위원회는 98년과 99년, 삼성카드와 현대캐피탈이 계열사 주식취득 과정에서 금융산업의구조개선에관한법률(금산법) 제24조를 위반했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현행 법에는 시정명령권이 없고 이들이 고의로 법을 위반한 것은 아니라고 보아, 7월 말까지 문제해결 계획을 제출하도록 요청하는 선에서 다른 제재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하지만 유사한 사건에 있어 금감위는 강력한 제재를 취한 바가 있어서 문제된 바 있다.

삼성카드와 현대캐피탈 사례에 앞서 작년 7월 4일 아남반도체 주식 9.68%를 취득하는 과정에서 금감위의 승인을 받지 않은 동부화재, 동부생명에게 문책기관 경고 및 임원에 대한 주의적 경고와 함께 문제되는 지분을 처분해야 하는 시정명령을 내린 적이 있는 것이다.

두 사건을 비교해보면, 금감위는 동부화재와 동부생명의 경우에는 금산법상 시정명령 규정이 없음에도 금융기관검사및제재에관한규정 제21조(기타조치) 및 보험업법 제134조(보험회사에 대한 제재)에 의해 시정명령, 즉 초과지분 처분명령을 내렸는데 반해, 삼성카드와 현대캐피탈의 경우에는 시정명령 규정이 없다는 이유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채 해당 회사에게 알아서 해결하라고 맡긴 것이다.

이는 삼성카드와 현대캐피탈에 대한 금감위의 조치는 규모가 큰 기업에 대해서는 엄정한 법집행을 유보하는 감독당국의 도덕적 해이의 대표적 사례에 해당한다.

만약 동부화재와 동부생명이 삼성카드와 현대캐피탈과 동일한 시기에 법 위반 행위가 적발되었다면 어떠했을까? 삼성과 현대그룹 덕분에 자기들도 면죄부를 받고 넘어갈 수 있지 않았냐고 동부화재와 동부생명에 있는 사람들이 아쉬워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박근용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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