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2년 10월 2002-10-24   1668

영원한 3등국민, 우리도 사람이고 싶다-한센병자의 인권

‘이름 없는 들꽃’이라 불리는 꽃들. 혹시 이름을 모르거나 관심이 없기 때문에 그저 그렇게 부르는 것은 아닐까. 한반도 구석구석에도 이름 없는 들꽃처럼 숨어사는 외톨박이들이 있다. 갖지 못한 서러움, 배우지 못한 서글픔, 병든 몸으로 하루를 넘기는 사람들. 『참여사회』는 앞으로 이들에게 주목한다. 소수자 인권. 이는 더 이상 방치되어서는 안 될 사회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번호엔 대한민국 0.04% 1만8000여 한센병력자들의 인권을 말한다. 편집자 주

전북 익산시 왕궁면. 삼례인터체인지를 지나 우측으로 들어가면 작은 포장도로가 나온다. 완주군 공원묘지 가는 외길 따라 직진. 폐기물처리장과 작은 공장들을 지나 분뇨향내 물씬 맡으면 회색빛 마을과 마주하게 된다.

전국 88개 한센병력자(나환자 leprosy) 정착촌 중 가장 큰 규모의 마을이 있다는 왕궁면 익산농장 금오농장 신촌농장. 중앙등록된 1만7712명의 한센병력자 중 915명이 이곳에 산다. 주로 돼지 닭 등의 축산업에 종사하는 이들은 최근 축산경기가 좋지 않아 말린 돼지똥을 한 자루에 3000원씩 받고 제주 밀감·원예농원등에 팔아 수익을 올리고 있다. 비닐을 깔고 말리는 돼지똥들 사이로 느티나무 아래에서 장기를 두거나 담소를 즐기는 노인들의 모습은 여느 시골풍경과 다르지 않다.

금테안경에 하얀 야구모자를 눌러쓴 한 노인. 그는 아스팔트 위에 구부리고 앉아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눈썹이 없고, 가슴은 여성처럼 부풀었으며, 손가락은 하나뿐이었다. 올해 여든하나인 이상렬(가명) 할아버지는 거동할 수 없는 이웃 노인의 고장난 시계를 고치러 삼례로 가는 길이었다.

“서울서 오신 선상님이여? 우리 고상한 거 말도 모텨. 나는 왜정 때 북해도까정 갔다온 사람이에요. 징용으로 끌려가 탄광에서 오지게 고생했지. 일도 더럽게 많였어. 겨울에 얼마나 쎄 빠지게 일했는지 몸이 약해져 갔고 이 병 걸렸당게. 나도 한 3년 소록도에 있었어요.”

안경 너머 할아버지의 시선은 60년 전인 1942년 북해도로 향하고 있었다. 충혈된 눈가는 그 시절의 생생한 기억 속으로 급속히 빠져들고 있다.

“스물한 살 때여. 탄광에서 화약 넣고 꽝! 소리가 나면 탄을 캐는 광부였지. 하룻밤 새 산덩어리를 하나씩 뿌수고 그랬당게. 하하하. 겁나게 일혔어. 해방되고 나서 2년 뒤에 돌아왔는디 금메 얼굴이 붓고 눈썹이 빠지더라고. 땀이 찍찍 나고 말이여. 그리고 나선 곧바로 집을 나와버렸어. 이 병이 걸린 거여. 나 말이요, 강원도고 경상도고 안 다닌 디가 없을 정도로 다녔어요. 한 20년간 유리걸식허고 돌아다녔네. 원래 내 직업이 부로꾸(벽돌)도 쌓고 미장일도 하는 거였어. 일도 아조 잘했다고. 근디 병드니께 할 수 있나? 포기한 거제. 그러니 어쩌? 먹고는 살아야 것고, 그래서 사람들끼리 걸식허고 댕긴 거여. 그때가 젤로 서러웠제. 병들어 객지에서 얻어먹는 그 생활…. 그란디 한번은 어떤 지역에서 얻어먹고 살 때였는디, 우리보고 어린애를 잡아먹었다는 거여. 어린애가 이모네 간다고 나갔는디 안 온다고. 그때 순경까지 동원해서 아조 대판 싸워버렸어. 비가 부슬부슬 오던 날이었는디 지서까지 가서 누구든 내 손에 잡혔다 하면 다 잡아먹겠다고 했지. 한 7~8명 같이 다녔는디 동네 사람들이 우리를 멍석에 덮어씌워 갖고 얼매나 때렸는지 몰라. 순경한테 내가 그랬지. 내가 그 어린것의 간을 내어먹었으면 사람이 아니다, 나도 왜정 때 나라를 위해 징용까지 갔던 사람인디 그랬겄냐. 그란디 그 동네 사람들이 우리 억울한 걸 알아? 아무리 우리가 병들어 죽게 생겼어도 넘의 자식 간을 내먹겠냐고. 그래도 어찌나 우릴 무시하는지, 죽기 살기로 달겨든 거여. 한 네 시간 뒤에 그 어린애가 나타나니께 동네 이장이 우리보고 선상님이래. 오직이나 부애가 나야지. 그래서 말했어, 차라리 당신들 우리더러 문둥이라고 그래라.”

결혼의 조건, 단종수술

전남 남원 송덕면. 그곳은 이 할아버지의 고향이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한센병을 앓게 된 후로 단 한번도 고향을 찾지 않았다. 혹여 할아버지 때문에 가족들이 손가락질받지 않을까 두려웠고, 겉으로 볼 때 온전치 못한 육신으로 가족을 만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 뭣허러 찾아가? 그냥 이렇게 살먼 되았지. 6·25 때 죽은 줄 알 거여….”

추석인데 고향이 그립지 않느냐는 질문에 할아버지는 “아무렇지도 않다”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고 싶지 않으냐는 질문에도 “아니여. 남원 춘향제도 한번 가보고 싶기는 하지만 테레비에 다 나오는디 뭐. 그리고 사람들이 우릴 좋아하간디? 그 시선이 딱 싫어”라고 할 뿐이었다.

이 할아버지는 당신보다 두 살 위인 할머니와 1960년 왕궁면에서 결혼했다. 할머니도 할아버지와 같은 한센병력자다. 지금은 사라진 왕궁면 나환자치료 전문병원에서 각각 독신부와 여자부에서 살던 두 분은 할아버지의 단종수술을 조건으로 결혼할 수 있었다.

“그때 당시 우리들은 결혼하려면 무조건 정관수술을 혀야 혔어요. 으음. 안 그러면 합방을 모텨. 후훗. 암만 억울하고 말고. 그게 인간으로 할 짓은 아니지.”

서른여섯의 나이. 할아버지는 할머니와 합방하기 위해 차가운 수술대 위에 누웠다. 그리곤 영원히 자식을 가질 수 없는 상실을 짊어지고 수술대에서 내려와야 했다. 저항은 없었다. 왜 단종수술을 받아야 하느냐고 따지지 않았다. 그는 사회적 천형, 한센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비인간적인 학대가 또 있을까. 단지 한센병력자라는 이유만으로 단종수술을 강요받았던 것은 어쩌면 역사상 가장 잔인한 국가폭력으로 기록될지 모른다.

이세용 소록도를사랑하는모임 운영위원은 “1978년경 내가 소록도국립병원 2층 입원실(수술실)에서 치료부 조무원으로 일할 때까지도 단종수술은 계속 시행되었다. …그 이후 언제까지 반인륜적인 만행이 계속 됐는지 그 피해자는 얼마나 되는지 정확한 실태조사도 없고, 이에 대한 정부당국의 해명이나 사과, 책임도 없다”며 한센병력자들에게 무차별적으로 행해진 반인권적 행태를 고발하며 대책을 촉구했다.

『소록도80년사』에 따르면 1964년 9월 16일 보건사회부가 주최한 나병관리협의회에서는 전국 5개 국립병원장 및 의무과장 등이 모여 토론한 회의자료가 공개돼 있다. 그중 이 대목은 눈여겨볼 만하다.

「가족계획의 철저 : 이 문제는 누차 지시한 바 있으나 아직도 만족한 상태가 아니니 특히 다음 사항을 철저히 이행하여야 한다. -임신 가능한 자에 대하여는 정관수술을 적극 장려하여 가족계획에 완벽을 기할 것. -임신 가능자를 항상 조사 파악하여 출산을 최대한으로 억제토록 할 것.」

채규태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교수(한센병연구소장)는 일제시대 때부터 자행됐던 단종수술이 1963년 예방법이 바뀐 이후에도1970년대까지 지속됐다는 것은 한센병력자들에 대한 명백한 국가폭력이며 인권탄압이라고 강조한다. 그의 말이다.

“해방 이후 벌어진 단종수술은 사실상 한국 정부의 책임이죠. 이에 대한 공개사과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지난해 일본 한센병력자들은 그들이 국가로부터 당한 인권유린에 대해 국가를 상대로 벌인 소송에서 승리했습니다. 결국 고이즈미 총리의 사과까지 받아냈지요. 우리도 이런 소수자들의 인권보호를 위해 공익소송을 벌여볼 만하다고 생각해요. 대통령 취임식 때마다 전시행정으로 소록도 사람들 10명씩 부르는 행사하지 말고 진정 그들의 인권을 위해 정부가 무엇을 할 것인가 깊이 고민했으면 합니다.” 그의 지적은 날카롭고 분명했다.

“소록도에서도 생체실험을 목격했다”

금오농장에서 만난 박회서 할아버지. 그는 소록도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다. 20대에 한센병에 걸려 금오농장에 오기 전까지 그는 소록도의 역사와 함께 했다. 금오농장 양로원에서 담소를 나누던 그는 기자를 만나자 색안경 너머의 눈에 힘을 주며 이렇게 말했다. 민주국가에서 할말 못하고 산 서러움이 북받친다고.

“우린 하소연할 데가 없어요. 병 걸린 뒤로는 모조리 국가에서 운영하는 시설에 매여 살았기 때문이지요. 자유가 없었어요 거주이전의 자유도 없었다고 봐야지오. 병이 다 치료됐어도 사람들의 불쾌한 편견과 시선 때문에 1962년 소록도에서 단종수술 받고, 강제노동을 했지요. 하루 일 나가면 5전 받았어요. 일 안 한다고 하면 눈 오는 날 무릎 꿇고 앉아 벌섰어요. 얼마 전 만주에서 마루타실험이 있었다는 보고가 나왔는데 소록도에서도 생체실험이 있었어요. 내가 목격자예요. 일본 외과의사가 발가락에 무슨 주사약을 놓고 사흘 만에 뻣뻣해진 사람, 닷새 만에 마비되는 사람 구분했고 그러다 죽은 사람은 해부실에서 해부해 약물을 담은 병에 머리고 발이고 담아놓았어요. 임신한 여자가 죽었을 때는 뱃속에서 신생아를 꺼내 병에 넣어놓고 연구했지요. 해방되고 나서 다 없앴지만. 그 사진이 어디 있을 거예요. 나는 평생 숯과 벽돌을 굽는 일을 했어요. 노동 심하지, 먹는 것 잘 안 주지, 방은 춥지…. 고생한 것 이루 말할 수 없지요. 지금은 고흥반도가 된 오마도는 5·16 직후 우리들의 부락을 짓겠다고 ‘건설대’를 만들어 스스로 간척사업에 나섰던 섬입니다. 330만 평의 육지를 정착촌으로 만들어 잘살아보겠다는 각오가 있었는데 당시 신정식이라는 국회의원이 자기를 밀어주면 그 땅을 주겠노라고 했으나 결국 뺏어갔지요. 정착촌에 사는 노인 중 그때 노역 안 한 사람 거의 없을 거예요. 천대와 멸시를 받으면서 살아보겠다고 강제노역도 마다하지 않았는데, 지금 남은 건 억울함뿐입니다.”

여든셋의 고령인데도 할아버지는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60여년 전 기억을 되살리고 있었다. 더 늙기 전에 한센병력자에게 가해졌던 국가폭력을 고발하고 인권을 찾고 싶다는 그는 오마도 간척사업 겅제도역에 대해서도 국가가 배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우리가 무슨 힘이 있습니까. 도와주세요. 일제 때부터 계속된 학대와 편견, 오마도간척사건, 84인학살사건, 비토리학살사건 등 밝혀야 할 역사의 진실이 너무 많습니다”라며 토로했다. 모여 있던 노인들도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천장 위로 엷은 미소를 날렸다.

지금 현존하는 한센병력자들의 평균연령은 64세이다. 그들 중 운이 좋은 사람들은 단종수술을 받지 않은 채 자녀를 낳고 살고 있지만, 정착촌이나 국립병원 등에 수용돼 있는 8187명의 한센병력자들은 외로운 노년을 보내고 있다. 이상렬 할아버지처럼 이웃에 봉사하며 낙천적으로 사는 노인도 있지만 지나온 세월을 한탄하며 그늘 속에서 빛을 잃어가는 사람들도 있다. 올해 아흔다섯 된 김기홍 할아버지도, 여든여덟 된 남종수 할아버지도 모두 적적한 가을을 보내며 오지 않는 발길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이상렬 할아버지는 죽으면 깨끗이 화장할 거라고 했다. 땅에 묻혀도 나중에 풀 뜯어줄 사람 하나 없기 때문이라고 강조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자식 있으먼 뭐해? 살아 있어도 우리 같은 사람들 묘는 찾아와 풀 하나 안 뜯어줘. 누구 하나 안 치워준당게. 먼저 간 이들은 내가 가끔 낫 들고 가서 치우지만.”

이 할아버지가 한센병이 걸린 후 60평생 살아오면서 겪은 ‘차별과 편견’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다. 1953년 유준 박사가 미국에서 DDS라는 나균치료제를 들여와 본격 치료를 받으며 격리수용을 해제했어도 됐고, 1963년 예방법을 바꿔 결핵과 같은 3종 전염병으로 관리해도 된다고 판명됐는데도 한센병력자에 대한 편견과 차별은 지속되고 있다. 채규태 가톨릭의대 교수(한센병연구소장)의 말을 들어보자.

“한센병 환자는 한국사회에서 그림자 인간이에요. 있어도 없는 듯 살아야 했으니까. 영원한 3등 국민…. 제가 외래진료 하는 한센병력자가 200명 정도 됩니다. 그중 제주도에서 오는 분들도 계세요. 만약 어떤 한 분의 직업이 교사인데 한센병력자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사회적 생명은 끝나는 것이니까요. 가족 중에 한센병력자가 있으면 파혼, 이혼당하는 사례가 종종 있어요. 제가 과거에 결핵을 앓았지만 대학 들어가고 교수가 되고 의사 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어요. 그런데 유독 한센병력자들은 그 병력을 알리는 순간 사회적으로 매장되죠.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바로 우리 안에 존재하는 사회적 편견과 차별의식 때문이라고 봅니다.”

최근 정착촌에 살고 있는 한센병력자들은 자신들의 잃어버린 인권찾기 운동에 골몰하고 있다. 천성준 왕궁종합복지관장은 무엇보다 시급히 독거노인들의 재가복지서비스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센병력자라는 이유로 사회복지 혜택을 받을 수 없는 건 차별이라는 말로 덧붙였다.

한성협동회는 지난 3월 15일 주최한 한센병력자 권익보호 세미나를 펼치고, 그동안 지하에서 잠자던 한센병력자들의 인권문제를 햇볕 아래로 끌어내기로 했다. 이뿐 아니라 한센병력자들을 주축으로 일제강점기 조선한센병 환자들에게 강제노역을 시켰던 소록도갱생원 스보 마사스 원장을 살해한 이춘상 씨의 넋을 기리기 위한 ‘이춘상선생기념사업회’ 건설과 독립유공인 서훈 추진운동 등이 추진되고 있다. 또한 그들은 그동안 국가로부터 당한 여러 인권침해 사실을 고발하며 원고를 모집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도 벌일 계획이라고 한다.

장윤선(참여사회 기자)

정부지원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가입


참여연대 NOW

실시간 활동 SNS

텔레그램 채널에 가장 빠르게 게시되고,

더 많은 채널로 소통합니다. 지금 팔로우하세요!