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4년 11월 2004-11-01   1018

재벌들의 요구, ‘규제 완화’ 무엇이 문제인가

경기침체를 이유로 재벌들이 ‘기업규제완화’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들이 주장하는 ‘기업규제완화’가 경제를 살리고 국가경쟁력 제고로 이어질 수 있을까. 편집자주

누구나 느끼듯 우리 경제는 지금 아주 어렵다. 그래서 서민들의 삶은 고달플 수밖에 없다. 그러나 누군가의 위기와 어려움은 다른 누군가의 기회인 법. 재벌들은 현재의 경제침체 국면에서도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적극적인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기업규제 완화론, 기업규제 망국론’이 그것이다. 작년 초만 하더라도 ‘참여정부’의 등장을 놓고 불안과 우려의 정조에 휩싸여 몸을 사리던 재벌들은 이제 아무 거리낌 없이 규제완화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염치도 없이 터져나오는 재벌들의 규제완화 목소리

지난 10월 20일, 전경련, 상공회의소 등 경제 5단체는 국회 본회의 처리를 앞둔 공정거래법 개정안에 대해 출자총액제한제도 연내 폐지, 금융계열사 의결권 현행 유지, 계좌추적권 부활 백지화 등을 거듭 촉구했다. 경제 5단체는 출총제가 기업의 투자의욕을 떨어뜨려 경기침체를 심화시키고 일자리 창출을 더욱 어렵게 만들 것이라면서 “새로운 업종으로의 진출을 근본적으로 제약함으로써 5~10년 후 우리 국민을 먹여살릴 신성장 동력산업의 출현을 어렵게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금융계열사 의결권 축소와 관련, 적대적 인수합병(M&A)에 대한 경영권 방어에 매달리게 하고, 계좌추적권 부활은 기업의 경영활동을 위축시키고 계열기업간 정상적인 내부거래를 제약할 것이라고 우려를 나타냈다.

그러나 재계의 이런 목소리는 지난 6월의 공정위와의 회동에서 공정거래법의 연내 처리에 합의한 것과도 배치되었다. 공정위는 시장개혁 3개년 계획에 대한 재벌의 동의를 얻어내는 대신 이들의 실무적 어려움에 대해 도움을 주었다고 발표하며 서로를 치켜세우던 때와는 영 딴판이다.

재벌에 대한 노골적 구애를 보내는 여야 정치권

정치권의 현주소는 어떠한가? 평소에 재벌 편향적이라 평가받던 한나라당은 얼마전 공정거래법 개정안의 안건 상정 자체를 육탄공격을 통해 저지했다. 지난 10월 18일의 공정위 국감장은 삼성전자 이사회장으로 변했다. 실체적 근거가 모호한 삼성 전자의 적대적 M&A를 둘러싸고 한나라당의 대다수 의원들이, 이를 막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공정거래법 개정안이 철회되어야 한다고 입을 모았기 때문이다. 이런 와중에서 몇몇 한나라당 소속 의원들은 참여연대의 ‘차떼기당의 결초보은’이란 비판이 영 마음에 걸렸던지, 자신들의 이러한 행동이 국가경제를 위하는 것이라고 강변했다.

한나라당만 그런 것은 아니다. 사실 재벌 옹호에 있어 작금의 열린우리당 역시 결코 한나라당에 뒤지지 않는다. 특히 자신이 스스로 훈장처럼 표방해온 ‘386’이란 딱지가 이제 너무 급진적으로 보여 부담스러운 여당의 일부 의원들은 자신들이 ‘집안의 철부지가 아니라 어엿한 가장’이라는 사실을 확인받기 위해 앞다투어 재벌을 만나고 있다. 9월에 이광재 의원을 비롯한 이른바 친노성향의 의원들의 모임인 ‘신의정연구센터’ 소속 의원을 필두로 ‘참여정치를 실천하는 의원모임’, ‘새로운 모색’ 소속 의원들이 잇따라 재벌총수를 만나 현안에 대해 ‘깊숙한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그날 무슨 내용의 대화가 오고 갔는지는 당사자들만이 알 수 있지만 어떤 수준의 대화가 오고 갔는지는 이들의 발언에서 알 수 있다.

‘우리는 철없는 좌파가 아니다’, ‘외국에서 한국기업을 보고 자부심을 느꼈다’, ‘우리는 시장주의자이자 실용주의자이다’ 등등. 우리는 건전한 상식과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을 굳이 재벌을 만나 깨우쳤다는 그 386들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으며, 더더군다나 설사 재벌을 만나 이러한 생각이 보다 강하게 굳어졌다 할지라도, 그 다음 수순이 바로 재벌총수의 제왕적 지배구조를 인정하는 재벌체계 옹호론으로 이어지는 모습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재벌이 잘하면 경제는 되살아나는가

정부지출 확대, 금리인하, 감세, 그리고 규제완화. 경기 부양을 위해 정치권이 택할 수 있는 선택지들이다. 만약 이런 것들만을 사용하여 경제가 좋아진다면 이 세상에 경제성장이 부진하다는 이유로 권력을 내주어야하는 정부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이 어디 그러한가.

경제학의 제 1 공리는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 (No Free Lunch!)’라는 것이다. 정부의 씀씀이(예컨대 대규모 국책사업)를 늘려 지출을 확대하면 여기에 고용된 사람들의 수입은 늘지 몰라도 이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정부가 발행한 국채가 민간부분의 이자율을 높여 기업의 투자를 위축시키고 이는 실업으로 이어져 다른 사람들의 수입을 줄이는 것이 그 예이다. 마찬가지로 설사 출자총액이나 재벌금융사의 규제완화로 인해 소수 재벌들의 선도적 투자가 이루어진다고 할 경우 과연 우리 경제가 살아날 것인가 이를 위해 희생해야 할 비용은 없는가 고민해봐야 한다.

최근 한국의 많은 경제 연구기관들은 한국경제의 양극화 현상을 지적하고 있다. 예컨대 우리나라의 주종 수출품을 생산하는 IT산업의 경우 중간재 수입의존도가 높고 고용창출효과가 낮아 IT산업제품에 대한 수출수요 증대가 국내 투자와 고용의 증가로 연결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쉽게 얘기해서 외국시장에서 우리 ‘핸드폰’은 잘 팔리는데 그 핵심부품이나 기술들이 국산화되어 있지 않아 수출의 과실이 임금이나 이윤의 형태로 국민들에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추론이 아니다. 요즘 가장 관심이 많은 일자리를 예로 들어보자. 예컨대 외환위기 이전인 97년 30대 재벌들은 93만9000명을 고용했다. 이로부터 5년이 지난 2002년 재벌들은 고용을 얼마나 늘렸을까? 97년보다 23만6000명이 줄어든 70만3000여 명을 고용했다. 같은 기간 벤처기업은 13만4000여 명에서 29만7000여 명으로 16만3000여 명을 늘렸다. 이것이 진실이다. 결국 구조개혁은 외면한 채 현재의 재벌위주의 성장을 지속할 경우 수출업종-내수업종, 조립대기업-부품중소기업, 성장-고용 간의 괴리를 더욱 심화시킬 것이라는 것이 많은 학자들의 일치된 견해이다.

무분별한 규제완화가 불러올 참화

지금 재계가 더 정확히는 삼성이 입에 거품을 물고 반대하고 있는 재벌계열 금융기관의 의결권 제한문제를 살펴보자. 문제의 발단은 이렇다. 삼성전자의 외국인 지분이 약 60%에 이르면서 ‘대한민국을 먹여살리는 기업’인 삼성전자가 외국자본의 손에 넘어가게 생겼다는 논리가 일부 정치권과 언론, 그리고 재계를 중심으로 유포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기우에 불과하다’는 것이 많은 금융전문가들의 주장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삼성전자의 10대 외국인 주주들은 대부분 투자전문펀드라 경영권 장악을 목적으로 주식을 사고파는 일을 하지 않는다. 둘째 외국인 주주들은 투자전문 기업이므로 삼성전자와 같은 대공장을 인수하여 장기적으로 경영할 능력이 없다. 셋째 삼성전자는 이사의 시차임기제(이사를 주총에서 모두 교체하는 것이 아니라 1/3만 교체하는 것)를 실시하고 있으므로 외국인 주주들이 주주총회에서 똘똘 뭉쳐 표대결을 해서 이기더라도 일부 이사만 교체할 것이다.

결국 적대적 M&A는 몇 년에 걸쳐 가능한데 그 과정에서 경영권 분쟁으로 주가가 폭락할 것이 자명할 것이다. 따라서 외국인이 그런 터무니없는 일을 저지를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누구는 외국자본에 의한 삼성전자의 경영권 인수를 걱정할 바에야 “혜성이 지구에 충돌할 것을 걱정하는 것이 더 생산적”이라는 얘기를 하기도 한다.

사실 재벌계열 금융기관의 의결권 행사문제는 ‘재벌이 금융기관을 소유하는 것을 왜 규제하는가’라는 문제와 맞닿아있다. 일반적으로 금융회사는 타인의 자금으로 운용되어 부실화되더라도 대주주 부담이 크지 않다는 점, 예금보험제도를 통해 회생이 가능한 점 등이 가장 큰 이유로 꼽힌다. 쉽게 말하면 재벌이 금융기관을 소유할 경우, 이를 이용하면 재벌 계열사에게 막대한 금융상의 혜택을 줄 수 있으나 반면에 경영이 잘 안 될 경우에는 자신의 자본이 적기 때문에 손해보는 것이 적다는 것이다.

재벌의 금융기관의 소유나 재벌 소유 금융기관의 의결권을 제한하는 규제가 불필요한 규제가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한 우려가 아니다. 무리한 외형성장 전술로 일관하다 결국 부도 위기에 처하고 금융시장을 전체를 마비시켰던 LG카드 사태의 결말이 무엇인가? 당시 지배대주주 일가는 LG카드의 주식을 가격 폭락 전에 내다 팔았다. 그리고 LG카드의 부채는 국민의 혈세로 조성된 산업은행이 메꾸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사탕발림같은 규제완화론이 아니라 규제개혁이라는 쓴약이 필요한 때

그렇다면 우리 경제의 회생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 여기에는 정답이 없다. 다만 지금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이 규제 완화와 단기적 성장정책을 요구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시장에 꼭 필요한 건전한 규제와 이에 대한 엄정한 집행, 그리고 ‘코리아 디스카운트’ 현상을 치유할 재벌의 지배구조 개선, 수출확대와 내수성장의 선순환구조를 이어줄 부품 소재 중소기업의 육성, 한국의 빌게이츠가 나올 수 있는 혁신적이고 경쟁적인 시장질서의 확립, 마지막으로 성장 촉진형 분배구조를 형성할 사회안전망의 구축과 같은 중장기적인 구조조정 정책을 일관되게 밀고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경제에 공짜 점심은 없고, 만능열쇠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재벌이 아니라 재벌 할아버지라도 마찬가지이다. 재벌들의 규제완화론이 갖고 있는 문제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최한수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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